* 이 리뷰는 「공연과 이론」(2018년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로 보이기 시작할 때
윤서현(연극평론가)
자유화 10년, 혼돈에 던져진 동시대인들의 고통열전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는 체코의 유명 극작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뻬뜨르 젤렌카가 프라하의 데이비츠키 극장을 위해 쓰고 연출한 작품으로 2001년 11월에 초연되었다. 작품의 제목은 섹스광, 알콜 중독자라 불렸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시인, 미국 현대작가 찰스 부코스키의 동명 단편소설집 Tales of Ordinary Madness(1983)에서 차용한 그대로이다. 젤렌카는 이후 자신의 희곡 중 기본적인 설정 몇 가지와 에피소드 일부를 수정하여 같은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는데 이 영화로 그는 그 해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러시아 영화평론가 심사위원 최고상을 수상하였다.
이 희곡의 에피그라프는 삶에 대한 부코스키의 통찰과 이에 대한 젤렌카 나름의 대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묵직한 주제와 가벼운 분위기가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이 작품의 독특함을 효과적으로 제시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 속에 놓여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이라는 게 어찌나 고약한 것인지 그들은 펼쳐진 삶의 상황에 저항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새로운 고통의 위험을 선택한다.
– 찰스 부코스키거기로부터 빠져나오는 단 하나의 방법이 존재한다. 자신을 우편으로 소포처럼 부쳐버리는 것이다.
2001년 12월
자신을 어딘가로 보내버리는 것을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으로 제안하는 반쯤 농담 같으면서도 절망적인 이 해결책은 본격적 작품 활동 이전 십여 년간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한 바 있던 부코스키의 전기에서 착안한 것으로 보인다(젤렌카의 원작 희곡에서는 뻬뜨르의 직업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으나 상사의 등장으로 보건데 적어도 그는 백수가 아니다). 2005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에서는 조금 구체화되어 주인공 뻬뜨르가 공항 물류 보관창고 직원으로 설정되어 있다(이번 서지혜 연출의 공연에서는 직장 상사 캐릭터가 완전히 삭제되었기 때문에 뻬뜨르의 직업 유무가 확실치 않았다. 원작에서 직장 상사 캐릭터가 의미하는 바는 매우 지대한데 이 인물이 생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한 서지혜 연출의 설명이 궁금하다. 이 인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본 글의 마지막에 더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에피그라프에서도 확인되는 바 젤렌카가 광기에 전제하고 있는 것은 삶의 방향을 잃어버린 이들이 느끼는 고통의 굴레에 대한 인식이다. 공산권 붕괴 이후 자유화가 급속히 진행된 지 10여년이 지난 시점에 쓰인 이 작품은 하나의 거대한 믿음이 무너진 이후 온갖 가치와 삶의 방식들이 엉킨 혼돈을 맞닥뜨린 동시대인들의 고통 열전으로 읽힌다.
조언대로 살거나 사랑으로 살거나
꼬마 뻬뜨르를 데리고 정치인들을 향해 총을 쏘는 장난을 즐겨했던 하넥 씨가 친정부 성향 뉴스 스크립트를 더빙하는 일을 맡았던 것은 부인의 조언 탓이 크다. 부인은 남편과 매한가지로 반체제적 농담을 일삼던 친구들에게서 그를 떼어내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하넥 씨는 외톨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 공산주의 정권이 벨벳혁명으로 종말을 고하고 난 지금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지난 시절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한편 하넥 부인은 남편과 동시대를 살았지만 그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시대의 변화에 대처해 왔다. 스스로가 강조하듯 그녀는 ‘실용적인 인간’이며, 남편과 아들이 타인들에게 이용당해 ‘루저’가 되지 않도록 밤낮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텔레비전과 신문 등 매체들이 전하는 요구를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쓸모를 확인하지만 남편이 집밖으로 나도는 지금 가족 안에서 ‘엄마’는 물론 ‘아내’로서의 위치까지 모두 잃고 ‘기로’에 서있다. 그녀는 아들의 윽박지름을 듣고 난 후에야 자신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조언이 아니라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다.
뻬뜨르 엄마한테 소릴 질렀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나도 알아. 미쳐버리겠더라고. 내가 갈림길에 서 있대. 그래서 뭐? 그래, 나 갈림길에 서 있어… 갈림길에 안 서 있는 사람이 있어? 사람은 조언이 필요하거나 사랑이 필요한 거야.(* 러시아어로 ‘조언’(совет)과 노동자대표회의를 뜻하는 ‘소비에트’(Совет)는 그 표기와 발음이 같다.) 이건 확실해. 하지만 널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조언을 할 수도 있어. 이게 문제야. 좋은 조언이라도 널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면 그것이 또 가치가 있는 것이냐, 이것도 문제고. 온통 문제들뿐인거지.
하지만 뻬뜨르의 독백이 말하듯 사랑 또한 고통 받는 인간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지 못한다. 하넥 씨 부부의 예가 증명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결합되기에는 인간 각자가 지닌 고독과 광기의 심연은 너무나 깊다. 알리쩨와 이르지 커플이 헤어지지 않았더라도, 야나와 뻬뜨르가 가정을 꾸렸더라도 향후 그들의 모습은 하넥 씨 부부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젤렌카가 이 우울한 진실을 다루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그는 파경에 다다른 이 노부부의 대척점에 새로운 커플, 모우카와 그의 마네킹 에바를 제시한다. 수많은 여자들에게 순진무구한 사랑을 바쳤지만 한 번도 그 사랑을 돌려받지 못한 모우카가 결국 백화점 진열 마네킹을 섹스돌로 개조해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젤렌카는 작품의 마지막에 에바가 생명을 얻어 무대 위를 누비도록 했는데 이 ‘기적의 광경’은 관객에게 이중적으로 읽힌다. ‘사랑으로 시작되었지만 광기로 끝난’ 하넥 씨 부부를 생각하면 에바와 모우카의 관계는 ‘광기로 시작됐지만 사랑으로 끝난’ 해피엔딩인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인간이 더 이상 인간과 관계 맺기를 포기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절망의 극단이기 때문이다.
이제 뻬뜨르는 스스로를 소포로 부쳐버림으로써 자신을 비롯해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가 고통 받고 있는 이곳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광기와 예술
젤렌카에게 인물들의 기행과 발작은 자신들을 속여 온 가치들과 범람하는 또 다른 수많은 가치들에 대한 반항이자 탈출구인데 이는 종종 예술적 창작 활동과 맞닿아 있다. 마리화나를 피우며 젊은 연인을 만나기 시작한 하넥 씨는 어느새 다른 이들의 복고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게 되었고, 모우카의 ‘정성스러운’ 광기는 그야말로 피그말리온 신화를 재현하여 마네킹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르지는 개나소나 창작에 대한 저작권을 요구하는 상황을 비꼬면서 현실의 규칙과 권위를 ‘더럽게’ 창조적인 방식으로 모독한다. 뻬뜨르 또한 작품의 말미에 벽에 시를 쓰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야나는 뻬뜨르가 텔레비전을 보는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조언’하지만 그는 자기 부모의 예를 통해 광기를 안은 채 일상을 사는 것이 자신과 타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안겨 주는지 알고 있다. 뻬뜨르는 일상과 광기 사이의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회사를 포기하고 시를 선택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가 자신이 만난 모든 이들이 사실은 다 하나의 시였다고 고백하는 상사와의 마지막 대화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뻬뜨르 정상적인 삶을 살아보려고 했지만 가능하지 않더라고요. 이제까지 모든 게 고통스러웠어요. 지금은 제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영감삼아 써보려고요. 제가 만난 모든 사람은 다 하나의 시예요.
상사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중 겉으로는 가장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반사회적 성향으로 인해 가장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인물이다. 원작 희곡에서 뻬뜨르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인물도 바로 이 인물이며 그 둘의 대화는 광기를 품은 채 불안한 일상을 사는 인물과 일상을 포기하고 광기를 선택한 인물이 각자의 경계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나누는 진솔한 대화이다.
소아성애적 판타지를 숨기고 번듯하게 직장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상사의 광기를 다른 인물들의 기행들과 동일 선상에의 의미화시킬 수 있느냐의 문제는 분명 복잡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반사회성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이 캐릭터를 향한 적개심을 전제하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상사 캐릭터는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불가해한 심연을 품은 외로운 인물로 읽힌다. 더욱이 그는 각색된 동명의 영화에서도 (모우카 대신) 마네킹을 사랑하고, (뻬뜨르처럼)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독일로 자신을 소포로 보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인물로 보완되어 제시되기도 했다. 즉 직장 상사라는 캐릭터는 다른 인물들만큼 (보다 더) 외롭고 위태로운 존재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해석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허용되는 광기의 범위
이 작품을 대하는 이들이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억압기제들에 의해 이 작품의 수위를 스스로 조절하고 있는 모습 또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원작에는, 힐튼 호텔 엘리베이터 방화 뉴스를 듣고 있던 뻬뜨르가 ‘훌륭해!’라고 외치도록 되어 있는데 한국어 번역의 경우에는 그가 그저 다시 한 번 ‘힐튼이구나.’라고 뉴스의 내용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방화는 훌륭하면 안 되는 것이라서 그랬을까. 한국 독자들의 성향을 간과할 수는 없겠지만 작품의 내적인 논리 속에서 충분히 우화적으로, 은유적으로 해석가능한 부분들이 과도하게 검열된 측면이 있다.
서지혜 연출의 공연에서도 이러한 지점들이 포착된다. 실비아와 하넥이 같이 피우도록 되어 있는 마리화나 또한 공연에서는 담배 정도로 묘사되었으며 남자 아이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낀다고 고백한 직장 상사의 캐릭터는 아예 삭제되었다. 이미 젤렌카 스스로 방화나 소아성애의 경우에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해치지 않는 한도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충분한 장치를 해둔 바 있는데(예를 들면 엘리베이터 방화는 사상자가 없었다고 보도되고 있으며 소아성애적 경향의 경우에도 남자 아이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번도 아이들을 덮친 적이 없는 인물이라고 두 차례나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명시적 언급만으로는 아무래도 껄끄러웠던 것일까(상사 캐릭터가 사라지면서 위에서 언급된 그와 뻬뜨르의 대화까지 사라져 버렸다. 공연에서는 예술테마를 포함한 이 대화 내용의 중요성 때문인지 상사 대신 작곡가이자 방화범인 이르지를 등장시켜 이 부분의 몇몇 대사들이 무대 위에서 들리도록 조절되었던 기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