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과 이론] 바람직한 청소년/ 김태희

* 이 리뷰는 「공연과 이론」(2018 여름호)에 게재된 원고를 재수록한 것입니다.

 

고정관념의 해체, 가치전달의 역전

 

김태희(연극평론가)

 

얼마 전 아동극을 보기 위해 지방의 극장(문화회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란 기억이 있다. 각 유치원에서 단체 관극을 나와서 극장 안은 보기 좋게 만석이었다. 기분 좋게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정작 연극은 구성도 엉망이었을 뿐더러 수시로 배우들이 무대 아래로 내려와 아이들과 손바닥을 마주치며 돌아다녔다. 아마도 창작자들은 그것이 아이들을 극에 참여시키는 방법이라고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참여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극적 완성도쯤은 포기해도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또 한 번은 강남의 어느 극장에 아동극을 보러 갔을 때 생긴 일이었다. 그날도 단체 관람으로 객석은 만원이었다. 환경보호라는 주제는 좋았지만 “쓰레기를 제 자리에 버려야해”와 같은 대사를 통해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대사를 아무런 경계 없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앞의 교육적 메시지와 대사가 담고 있는 비교육성의 간극이 너무 커서 얼떨떨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온 기억이 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이게 우리나라 아동청소년극의 한 단면이다(사실 아동 청소년극이라는 범주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긴 한다. 아동과 청소년의 경계는 무엇인가? 혹은 아동과 청소년을 성인과 구분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가? 텔레비전만 틀면 아동들은 무수한 성인물에 노출되는 이 시대에). 창작자들은 ‘아동’, ‘청소년’을 특수한 대상으로 인식한다. 나쁜 것으로부터 보호하고 좋은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하는 존재들. 그러다보면 당연히 극의 주제는 교훈 일변도로 흘러간다. 혹은 아동, 청소년의 문제를 그린다고 자처하면서 그들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인해 피상적인 접근에 그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왜 청소년들의 갈등은 늘 왕따 문제, 성적 위주의 입시 교육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심지어 불우한 가정환경이 그 청소년의 갈등에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서사는 이미 1980년대 <방황하는 별들> 시리즈에서 줄기차게 반복되어 왔는데, 도대체 왜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까. 결국 모든 원인은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 나의 사유는 제법 철학적이기까지 했었던 것도 같은데, 이제 그런 기억은 온데간데 없다.

 

이런 맥락에서 <바람직한 청소년>은 반가운 작품이었다. 제목에서부터 예상되듯이(?)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람직한 청소년’에 대한 인식을 뒤집어 놓는다.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모범생이 남학생과 키스를 하는 사진이 유출된 사건, 그 혼란스러운 장면으로 작품이 시작된다.

 

 

피상적 세계에서 핍진성의 세계로

 

작품의 제목은 매우 의도적이다. ‘바람직한’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우리를 맞이하는 인물들은 모두 이런 기대를 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교 1등에 모범생인 줄 알았더니 과학실에서 남자친구와 키스를 하다가 사진이 유포된 이레,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고 다니다가 잡혀온 현신은 도무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이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왜 우리는 이 아이들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고 있는 걸까. 도대체 ‘바람직한’ 모습은 어떤 모습인 걸까.

 

생각해보면 그 기준은 전부 어른들이 만들었다. 학생이라면 무릇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고 이성(동성은 물론이거니와) 교제를 자제해야 하며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혹은 부모님 말씀 잘 듣고 학생으로서 마땅한 체면을 지켜야 한다. 이런 것들 말이다. 따라서 이 극의 1차적인 목표는 어른들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바람직한’의 허상을, 그것을 강요하는 어른들의 이중성을 폭로하는 것에 있다.

 

작품은 크게 두 개의 서사를 축으로 삼아 진행된다. 하나는 이레와 지훈이 키스하는 사진을 찍은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범인 추적 서사, 다른 하나는 모범생 이레와 문제아 현신이 친구가 되어 가는 친구 되기 서사다. 기본적으로 극은 두 개의 서사가 교차되면서 진행되고 여기에 학교에서 한번 쯤 만나봤을 법한 인물들의 서사가 엮여지면서 작품 안팎이 풍성해진다. 전교 1등인 이레를 견제하고 질투하는 전교 2등 재범, 유부남 선생님과 불륜 관계를 맺고 있는 양호 선생님, 현신이 부재한 사이 현신의 여자 친구를 빼앗고 권력을 잡아보려는(?) 종철과 기태는 어느 학교에나 있을 법한 익숙한 인물들이다. 이런 인물들이 더해지면서 극은 보다 사실적인 색채를 갖게 된다. 여기에 아이들의 세계는 되도록 핍진하게 그리고 어른들은 희화화시키는 연출 방식은 어른들의 가치관이 갖는 모순을 극대화시키면서 관객들을 아이들의 세계로 끌어당기는 데 일조한다.

 

범인을 추적하던 이레와 현신은 결국 학교 창고에 숨어있던 봉수와 맞닥뜨린다. 봉수는 그야말로 의외의 인물이었다. 봉수는 극중 현신과 그의 무리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교복 재킷을 잃어버린 현신에게 자발적으로 교복 재킷과 간식을 가져다주고 종철과 기태가 휘두르는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한다. 요컨대 봉수가 미워할 만한 인물은 이레가 아니라 오히려 현신이다. 봉수가 늦은 시간까지 창고에 숨어 있었던 사연은 더 기가 막히다. 그는 아이들에게 맞지 않기 위해 모두 귀가 할 때까지 차라리 그 무서운 학교에 혼자 남아있기를 선택한다. 그런 그가 행복해 보이는 이레에게 악의를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모든 관계들은 얽히고 설켜서 누구를 쉽게 원망할 수 없는 결말에 다다르고 만다. 내가 저질렀던 잘못이 이제 막 친구가 된 이레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돌아왔다는 사실 만큼 통렬한 반성을 불러 올 수 있는 계기가 있을까. 이레 역시 마찬가지다.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한테 미움을 받게 되고 오해를 샀지만 한편으로는 봉수를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인간으로서 성숙해지는 계기가 되는 셈인데, 그것들은 결코 어른들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전히 자신들의 세계에서 서로 부딪혀가며 얻어지는 것들이다.

 

이레도 이레지만, 어쩌면 극 전체를 통과하면서 더 많이 변화하는 것은 현신일지도 모른다. 현신에게는 약점이 몇 가지 있는데 곧 그의 여자 친구와 가족이다. 현신과 이레의 대화를 통해 짐작해 보건데, 그의 부모는 불륜을 저질렀고 덕분에 가정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동생은 자신을 보고 자라서 툭하면 싸움을 일삼고 다니고 현신은 이를 숨기기 위해 더 강한 척을 한다. 일례로 여자친구에게 절대로 사과하지 않는다는 그의 권위적인 태도는 그런 강한 척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부모와의 갈등은 극에 깊게 침투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이 작품의 미덕이라고 볼 수 있다. 부모와의 갈등이 폭발하고 결국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는 건 판타지다. 더군다나 현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본인이 자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배우자를 두고 바람을 피운 부모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여자친구와의 기념일도 기억하지 못하던 현신이 누군가를 진짜 좋아하고 있음을 깨닫고 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게 되는 것이 이 작품에서 현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의 성장이다.

 

같은 맥락에서 마지막 반성문 장면과 지훈의 전화를 받는 이레의 모습은, 이레가 획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성장을 보여준다. 이레는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반성문을 쓰고 악에 받친 목소리로 반복해서 낭독한다. 어른들은 끝까지 지훈과 이레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이레는 더 이상 이해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반성문은 그냥 허공에서 흩어지는 문자에 불과할 뿐이다.

 

 

친구가 되기까지

 

사진 유포자를 추적하면서 이래와 현신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이레와 현신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 전, 반성실에서 반성문을 쓰라는 벌을 받는다. 첫 장면에 등장한 이들의 모습은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르다. 이레는 반듯한 옷차림에 반성문마저도 명필로 써내려가는 모범생이고 현신은 오토바이를 훔쳐서 타고 다니고 친구들에게 빵셔틀을 시키고 욱하는 성격으로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는,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학생으로 등장한다.

 

극이 시작되자마자 이런 현신의 폭력적인 모습이 부각된다. 그는 소문의 주인공이 이레임을 확인하고 까닭 없이 그에게 욕을 퍼붓고 신체적 위협을 가한다. 게다가 현신은 이레와 나란히 앉는 것조차 거부해서 책상의 위치를 바꾸고 이레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실 현신의 행동에는 타당한 이유가 없다. 사람들의 모욕에 이레가 발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레가 먼저 현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괴롭히지는 않는다. 현신이 보여주는 폭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한 형태이며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감정이기도 하다. 요컨대 이레를 대하는 현신의 태도는 성소수자를 대하는 사회 전반의 모습과 공명한다.

 

둘 사이의 관계가 급전하게 되는 계기는 이레에게서 비롯된다. 이레는 사진 유포자를 찾기 위해 현신에게 돈과 반성문 대필 등의 조건을 제안한다. 범인을 찾기 위해서는 당연히 조사자에게 사건의 경위를 제공해야 한다. 이레는 자신과 지훈 사이에 있었던 일을 현신에게 털어 놓으며 실제 키스하던 장면을 재현해 보인다. 감추고 부정할수록 민감한 문제에는 이상한 선입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기 위한 이 적나라한 장면은, 우리가 그동안 애써 감추고 말하지 않았던, 청소년의 성문제를 기정사실화하면서 오히려 더 진전된 논의를 하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온다.

 

떨떠름하지만 돈을 주겠다는 이레의 제안을 현신이 받아들임으로써, 이들 사이에는 우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한 달간 이들이 범인을 추적하면서 본 인물들의 모습은, 원래의 자리에서는 알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친구라고 믿었던 종철은 현신의 여자 친구를 빼앗고 이레에게 친절하기만 했던 교장 선생님은 이레를 경멸하고 다그치기만 한다. 교단 앞에서 윤리를 부르짖던 선생님들도 사랑에 눈이 멀어 불륜을 저지른다. 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진짜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시야가 밝아지자 마찬가지로 반성실에 있던 서로가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원인 불명의, 그마저도 학습된 혐오의 감정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이제 남은 건 친구가 된 둘뿐이다.

 

이 극의 일차적인 목표가 ‘바람직한’의 해체에 있다면 이차적인 목표는 결국 우리를 들여다보는 것이 될 수 있다. 양극단에 있었던 두 인물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가고 급기야 친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과 올바른 관계 맺는 법을 배우게 된다.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살아온 배경이 다르고 본래의 성격도 다르다. 그 외에도 변수는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올바른 관계 맺기는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의 우리는 얼마나 타인에게 제멋대로인가. 내 맘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것은 물론 이유 없는 혐오와 분노를 학습하기도 한다. 이레와 현신의 서사는 우리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무대에서 객석으로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바람직한 청소년>은 묘한 감정을 불러오는 작품이다. 그 시절 내가 한번쯤 적개심과 불만을 가져봤던 어른들의 이중성이 작품 곳곳에서 통쾌하게 폭로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이중성에 대한 비난은 이제 어른이 된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 이레와 현신의 입장에서 깔깔대며 같이 어른들을 비웃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그 어른들과 닮아있는 나만 아는 내 모습이 숨죽이고 있다. 속 시원히 웃을 수 없는 이 불편함이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또 다른 미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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