챠이카/ 정윤희

다시 한 번, <챠이카>

 

정윤희

 

극본: 안톤 체홉
번역: 전훈
연출: 전훈
출연: 홍정인, 유영진, 김지유, 김병춘, 정인범, 조희제, 조한나, 윤소연, 최재호, 김태형
공연일시: 2018.11.23.~12.30.
공연장소: 안똔체홉극장
관극일시: 2018.11.30.

 

 

비브라토라는 음악 용어가 있다. 주어진 음에 떨림을 주는 기술이다. 성악에서는 호흡을 이용해서, 기악 연주에서는 빠른 손놀림을 통해서 구사할 수 있다. 악보 상의 모든 구간에 과한 비브라토를 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비브라토가 아예 생략되어버리는 구간이 있어서도 안 된다. 연주자나 성악가는 아주 작은 정도라도 반드시 모든 음정에 비브라토를 담아야 한다. 비브라토는 악보 상의 모든 마디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이며, 또한 매번 다른 연주자가 그 곡을 연주해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어라는 거친 수단을 삼아야하는 이들은 음악가보다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처해있는지, 본연의 악보를 훼손하지 않고서도 비브라토를 활용해 얼마든지 원곡의 감동과 함께 자신의 개성을 전할 수 있는 음악가들과는 달리, 텍스트를 다루는 이들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읽거나 쓰는 사람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언어의 속성을 조금은 집요하고 논리적인 자세로 파고들어야 한다. 쓰인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고전을 올리는 일은 더욱 난감한 일이 되고 만다. 단 한 장면도 박제되거나 무의미하게 흘려보내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고전은 한 번 더 새롭게 번역이 되곤 한다.

 

전훈의 <갈매기>에서는 모든 장면에 일종의 비브라토가 살아있었다. 수년간 거듭 상연되어 온 이 작품이 꾸준히 관객들의 칭송을 받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점에 있으리라. 박제되는 신이 단 한순간도 없도록 연출가는 원작에 과감한 편집을 가했고, 대사는 오늘날 보통사람들이 쉬이 쓰는 언어로 거듭났으며, 덕분에 배우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들 중 단 한 단어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또한 <챠이카>에서는 배우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여러 등장인물들 중에서 주인공이 딱히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배역이 거의 비슷한 비중을 지니고 있는 작품인 만큼,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무의미하게 그냥 서 있는 순간은 없었다. 캐릭터들이 지닌 각양각색의 고유의 에너지들이 쉴 새 없이 교차하는 무대였다.

 

언어는 여러 갈래의 들숨 날숨들의 교차점 위에 존재한다. 고로 언어는 열려 있으며, 고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훈이 연출한 <챠이카>의 첫 번째 신과 두 번째 신의 순서가 바뀐 것은 매우 인상적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원작에서는 자신의 슬픈 생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상복을 입은 마샤가 등장하며 막이 열리지만, 전훈의 버전에서는 꼬스챠가 자연이라는 넓은 배경 앞에 서있는 무대를 가리키며 연극이 시작된다. 꼬스챠는 그의 삼촌 쏘린에게 장치도 효과도 변변치 않은 이 작은 무대가 아니라, 그 뒤로 펼쳐진 거대한 자연이 진정한 무대라고 말한다. 그것은 무한한 가능성과 변수를 배경으로 놓여 있는 고전을 상징하고 있었으며, 전훈의 버전 <챠이카>가 지닌 의미를 상징하기도 했다.

 

마샤가 가당치도 않게 상복을 차려입고 절망과 슬픔에 도취되어 있듯, 사람들은 저마다 특정한 이미지에 사로잡혀서 산다. 극중에서 유일하게 관조적인 태도를 취했던 의사 도른을 제외하면 등장인물들은 모두 욕망에 사로잡혀서 애통해하며 살고 있다. 쏘린은 일생을 공무원으로 살아온 세월에 대한 보상이 겨우 이 무료한 시골 생활이라는 게 괴로워 술과 담배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꼬스챠는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장면과 같이 공허하고 차디 찬 세계 안에 갇혀 있다. 니나는 성공과 유명세를 좇아 연인 꼬스챠를 등지고 뜨리고린을 따라 모스크바로 향했다. 육체와 정신이 산산조각 나고 짓밟힌 뒤에서야 그녀는 배우라는 직업도, 작가라는 직업도 그다지 황홀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꼬스챠가 그녀 앞에 던진 죽은 갈매기는 그 충격적인 비주얼만큼이나 니나와 꼬스챠의 앞날에도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모티브를 가지고 수없이 자유자재로 변형이 이루어지는 변주곡처럼, 욕망의 이미지들에 취해버린 매한가지 인물들이라도 각자가 그처럼 다양한 결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모든 마디에 적절히 비브라토를 넣는 일처럼 치밀하지 않고서는 무대 위에서 절대 표현될 수 없는 종류의 주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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