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호를 넘기며 면모를 일신하기로 한 월간 ‘오늘의 서울연극(TTIS)’에 앞으로 2개월에 한 번 연극 관련 정책에 관해 글을 쓰기로 하였다. 여기에는 예술 지원 정책, 예술 창작 환경 정책, 예술인 복지 정책, 예술인 양성 정책, 문화예술교육 정책 등이 포함될 텐데 본격적으로 게재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소위 결과만 좋으면 위계 폭력을 필두로 한 범죄 행동마저 용납하는 관행이 어느새 우리 사회에, 특히 예술계와 체육계, 연예계 등에 깊숙이 뿌리내렸고, 그 결과 온 나라의 공분을 사는 미투 사태를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제는 과정의 공정성을 최우선시하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어야 할 것이고 이는 우리 연극계에도 분명하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문화예술교육사 양성 과정이나 예술강사 연수 등에서 전문예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 일반인을 위한 예술교육, 즉 문화예술교육은 세 가지 다른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첫째 전문예술인 양성을 위한 교육에서는 대상자 누구나 반드시 넘어야 하는 엄격한 기준이 있는 데 반해 문화예술교육은 대상 집단에 따라, 또 하나의 집단 안에서도 구성원 개개인에 따라 목표점이 달라질 수 있어야 하며, 둘째 전문예술이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면 일반인들의 예술은 과정을 즐기는 것 또한 결과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중요하고, 셋째 전문예술은 이른바 전문성 확립을 위해 좁고 깊게 파는 것이지만 일반인들을 위한 예술교육에서는 흔히 장르 간에 벽이 느슨하거나 허물어지면서 복수의 예술 장르가 섞이기도 하고 또 의식주 등 일상의 문화와 예술이 융합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 두 번째로 거론한 ‘과정과 결과’에 대한 주장은 철회해야 한다. 그 동안 예술은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한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과 부조리가 행해지고 묵인됐는지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름다운 종을 완성하기 위해 펄펄 끓는 쇳물에 아이를 넣었다는 전설이나 뛰어난 소리꾼을 만들기 위해 한 소녀의 눈을 멀게 했다는 내용의 영화는 모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끔찍한 폭력성을 담고 있건만 흔히 높은 예술혼에 대한 미화의 재료로 활용되고는 했다.
이제 그러한 설화나 영화는 다시 해석해야 한다. 아무리 결과가 뛰어나도 과정이 올바르지 못하다면 그 결과물에는 결코 한 치의 예술적 가치도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비뚤어진 욕망이 빚어낸 암덩어리일 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과는 결코 어울릴 수 없다. 그렇다. 더럽고 추한 과정을 토대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아름다움 안에서는 모두가 편하고 안정되어야 하는데 폭력과 착취란 애당초 그런 편안함을 용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수많은 예술대학의 교육 철학은 달라져야 한다. 결과만 좋으면 용인되던 일탈과 뛰어난 기술 습득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행되던 편법적 관행을 과감히 떨쳐버려야 한다. 사실 그러한 용인 내지 묵인이 칭찬받는 결과와 높은 기량으로 이어졌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다. 어찌 보면 교육 역량의 부족으로 과정의 공정함을 제대로 가르치고 점검하지 못 한 결과 오히려 수많은 가능성을 날려 보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탈과 편법이 싫어서 떠나거나, 또는 그것을 거부하다 쫓겨나거나, 또는 그냥 그 안에서 희생물로 신음하며 자신의 길을 잃거나 한 예비 예술인들을 생각한다면 잃은 것이 훨씬 더 많을 수도 있다.
세상은 성공에 대해 환호하고 갈채를 보낸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 주목받지 못 하는 이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 그들이 조롱과 비하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 이르면 결코 좋은 사회라고 할 수 없다. 더욱이 비효율을 기본 특성으로 하는 예술을 놓고 그런 야만적인 상황이 벌어진다면 대단히 참담한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은 실패의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그래서 일생 단 한 번도 만족한 결과를 못 보고 삶을 마감하는 예술가도 많다. 아니, 대부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실패만 한다고 예술가가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거듭하다 그 실패를 바탕으로 세상에 불후의 명작을 선사할 수도 있고, 본인은 실패했지만 후대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수없이 많은 지망생들을 끌어들인 뒤 무한경쟁을 시켜 만에 하나, 십만에 하나만 살아남게 하는 관행은, 즉 구천구백구십구 명 또는 구만구천구백구십구 명을 희생해서 단 한 명을 얻는 악습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이에 있어 예술은 타인과의 경쟁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교육의 현장인 예술대학뿐 아니라 전문예술 현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생존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살아남은, 그 바늘구멍보다 작은 통로를 빠져나온 능력자들만을 인정하겠다는 지원 정책은 당장 폐기해야 한다.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으로 비판받지 않는 ‘보편 지원’과 예술 창작 환경 개선이 가능한 ‘간접 지원’으로 이른바 ‘실패의 자유’를 확장시켜야 한다. 아울러 수월성을 기준으로 하는 지원의 경우에도 무엇보다 과정의 공정함이 가능하도록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예술가로 하여금 정상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인건비 책정, 편법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예산 책정을 전제로 아예 편법을 불가능하게 하는 체계, 예술의 질적 발전을 담보할 수 있는 선진적인 평가 기준 등이 없다면 결국 또 다시 무늬만 지원 정책이 되고 말 것이다.
‘공정예술’이란 표현에는 예술은 과정부터 결과까지 모두 공정해야 한다는 함축적인 뜻이 담겨있다. 이제 ‘공정예술’은 예술과 예술가를 지원할 때나, 예술을 창작할 때나, 예술가를 양성할 때나, 일반인을 위하여 예술 교육을 펼칠 때나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덕목이 되어야 한다. 이에 ‘공정’이라는 단어를 토대로 모든 예술 관련 정책을 근본적으로 다시 조망하고 완전히 새롭게 만들 것을 제안한다.
2019년 4월 오세곤
한국연극의 문제가 무엇인지 우리는 깊게 과정, 결과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교수님의 판단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과정으로 치면 예술을 평가하기 위해 지나치게 심사하고 그를 통해 지원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색이 공연을 하는 연극이 관객과 소통이 없이 ‘끼리끼리’만 노니 만사가 불통일수밖에요. 그러니 동성애니 미투니 폭력이니 하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영화만 해도 흥행이 지배하니 ‘미투’가 없지 않은가요! 영화가 솔직히 정화된 동네인가요? 그런데도 문제가 없는 듯 돌아갑니다. 할 얘기가 정말 많지만, 좌우간 연극의 수요자인 관객이 빠져있으니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는 건 당연하죠. 예술이라는 연극의 근본이 흔들리니 아무 것도 ‘정상적’인 게 없을 수밖에요. 배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관객과 소통을 해서 ‘인기’와 ‘찬사’를 받으며 성장하고 발전해야 하는데 심사로 시상을 하니 개인의 권력이 판을 지배하게 되는 거라고 여겨집니다. 모든 게 이런 식이니 연극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