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긴장하지 않는다

배우 김종태

 

_선연 김수미(연극평론가)

 

**릴레이톡톡은 오랫동안 대학로 무대에 섰던 배우들을 찾아갑니다.
긴 시간동안 무대를 지켜왔던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의 가치와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합니다.
좋은 배우는 어떤 사람들인가요. 그들이 만드는 연극은 어떤 모습일까요. 릴레이톡톡은 배우들이 지목하는 배우들로 이어나갑니다. 

 

느릿느릿한 충청도의 아홉 살 사내아이가 갑자기 경남 김해로 전학을 갔다. 조용한데다가 매사 반응이 한 박자 느린 탓에 아이는 존재감이 별로 없었다. 충청도 말씨는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아이의 심장을 처음으로 뛰게 한 건 뜻밖에도 연극이었다. 별다른 시선을 받아보지 못했던 소년은 주목받는 일이 얼마나 기막히고 멋진 일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6학년 때 <돌쇠와 석쇠>라는 희곡이 있었어요. 발음이 정확하다고 선생님이 애들한테 종태처럼 읽으라고도 하셨죠. 칭찬받는 게 신났어요. 교회 성극에서는 애들이 요셉, 마리아, 동방박사까지 다 골라간 후에 헤롯왕 하나가 남았어요. 그런데 맡고 보니 헤롯왕이 제일 간지가 났어요. 금으로 된 왕관에다가 수염도 있고, 커다란 수건으로 만든 의상도 화려했죠, 왕 대사는 또 얼마나 멋져요. 신이 나서 막 애드리브도 했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다음날 교회 가서는 하도 어른들이 머리를 쓰다듬으셔서 고개를 못 들었어요.(웃음) 경남에서 가장 큰 교회였는데, 소문이 나서 다른 교회에 출장 연출까지 다녔어요. 기분이 굉장했죠. 자아가 확 열리는 순간이었다고 할까요.”

 

 

별안간 연극 전공을 작정하고 나섰다. 대학 연극반은 근처에도 못 가봤는데 난데없이 연극을 하겠다고 사범대를 그만뒀다.
자아가 확 열렸던 열 몇 살 소년의 심장, 그 유혹적인 기억이 스무 살 청년의 마른 가슴에 그만 불을 당겨버렸다.

 

김종태는 사범대 국문과를 중퇴하고 단국대 연극과를 거쳐서 연극원 전문사 과정을 수석 입학했던 재원이다. 사범대는 국립대였고 장학금까지 받던 터라 등록금 걱정이 없었다. 국립대 사범대라서 졸업하면 취직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 천성적으로 느리기만 하던 청년이 별안간 연극 전공을 작정하고 나섰다. 대학 연극반은 술이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가봤는데 난데없이 연극을 하겠다고 1년 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자아가 확 열렸던 열 몇 살 소년의 심장, 그 유혹적인 박동소리가 스무 살 청년의 마른 가슴에 그만 불을 당겨버린 셈이다.

 

“야학을 하던 때였는데, 책상 위에 놓인 중학교 1학년 2학년 3학년 국어책을 무심코 바라보다가 순간 안 되겠다 싶었어요. 저 책 3권으로 앞으로 40년은 더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는 자신이 없었어요. 미래가 지루할 것 같았죠. 그때 일기에 그렇게 썼어요.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뭘까,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먹여 살릴까를 고민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내 세대는 뭘 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대다. – 그래서 시험을 치기로 했죠. 아르바이트로 4백만 원쯤 벌어놓고 딱 한 학기만 해보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그리고 단국대에 입학하게 된 거죠. 지도교수님이 이 좋은 걸 왜 그만 두냐고, 교사하면서 연극하는 사람도 많다고 말리시는데 제가 탁 말했죠. 아닙니다. 저는 연극으로 먹고 살겠습니다.”

 

 

장 쥬네 <하녀들>(2005, 유림 연출)에서 마담 역.
당시 김종태는 마담의 손동작부터 시선까지 섬세하게 디자인했고 인물의 행동 속에서 정서를 체험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한다

 

연극으로 먹고 살겠다는 다짐, 그것은 자신의 발목에 스스로 걸어버린 족쇠였는지도 모른다. 그 압박감은 때때로 위협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짜릿한 한 순간의 유혹을 거부하지 못한 죄로 그는 기꺼이 연극이라는 십자가를 짊어졌다.

 

“작업을 일주일 이상 쉰 적이 없었어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낮에는 연습했고 밤에는 연기를 했는데, 그게 너무 좋았어요. 대학 강의를 하면서부터는 낮에는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공연을 했죠. 부모님이 산에서 과수원을 하시는데, 산을 오르는 아버지 어머니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을 멈추면 부모님에게 돌아가서 함께 산을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재충전은 제게 배부른 소리였어요.”

 

단대가 천안에 있던 시절에는 주말마다 기차를 타고 대학로에 올라가서 연극을 봤다. 1년동안 160여 편이 되었다. 짧게 끝나는 연극이 아쉬울 정도였다. 오태석의 <자전거>, 이강백의 <뼈와 살>, 장정일 작가의 <이세상의 끝>도 우선 긴 공연 시간 때문에 행복했고, 동경하던 신춘문예 단막극을 하루 종일 보는 일은 거의 축복에 가까웠다.

 

 

<쎤샤인의 전사들>(2017, 김은성 작, 부새롬 연출)에서 한승우 역.

 

 

직진 인생을 크게 좌회전한 것에 대한 혹독한 자기반성이었을까, 삶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
처음 얼마동안은 그의 영혼에 위로가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서 자유로웠다.

 

배워서 깨우치는 것이 있으면 나무껍질에서 진액을 내듯 씹어 삼켰고, 성서의 문장들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몇 번이고 우려냈다. 한 발짝도 허투루 내디딜 수가 없었다. 직진 인생을 크게 좌회전한 것에 대한 혹독한 자기반성이었을까, 삶에 대한 책임감이었을까. 그와 마주앉아 있던 처음 얼마동안은 그의 영혼에 위로가 필요한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위로받을 영혼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서 자유로웠다.

 

“서른이 되었을 때, 세 가지를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일기를 써왔던 것, 하느님을 믿는 것, 연극을 포기하지 않은 것. 전 그 세 가지를 평생 하고 싶거든요. 스무 살 때 ‘어른이 된다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과 해야 될 일을 구분하는 일이다’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서른 살에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니까, 내가 남 흉보고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던 온갖 나쁜 짓은 다 하고 있더라고요. 부끄러웠죠. 그런데 그런 내가 나는 훨씬 좋았어요. 세상과 사람들에게 관대해질 수 있었다고 할까요. 서른 살에, 나는 내가 그렇게 받아들여졌죠.”

 

 

그는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정말로, 그는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는 연기를 잘하려고 하지 않고 즐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그에게 ‘배우의 긴장’이란 것은 좀 더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자주 “나는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한다. 인터뷰하는 중에도 그는 유독 이 말에 힘을 주었다. 배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을 좀 더 자세히 잘 들어야 한다.

 

“내가 본질이 아니니까요. 나는 전령자일 뿐이거든요. 가치 있는 이야기를 전하는 전령자. 내가 실패한다고 해도 전체가 망하지는 않아요. 관객의 역할과 힘이 있거든요. 내가 실수를 한다고 관객이 멈추지는 않죠. 그들은 개의치 않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요. 그건 나 하나가 그 연극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나는 다만 필요하고 적절한 도구인 거죠.”

 

그의 말처럼 무대 위에서 설혹 배우 한 명의 실수가 있다손 치더라도 전체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전체를 읽고 있는 관객은 물론, 배우의 실수에서 당장 생각을 멈춰버리거나 그것으로 작품 전체를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하더라도, 관객의 존재를 그렇게나 믿는 배우라니. 관객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그 절대적인 믿음이라니.

 

 

<주노와 공작>에서 김종태는 족서 역할을 맡았다.
기능적인 인물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연습노트를 꼼꼼히 쓰면서 장면을 만들어가는 동안 인물의 새로운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배우는 도구일 뿐이다’ – 김종태의 이 말은, 행위를 하는 배우의 몸 밖에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바라볼 수 있는 배우가 할 수 있는 소리다. 몸과 마음의 무게중심을 정확하게 잡는 배우만이 비로소 건강하게 발화할 수 있는 소리다. 진실로 겸손하게 관객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는 정말로 무대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긴장이란 것은, 결국 잘해보고 싶은 욕망의 허상일 수 있으니 잘하려는 것이 아니라 즐기려는 쪽을 택한다면, 배우의 긴장은 좀 더 다르게 해석될 수 있겠다. 뻔뻔하게 방임하거나 허투루 실수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었다.

 

지난 인터뷰이였던 배우 남명렬이 일면식도 없는 배우 김종태에게 릴레이 바통을 넘기고 싶다고 말했을 때, 추천 이유를 “무대 위에서 품위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배우”라고 설명했다. 무대 밖에서 김종태를 바라보던 남명렬도 어쩌면 김종태 식의 ‘즐거운 긴장’을 발견했을지 모른다.

 

 

나는 연극이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이란,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따뜻하게 서로를 보아주는 일이에요.
공연을 본다는 것 자체가 관심이잖아요. 극장을 찾고, 불 꺼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배우를 보고 소리를 듣는 일, 그 모든 게 그렇죠.

 

“연극원 수업 중에 비평적 시각을 훈련시키는 과정이 있었어요. 그 즈음에 공연을 하나 보러갔는데, 그날 그 작품이 정말 하나도 재미없었어요. 제가 온통 구멍만 보고 있던 거죠. 그날 집에 돌아와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장문의 일기를 썼어요. ‘연극을 하는 나의 즐거움은 두 가지인데, 연기를 하는 일과 연극을 보는 일이다. 정말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연극을 비판적으로 보는 일이다.’ 예전에 저는 연극을 보고 오면 자면서도 웃었어요. 연극인들 중에도 연극이 재미없다고 안 보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요. 그날부터 다시는 차갑게 연극 보는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죠. 나는 연극이 타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이란, 하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따뜻하게 서로를 보아주는 일이에요. 공연을 본다는 것 자체가 관심이잖아요. 극장을 찾고, 불 꺼지는 시간을 기다리고, 배우를 보고 소리를 듣는 일, 그 모든 게 그렇죠.”

 

무엇인가를 얻겠다는 생각, 무엇인가를 찾겠다는 욕심은 시야를 가리기 쉽다. 욕망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몸 밖에서 몸을 바라보기. 그게 김종태가 배우로서의 자신을 단련시켜 온 방법이다.

 

 

<주노와 공작>의 족서 역.
대학 졸업 작품에서 김종태의 족서 연기를 봤던 연출가가 그를 처음 대학로 무대에 서게 했다

 

할리우드 1세대 한국 배우 오순택은 김종태에게 삶과 연기에서 영향이 가장 컸던 배우였고, 가슴으로 존경하던 교수였다. 그는 작년 4월에 향년 85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별세했다. 오순택이 연극원 초빙교수였던 시절에 김종태는 제자로 인연을 맺었다. 오 교수 사후에 그를 존경하던 제자 아홉 명은 <오순택 연기수업>이라는 책을 냈다. 김종태의 글도 실려 있다.

 

“그 분이 극장에 오신다면 전 너무 흥분이 되었어요. 늘 연기를 하고 난 다음을 말씀해주시는 분이라서 제 것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죠. 오 교수님은 제게 ‘전체를 보는 눈을 가진 배우’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지금도 제가 잘 쓰는 방법은 연출 옆자리에 제 의자를 놓아보는 일이에요. 연출가의 눈으로 제 역할을 보면 더 잘 보이거든요. 오 교수님은 배우가 좀 더 멀리 길게 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어요. 배우를 사랑하는 교수법도 그 분에게 배웠다고 생각해요.”

 

젊은이의 말에 동의해주면서 함부로 침범하지 않고 그들의 영역을 존중해주는 넉넉한 어른의 마음. 김종태는 그 품에 안겨보았던 참 운 좋은 젊은이였다. 국민대에서 강의를 하는 지금 오 교수에 대한 기억은 그에게 훨씬 더 각별하다.

 

“졸업 공연이 <주노와 공작>이었는데, 너무 맡고 싶던 공작이 아니라 족서를 하게 되었죠. 연극을 한 번도 안 보셨던 아버지까지 초대하는 일이라서 정말 멋진 공작으로 서고 싶었는데. 족서는 기능적인 인물이라서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왕 하게 된 거, 아예 뛰어 들어보기로 했죠. 실험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습 노트까지 써가면서 연습을 했어요. 매번 장면 장면이 너무 재밌어졌죠. 그걸 봤던 연출가가 저를 대학로에 서게 해준 겁니다. 결국 족서가 제게는 특별한 인연이 된 셈이에요.”

 

이혼과 맞물려 아버지까지 돌아가셨을 때는 상실감이 너무 컸다. 그렇게나 절실하던 연극도 하염없이 흔들렸다. 바로 그때 김종태는 <가지>를 만났다. 아버지 장례식을 다녀간 연출가의 부탁이라 선뜻 거절을 못했지만 상투적인 내용이 내키지 않아 밀쳐두고는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처음으로 제대로 독백을 읽던 날, 김종태는 왜 <가지>가 하필이면 그때에 본인에게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버지 장례식 때 상주를 하느라 제대로 울지도 못했어요. 입관할 때 목 놓아 울어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죠. 그런데 그날따라 아들이 자꾸 목마를 태워달라는 거예요. 입관하러 들어가야 하는데, 보채는 아이를 번쩍 들어 어깨에 얹혀놓고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그때 깨달아지더라고요. ‘아, 삶은 이어지는 거구나’ 그날 아버지한테 말했죠. ‘아버지 감사합니다. 잘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머니는 저희가 잘 모실게요. 제가 이어갈게요.’ 그런데 <가지>의 마지막 대사가 그래요. ‘제가 이어갈게요’. 아버지가 제게 연극을 이어주신 거죠. 종태야, 괜찮으니까 해라, 그러시는 것 같았어요. <가지> 덕분에 저는 아버지를 10번이나 보내드릴 수 있었어요.”

 

교사가 된다고 자랑스러워하던 아들이 갑자기 연극하겠다고 나섰을 때 아버지는 내심 서운하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하지 말라는 소리는 단 한 번도 안 하셨다. 지켜보다가 답답해진 어머니가 왜 안 말리느냐고 물으셨단다. 큰 도움도 못 주는데, 제가 굳이 하고 싶다는데 하게 두자 하시더란다. 그 소리에 아마 어머니도 묵묵히 과일나무의 가지를 쳐내셨을 것이다.

 

 

<데모크라시>의 빌리브란트 역의 김종태.
2013년 초연 당시의 모습. 5월에 5년 만에 재공연하는 무대에서 김종태는 다시 빌리브란트로 무대에 선다

 

“나는 연극을 보면 표 값을 시간으로 보상받으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어요(웃음). 이번에 하는 연극 <데모크라시>도 3시간 20분이에요. 지난번보다 더 길어질지도 모릅니다.”

 

김종태는 5년 만에 재공연되는 <데모크라시>(5.17-22,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 출연한다. <데모크라시>는 2013년 국내 초연되었고, 3시간 넘는 긴 공연시간에도 불구하고 당시 평단과 연극인, 일반 관객들에게 호평을 받아 앙코르 문의가 많았던 작품이다. 영국 극작가 마이클 프레인이 쓴 이 작품은 2003년 런던 이브닝 스탠더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번에는 제40회 서울연극제 공식초청 작품으로 공연된다. 전 서독 총리 빌리브란트와 그의 비서이면서 동독의 스파이였던 권터 기욤의 정치 스캔들을 다룬 <데모크라시>에서 김종태는 주인공 빌리브란트를 연기한다. 블로그로 볼 수 있는 관객들의 후기에는 김종태에 대한 호의적인 평가가 유독 많다.

 

“저는 <데모크라시>를 하면서 선배들과 동료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초연에서는 퇴장 없이 무대에 있었기 때문에 별 차이를 몰랐죠. 큰 극장에서 등퇴장을 하다 보니 대기하는 시간과 배우들에 대한 생각이 새삼스럽게 많아졌어요. 단 몇 분간의 출연을 위해서 하루를 다 쓰는 사람들이 연극에는 많아요. 그렇게 연극 한 편이 만들어지죠. 그들의 노력과 배려 때문에 무대를 버텨왔다는 사실을 최근에 깨달았어요. 저는 이렇게 좀 늦네요.”

 

그는 어떤 순간도 매번 기회로 소화해내는 능력이 있다. 지나온 순간을 대부분 정확하게 기억하고, 그것들이 만든 고랑과 흔적을 마치 책 속의 문장처럼 고스란히 되살려냈다. 이는 순전히, 속도의 문제 같다. 세상의 속도보다 빠를 수밖에 없던 어리고 젊은 시절에도 남보다 느린 천성 덕분에 그는 더 많이 느끼고 깨달았다. 매번 인생의 속도보다 훨씬 뒤늦게 도착했던 김종태의 시선과 생각이 깊고 각별했던 것은 세상이 보낸 선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와 이야기를 끝내면서 배우는 참 멋진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을 계속해서 객관화시키는 작업이다. 그래서 관객이 연극을 계속해서 본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배우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삶이 객관화되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고, 정당화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오랫동안 늙어가는 일, 배우와 관객은 그래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받은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다음 배우는 김선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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