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와 브레히트의 ‘눈’
-연극 <갈릴레이의 생애>-
글_조종일
작 : 베르톨트 브레히트
연출 : 이성열
제작 : 국립극단
장소 : 명동예술극장
일시 : 2019년 4월 5일 ~ 28일
과도기를 살아가는 존재
오늘날 우리는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은 벌써 눈앞으로 다가왔고, 4G를 넘어 5G를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다. 이로 인해 가상현실과 인공지능은 공상과학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우리 삶의 일부가 되었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인류에게 축복이 되었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축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빛이 항상 그림자를 수반하듯, 변화가 있으면 기대와 더불어 그에 따른 두려움도 따라왔다. 이러한 간극은 때론 혼란을 낳기도 했다. 가깝게는 ‘밀레니엄버그’처럼 디지털 혁명기 당시에 퍼졌던 사람들의 우려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을 극복한 후에는, 새로운 시대가 사람들을 맞이했다. 우리들이 사는 오늘이란 것은, 이러한 과정이 계속 반복되어 형성됐다. 우리는 언제나 과도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였다.
‘갈릴레이’와 ‘브레히트’의 만남
갈릴레이의 시대가 그랬고, 브레히트의 시대가 그랬다. 갈릴레이는 르네상스를 살았다. 그냥 산 게 아닌, 당시 과학과 철학의 중심에 있었다. 브레히트가 살았던 시대는 근대와 현대의 전환점이었다. 산업혁명과 다윈이 제창한 진화론으로, 사람들은 경제적, 물질적, 정신적 변화를 맞았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과학계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지만, 세계대전을 두 번 겪으면서 인류가 과학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었다. 금기의 상징이었던 사과가 오늘날에는 과학의 상징이 된 것처럼 말이다. 브레히트는 ‘객관’과 ‘관찰’의 방식으로, 이를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했다.
브레히트와 갈릴레이의 만남, 갈릴레이의 위대한 발견을 브레히트가 무대 위에 올린 것은 이러한 시선과 닿아 있다. 브레히트가 근대와 현대의 과도기에 있었다면, 갈릴레이는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의 중심에 있었다. 말하자면 브레히트 이전 세대인 셈이다. 브레히트는 이전의 세대의 모습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과도기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성찰하게 만들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에 이어 갈릴레이가 주장했던 지동설은, 르네상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발견 중 하나였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란 주장에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 객관적 시선을 가질 것이 요구된다. 이러한 시선은 브레히트가 연극을 바라보는 태도와 연결된다.
작품에서 나타나는 ‘눈’의 형상
발전(發展)의 전제는 발견(發見)이다. 발견이란 ‘아직 찾아내지 못한 혹은 알려지지 않은 사물, 사실, 현상 등을 찾아냄’을 뜻하는 말이다. ‘발견(發見)’에서 ‘견(見)’은 ‘사람(儿)’에서 ‘눈(目)’을 부각시킨 형태이다. 즉, ‘보다’의 의미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사람이 눈으로 하는 행동이다. 브레히트의 ‘객관(客觀)’과 ‘관찰(觀察)’도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에서 시작한다. 이는 또한 갈릴레이의 연구 기반이기도 하다. 갈릴레이는 책상에 앉아서 펜만을 굴리는 어떤 이들과는 달리, 본인의 관찰을 직접 기록하여 이를 바탕으로 의견을 펼친다. 갈릴레이에게 있어서 눈이란 진리와 통하는 통로인 셈이다. 이러한 눈에 대한 비유는, 작품에서 발견(發見)된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망원경’을 꼽을 수가 있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의 결정적인 차이로도 작용하다. 우주를 탐구함에 있어서, 인간의 눈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허나 갈릴레이는 이러한 한계를 망원경이란 도구를 사용해 극복한다. 그에게 있어서 망원경은 눈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이를 통해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가설에 그쳤던 것에 근거를 더하게 된다. 또한 망원경이란 소재는 작품을 이끌어나가는 데에 있어 큰 비중을 갖는다.
작품과 인물에 있어 망원경이 특별한 물건인 만큼,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발명하는 과정 역시 특별할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망원경을 정말 어이없게, 우연하게 갈릴레이에게 도달한다. 자기에게 수업을 받고자 갑자기 찾아온 ‘루도비코’라는 청년으로부터,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의 독특한 발명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갈릴레이는 ‘루도비코’의 정보를 토대로 순식간에 망원경을 만들어내 선보인다. 물론 갈릴레이의 천재적 두뇌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손쉽게 망원경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갈릴레이는 정말 빨리 망원경을 손에 넣은 것은 맞다. 극에 나온 표현을 빌리면, 네덜란드라는 지점에서 이탈리아의 갈릴레이란 지점까지 올 수 있는 최단거리인 직선코스로 망원경은 찾아온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하여 태양계를 여기저기 면밀히 살핀다. 그러면서 해와 달과 금성이나 목성 등을 관찰한다. 망원경 덕분에 갈릴레이는 자신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여러 근거들을 획득하게 된다. 지동설이 확실해진 시점이다. 망원경이 갈릴레이에게 쉽게 왔듯, 갈릴레이의 업적 역시 세계 곳곳으로 쉽게 퍼져나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두 지점의 사이엔 장애물이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는 너무 강력하고 단단했다. 그들이 내놓은 사상과 이론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뿌리 내려 있었다. 그들의 벽은 높았다.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던 갈릴레이였지만, 끝내 그는 종교재판에서 자신의 이론을 부정한다. 허나 갈릴레이는 종교의 감시를 피해 자신의 연구를 이어나간다. 자신의 시력을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뒷받침할 연구들을 완성한다. 이런 결과물은 갈릴레이 대신 그의 조수 ‘안드레아’의 손에 들려 이탈리아를 무사히 벗어나 유럽에 퍼진다.
직선거리? 곡선거리? 눈을 뜨면 볼 수 있다
갈릴레이의 지동설은 기존의 우주관을 뚫고 나아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두 지점 사이 장애물이 있다고 한다면,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야말로 서로에게 도달하는 최단거리일 수도 있다. 돌아가는 것이 정답이 되기도 한다는 뜻이다. 갈릴레이는 학자로서의 사명감과 자존심을 잠시 내려놓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연구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것을 ‘안드레아’에게 전달했다. 갈릴레이는 자신의 시력을 잃어 연구를 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지만, 대신 ‘안드레아’가 갈릴레이의 눈이 되어 세상의 진리를 파헤칠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지점 사이 직선거리(―), 그리고 사이의 장애물의 존재로 인해서 최단거리가 되어 버린 곡선거리(), 그리고 이것이 확장되면 동심원(☉)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모양을 곰곰이 곱씹어보자. 사람이 천천히 눈을 뜨는 모습이 보인다. 마지막에 동심원이 되면, 가운데의 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우주가 된다. 우주의 중심인, 직선을 곡선으로 바꾸는 가운데의 작은 원은 흑점으로 덮여 있는 반짝이는 태양이다. 이런 작은 태양은, 우리의 눈 가운데 우주만큼 어두운 곳에서 깊은 빛을 영롱하게 뿜고 있다. 이러한 작은 우주 모형은, 기존의 우주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우주관이 형성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기존의 천동설의 세계가 변화를 거쳐서 새로운 지동설의 세계로 탈바꿈한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것이다(☉―☉). 이는 망원경의 모양과 닮았다. 두 개의 눈(렌즈) 그리고 그것들을 연결하는 긴 관 하나. 서로 다른 모양의 렌즈가 원통형의 관을 통해 연결되는 모양이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으로 세상과 우주를 보는 것은 세계가 바뀜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의 변화는 특별한 세트를 통해서도 표현된다. 관객들을 주목하게 하는 독특한 원형의 무대장치는, 단순하면서도 작품의 주제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장면은 원형무대 위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장면이 바뀔 때면 무대의 회전이 이뤄진다. 장면의 전환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므로, 무대의 회전은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시계의 침들이 움직이듯, 그리고 지구가 자전하듯, 한순간도 멈춰있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은 무대장치의 모습에서도 발견된다.
다음은 어떨까? 갈릴레이의 세계 이후의 세계는? 작품의 대단원, ‘안드레아’는 국경을 지나다 어떤 소년을 만난다. ‘쥬세페’란 이름의 소년은 ‘안드레아’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지’ 묻는다. ‘안드레아’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겨우 출발선에 서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갈릴레이’의 세계는 끝났다. ‘안드레아’는 자신의 세계를 살고자 떠났다. 그리고 ‘쥬세페’, 정체 모를 소년은 이제 출발선 위에 서있다. 새로운 차례를 기다리며…
‘갈릴레이’처럼… ‘브레히트’처럼…
변화의 시기에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작품은 명확한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는 보여준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눈’이다. 발전(發展)의 전제는 발견(發見)이며, 발견을 위해선 새로움을 쫓는 눈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변화와 발전을 똑바로 바라볼 좋은 눈이 필요하다. 변화를 무조건 수용하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변화가 언제나 긍정적으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발전이 있으면 항상 적응하지 못해 도태되는 자들이 있었고, 여러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그렇긴 하지만 더럽다고, 두렵다고, 무섭다고 해서 눈을 감아버려서는 아니 된다. 눈을 감고 이것들을 외면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우리에겐 갈릴레이처럼 브레히트처럼 ‘객관’적 시선을 통해 ‘관찰’하고 새로운 ‘발견’을 추구하는 거야말로 앞으로 다가올 새로워질 세계에의 준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