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지금 ‘살아있는가?’
-연극 <함익>-
글_최현수
작 : 김은성
연출: 김광보
제작 : 서울시극단
장소 :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일시 : 2019년 04월 12일 ~ 28일
아마 보도 자료로 나가는 프레스콜 영상이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두 사람이 정면을 바라보며 대사를 외치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무언가에 잔뜩 성나 보였다. 한 명은 멀쩡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에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대사를 외치다 울먹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무엇에 분노하고, 무엇 때문에 좌절했을까. 내게는 그 모습이 꽤 인상적이었기에 연극 <함익>에 대해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을 현대극으로 옮겼다니 더욱 관심이 갔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초연을 하고도 1년이 더 지나있어 아쉬웠는데, 마침 올해 재연 소식을 듣고는 당장 극장으로 달려가서 첫 공연을 봤다.
연극 <함익>은 <햄릿>의 리메이크, 혹은 현대극으로의 각색이라 소개되고는 한다. 작품의 기본적인 플롯은 갖되 배경이나 주요 인물들을 살짝 바꾸었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공연을 보고 나면 전혀 새로운 작품처럼 느껴진다. 햄릿의 플롯을 충실하게 따라가길 거부하거니와, 오히려 크게 비틀어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녹여냈기 때문이다. <햄릿>이라는 작품이 수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라는 점과, 그 작품을 비틀어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점. 그리고 2년이 지나 다시 공연에 오른다는 것으로 연극 <함익>은 깊이 있게 다루어져야 할 점들이 분명한 작품이다.
<햄릿>과 <함익>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설정을 가진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에게 복수하는 인물이고, 함익은 자신의 친어머니를 죽였다고 여겨지는 새어머니와 친아버지에게 분노와 원망을 갖는다.
재벌가의 딸, 명문대 엘리트, 대학 교수, 뛰어난 외모, 재벌가 아들의 끈질긴 구애 등 그녀는 아마 평생에 걸쳐도 얻기 힘든 것들을 모두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무언가에 억눌려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에게 대들어본 적이 없는 듯 폭압적인 그의 모든 말(명령)에 수긍하고, 주변인들에게는 언제나 흐트러짐 없는 겉모습을 유지한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익’이 있다. 익은 인간의 형태로 발현된 함익의 또 다른 자아로,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가장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극에서 익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함익은 전혀 다른 인물이 되곤 하는데,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꺼내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들을 익에게 모두 털어놓으며 위로받기 때문이다.
함익은 익과 있을 때 시종일관 자유로운 모습이다가, 어느새 한 남학생 이야기에 푹 빠지게 된다. 자신이 지도하는 연극과 학생들 중 뛰어난 열정과 남다른 해석력을 가진 ‘연우’에 대한 이야기다. 항상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유지하던 그녀는 연우로 인해 흔들려 점점 극단적인 선택들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 속 함익은 복수의 운명을 가진 ‘햄릿’이면서도, 열렬히 사랑받고 싶어 하는 ‘줄리엣’을 꿈꾸게 된다(이는 극의 부제이기도 하고, 실제로 첫 장면에서 함익이 흰색 수트를 입고 줄리엣의 원문 대사를 낭독한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검은 수트를 입은 것과는 대비되어 빛나기까지 한다. 아마 그녀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이었을 것이고, 함익에게는 피억압적인 삶이 닥치기 전에 남아있었을 꿈같은 것이 아닐까. 또한 번역되지 않은 대사를 읽었다는 점으로 보아 그녀의 꿈은 그 무엇보다 ‘원문’에 충실했을 것이다. 함익의 그 꿈은 연우를 만나 더 강화된 듯 보이나, 그녀를 파멸로 이끄는 요소 중 하나기도 하다).
<햄릿>과 <함익>은 서로 다른 노선을 걷는다. 복수의 칼날을 갈며 마지막까지 결심을 향해 이야기를 이끌고 가는 <햄릿>과 달리, <함익>은 복수심을 이야기의 중심에 두고 함익이라는 인물 자체를 들여다보게 한다. 외면과 내면으로 이분된 그녀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또한 함익은 친아버지와 새어머니를 향해 노골적으로 분노를 드러내지도, 그렇다고 복수를 계획하거나 직접 실행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과도한 냉철함과 자존심이 그녀와 연결된 관계들을 파멸로 이끈다.
플롯 또한 다르다. 선왕의 유령에게 사망의 전말을 들은 뒤 복수심을 갖게 되고, 수많은 갈등의 기로에 서지만 결국 그 복수를 운명으로 여기며 마지막을 향해 치닫는 것이 햄릿의 플롯이라면, <함익>은 방어적이고 피억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던 함익이 연우를 만나면서 조금씩 파멸로 향하는 구조를 가진다.
그런 와중에도 작품 곳곳에 원작의 흔적들이 숨어있다. 가령 등장인물들의 이름인 함익과 오필형(햄릿과 오필리아의 변형) 등이 그렇고, 극 중 함익이 지도하는 공연이 햄릿이며 연우가 그 주연을 맡은 설정 등 <함익>은 <햄릿>을 연상시키는 단서들을 곳곳에 두고 있다. 또한 친어머니가 죽은 뒤 새어머니와 결혼한 친아버지는 선왕의 죽음 후 어머니와 결혼한 삼촌을 떠올리게 한다. 원작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원작의 속성들을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함익>의 주요 키워드는 ‘젠더스와프’다. 극 중 대부분의 인물들은 성별이 전환되어 나타나는데, <함익>의 주인공 역시 남성이었던 햄릿이 여성으로 바뀐다. 이는 ‘원작 비틀기’의 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남성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며 남성 중심으로 전개되는 원작을 비틀어 <함익>에서는 대부분 여성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이끈다. 여성인 함익을 중심으로, 함익의 분신인 익, 오필형의 친어머니와 함익의 새어머니, 연극과의 연출을 담당한 여학생 등 함익과 갈등을 겪는 여러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하지만 ‘젠더스와프’는 단지 성별을 전환하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함익>에서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라는 관념에서 많이 벗어난 인물들을 보여준다. 주도적이고, 권위적이며, 마냥 수긍하지만은 않는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대중매체에서 보여지는 여성 캐릭터의 공식(주로 수동적이고, 적은 분량을 차지하며, 남성 주인공의 각성을 위한 일회적인 도구로 소비되는 형식)을 부정하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여성 서사’라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가진다.
<함익>에 쓰이는 배경과 구조물들은 대체로 단조롭다. 주로 검은색 톤의 배경에 액자형 기둥이나 거울처럼 반사되는 막이 달린 벽, 이동식 바닥과 고정된 의자 등, 극에서 ‘공간’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그저 최소한의 구조물들을 조합하고 변주하는 방식으로 장면을 보는 관객들이 공간의 기초적인 정보만을 파악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는 <함익>에서 인물의 대화와 독백, 연기, 인물들 간의 관계에 더 집중하게끔 연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공연의 배경이나 공간을 나타내는 구조물들이 오히려 화려했다면 자칫 관객들의 시선을 배우에게로 모으기 어려웠을 것이다. 시공간적 배경은 관객들의 상상에 맡기고, 눈앞에서 연기는 배우들에게 집중하도록 시선을 모은 것이다.
또한 배경 음악 역시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느린 피아노 소리와 적은 수의 현악기 소리로 구성된다. 배경 음악이 쓰이는 부분 역시 암전이 된 후에 장면을 전환할 때나 극의 시작과 끝을 알릴 때 등 최소한으로 사용된다. 웅장한 음악이 펼쳐지거나 인물들이 대화하는 장면에 음악이 자주 쓰였다면 오히려 극의 몰입을 방해했을 것이다. 인물들의 대화는 대화 자체만으로도 갈등 상황을 뚜렷하게 보여주었고, 극의 분위기가 고조되어가는 흐름 역시 인물들의 목소리만으로도 무대를 채우기 충분했다. 그런 점에서 담백한 음향 효과와 배경 음악이 적재적소에 쓰였다고 느껴졌다.
극 중 함익이 감탄하는 연우의 거의 모든 말 중에 이런 대사가 있다. 사느냐 죽느냐는 문제도 아니예요. 살아있느냐, 죽어있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연우가 던진 말에 날카로운 비판을 할 법도 하지만, 함익은 그저 수긍한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직후 그 문제를 스스로에게 대입하지는 않는다.
그러다 맨 마지막 장면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던 익과 함익이 고개를 돌려 무대를 바라보며 대사를 읊는다.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 그것이 문제다. 이는 곧 함익이 살아있음과 죽어있음 사이의 문제, 즉 주체적 삶과 수동적 삶 사이의 문제를 비로소 스스로에게 대입함을 보여준다. 또한 객석을 바라보며 대사를 읊는 것이 꼭 관객들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동안 그 둘을 바라보고 있던 관객들은 아마 적잖게 놀랐을 것이다. 살아 있느냐고, 혹은 죽어 있느냐고 묻는 질문이 생소하면서도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기도 하다. 희뿌연 연기와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로 손을 맞잡은 함익과 익이 무대 쪽으로 한 발자국씩 내딛는 장면. 마치 물속을 걷듯 힘겨워 보이면서도, 반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듯 가벼워 보이는 둘. 춤을 추듯 두 사람이 천천히 행진하면 줄지어 서있던 출연 배우 전원이 실이 풀린 인형처럼 차례로 스러져간다. 그녀가 사랑하던 연우를 마지막으로, 둘은 무대 뒤로 사라진다.
이 장면을 보고나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그녀에게 눈엣가시였거나 그녀를 억압했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 ‘죽음’을 선택하리라는 것. 자신의 유일한 친구와 함께 손잡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함익이 신발을 벗어놓고 걸어갔다는 점도 죽음을 암시하는 듯 보인다. 이는 함익 자신이 그토록 집착했던 비극의 ‘주인공’이 직접 됨으로써 그녀의 인생을 비극으로 완성시킨다. 또한 <함익>이라는 공연 자체가 가지는 비극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익이 ‘살아있기’를 선택하리라는 것이다. 극 중 그녀는 늘 ‘죽어있는 인물’로 비쳐진다. 학문적인 지식이나 견해에 있어 그녀의 어조는 단단하고 그 근거 또한 흔들림이 없지만, 정작 그녀의 삶은 매번 누군가에게 휘둘린다.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조종당하고, 오필형의 어머니와 원숭이 ‘햄릿’에게 희롱당하면서도 반격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다. 그것이 과연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은 문제도 아니’라고 했듯, 그녀에게 생존은 부차적인 것이다. 오롯이 자신의 주관과 목소리를 뚜렷하게 가질 수 있느냐가 그녀가 ‘살아있음’을 결정한다. 익과 그녀가 향한 길이 결국 ‘살아있음’이라면, 그녀는 원숭이를 죽였다는 비난과 아버지의 모독, 주변인들의 힐난도 기꺼이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죽을’지 몰라도, 그 어떤 억압에도 결국 그녀는 자신의 주관을 지켜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재벌가의 이야기, 그녀의 몰락, 그리고 햄릿. 이거 복수극 아니었나. 그래서 그 복수는 실패한 것인가. 어쩌면 여전히 동떨어진 ‘그들만의’ 이야기로 비쳐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함익>은 전혀 보편적인 이야기다. 형식만 특수할 뿐, 아주 보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주체적 삶이라는 말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살아있다’는 것이 도대체 뭘까. 몇 해 전, 수많은 사람들이 부패한 정권에 저항하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다. 그리고 수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와 임신을 중절할 권리에 대해 외쳤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입시제도 철폐를 위해,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위해, 성소수자들이 자긍심을 갖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거리에 나선다. 이는 곧 자신이 자신다울 수 있는 삶, 자신다워도 죽임당하거나 차별받지 않을 삶, 오롯이 자신일 수 있고 그 주관을 유지할 수 있는 삶과 사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함익>이 던지는 질문 또한 이 같은 행동의 이유와 맞닿아 있다.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억압당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의 주관을 펼치기 위해. 휘둘리지 않고 조롱에 맞서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그리하여 ‘살아있기’위해 질문하는 것이다.
관극을 마치고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아예 함익이 시원한 복수를 했다면 어땠을까. 친아버지에게 큰소리라도 치고, 원숭이에게 단단히 경고하면서, 새어머니의 뜻을 한 번이라도 거절했으면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혹은 함익이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예 아버지에게 억압받으면서도 그저 수긍하며 살지는 않았더라면. 함익은 아예 다른 인물이 되어 다른 이야기가 펼쳐졌을 것이다.
여전히 의문점이 남기는 하다. 아쉽지만, 한계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극에서 여성은 끝내 주체적일 수 없는가. 꼭 누군가에게 휘둘리는 모습으로 그 참담함을 드러내야 하는가. 아마 <함익>이라는 이야기의 틀을 먼저 구상하고서 인물을 그려 넣었더라면 형식과 설정 상 그런 캐릭터가 나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조금 더 게으르지 않았더라면, 더 적극적인 인물을 만들어낼 순 없었을까. 햄릿의 ‘여성성’을 가져와 빚은 인물 <함익>에게 도대체 ‘여성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어쩔 수 없는 한계’를 표현하기 위해 영리하게 빌려온 게으름이 아닐까. 극을 보며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함익>이 주는 질문 그 자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숨이 붙어있는 삶이 아닌, 살아갈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유지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느냐는 질문은 아주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어줄 것으로 여겨진다. 연극 <함익>의 여운이 유독 오래 남는 이유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