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과 진흥

예술 관련 법의 명칭을 보면 궁금해지는 게 있다. 왜 문화예술진흥법에서는 ‘진흥’을 쓰고 문화예술교육지원법에서는 ‘지원’을 쓰는 걸까? 더 이상한 건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를 둔 기관은 과거에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었고 지금은 그 뒤를 이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인데 반해 문화예술교육지원법에 근거를 둔 기관의 이름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으로 ‘진흥’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사전을 보니 ‘지원(支援)’은 “지지하여 도움.”이고, ‘진흥(振興)’은 “떨치어 일어남. 또는 떨치어 일으킴.”이다. 그러니까 지원은 돕는 것이고 진흥은 일어나거나 일으키는 것이니 아무래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더 적극적이고 전폭적인 것으로 보인다. 무언가를 돕는다는 데에는 분명히 보조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애초 문화부에서는 문화예술교육진흥법으로 발의를 준비하였으나 아무리 내용이 ‘문화예술’이어도 ‘교육’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한 ‘진흥’은 교육부의 일이고 문화부는 ‘지원’을 담당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이 됐다고 한다. 다만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법이 통과되기 전에 일반법인으로 설립했다가 법이 통과된 뒤 특수법인으로 전환된 이력이 있어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어쨌든 이 역시 진흥은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행위인 반면에 지원은 소극적이고 보조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례라 하겠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국가에서 예술과 예술인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헌법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즉 대한민국 헌법 제22조를 보면 ①항에서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함으로써 전 국민에게 예술을 향유할 권리가 있음을 밝혔고, ②항에서는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고 함으로써 특별히 예술가의 권리를 법률로써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앞서 보았듯 우리나라 교육부는 교육 진흥의 주체임을 자임한다. 그것은 문화예술교육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문화부에서 주도해 발의한 법에는 명칭조차 ‘진흥’을 쓰지 못 하고 ‘지원법’이 되었다. 교육 진흥의 주체가 교육부라면 예술 진흥은 당연히 문화부가 주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그런데 문화부와 그 산하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하는 일을 보면 ‘진흥’은 거의 보이지 않고 오로지 지원뿐인 듯하다. 그래서 지원사업, 보조사업, 지원금, 보조금, 지원정책 등의 표현이 너무도 익숙하다. 사실 예술단체들이 어려움을 토로하는 e나라도움도 “국고 보조금을 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구축된 국고보조금통합관리시스템이다.”

헌법에서는 전 국민에게 예술의 자유가 있다고 했다. 전 국민이 예술을 자유롭게 즐기려면 감상하면서 즐길 작품도 있어야 하고 예술 체험을 이끌어줄 교육자들도 있어야 한다. 작품을 생산하는 일이나 일반인들에게 예술교육을 펼치는 일이나 모두 예술가들이 맡아야 한다. 즉 예술가들은 그저 혼자 자기만 좋아서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전 국민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는 예술가들로부터 작품을 사서 국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전 국민이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예술가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

상품을 살 때 지불하는 값이나 정당한 일의 대가를 보조금이라 부를 수는 없다. 국방이나 환경, 교통, 건설을 위한 물품이나 용역을 구매하면서 보조금이라 하지는 않는다. 예술 역시 헌법에서 명시한 대로 국가의 필수 요소이다. 그것은 결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치품이 아니다. 전 국민에게 필요한 필수품이 건강한 시장 질서를 형성해서 유통된다면 굳이 국가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시장에만 맡겨서는 위험한 성격이거나 자칫 왜곡될 상황이라면 일시적이건 지속적이건 국가가 개입해야 한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전국에 문예회관이 255개라 한다. 무슨무슨 전당이니 무슨무슨 아트홀이니 하며 이름은 다양하지만 그 모임의 명칭이 한국문예회관연합회라는 것으로 보아 문예회관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문예회관은 쉽게 말해서 극장이다. 건축비로 수백 억 원에서 천억 원 이상까지 들어가는 공공 극장을 255개나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공연예술에 관한 한 헌법 정신에 맞게 모든 국민들이 예술 작품을 즐기도록 하기 위한 기본 환경은 갖춘 셈이다.

그러나 그 극장에 내용물을 채우는 과정과 결과를 보면 대단히 문제가 많다. 정당한 가격을 주고 국민들에게 제공할 양질의 작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저가입찰에 하청과 재하청 구조도 흔하다. 더욱이 당장의 가시적 성과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하여 일단 관객 동원에 유리한 작품에만 몰리는 극단의 편중 선택이 이루어진다. 심지어 한국문예회관연합회가 수백억 원의 국가 예산을 들여 펼치는 방방곡곡 사업에서조차 이러한 현상이 방치되고 있다. 사실 예술과는 전혀 맞지 않는 공공기관평가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성과 위주 행태를 무조건 비난할 수만도 없지만, 그래도 근본을 잊고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예술의 향유는 감상과 체험으로 이루어진다. 문예회관들이 작품을 제공하는 것이 감상을 위해서라면 문화예술교육은 감상에 더해 체험까지 중요한 내용으로 포함한다.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하는 것은 예술강사라는 명칭의 예술가들이다.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은 전 국민이 차별받지 않고 문화예술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러나 그 교육을 담당하는 예술가들에 대한 정부의 태도를 보면 과연 문화예술교육지원법의 제정 취지를 아는지, 더 근본적으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헌법 조항을 아는지 심히 의심스럽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국가기관이다. 그런데 예술강사들에게 주당 14시수 이하, 월 59시수 이하의 수업만을 하도록 강요한다. 게다가 사전에 계획을 승인받아야 한다. 현장 사정에 의해 계획보다 더 하게 될 경우 초과에 대한 지불은 없다. 물론 계획보다 덜할 경우 당연히 수업한 만큼만 지불될 것이다. 여기서 주당 14라는 숫자는 예술강사들을 퇴직금, 직장건강보험, 주휴수당 등을 적용하지 않아도 되는, 이른바 초단시간근로자로 묶기 위한 것이고, 월 59라는 숫자는 예술강사들로 하여금 고용보험 가입 대상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거의 악덕기업에서나 벌어질 일이 국가기관이 주도하는 문화예술교육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할 때 가격을 책정하는 원칙이 있을 것이다. 또 교육자들에 대한 적정한 인건비 체계도 있을 것이다. 문예회관들이 예술작품을 구매할 때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문화예술교육을 담당할 예술가들을 고용할 때나 모두 그러한 원칙과 체계를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 공연 작품에 대해서는 보조금이나 지원금을 주고 까다로운 정산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정당한 가격으로 구매해야 한다. 정당한 가격이란 인건비와 재료비, 기타 필요 경비를 모두 고려한 것을 뜻한다. 또한 예술강사들에게는 교육 전업의 경우건 창작과 교육 병행의 경우건 교육자로서 합당한 임금 체계와 근로 조건이 적용되어야 한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최근 예술인 고용보험이 법제화되었다. 그러나 실제 예술 현장에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왜냐하면 고용에 있어서 갑과 을이 있다 할 때 예술계에는 갑이나 을이나 모두 영세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실 전혀 지원을 못 받고 제작하는 경우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아니라면 참여자들에게 실제로 지급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계약서에 얼마를 써넣을 것이며 양측이 0.8%씩 내야 하는 보험료는 누가 어떻게 부담할지 난감할 뿐이다. 또 설령 지원을 받는다 해도 그것이 공정한 가격 기준을 따른 구매가 아니라 일부 예산을 보조하는 개념이어서 참여자들에게 정당한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니 예술인 고용보험의 법제화보다 더 시급한 것이 예술에 대한 지원이나 보조가 아닌 예술작품 구매의 제도화가 아닐까 한다. 그렇게 정당한 가격을 받고도 참여자들에게 제대로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거나 고용보험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법에 의해 처벌받도록 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예술강사들에 대해서도 한 쪽으로는 예술인 고용보험을 법제화하면서 다른 한 쪽으로는 어떻게든 그 대상이 되지 않도록 꼼수를 부리는 모순된 행태를 더 이상 보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제 예술은 단순한 지원의 대상, 보조의 대상, 시혜의 대상이 아닌, 국가와 국민을 위한 진흥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 실행자인 예술가는 그렇게 꼭 필요한 일을 맡는 중요한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아마도 그것이야말로 국가다운 국가, 나라다운 나라를 이루는 최소한의 조건이 아닐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202141

오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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