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없는 착한 비평

백승무(공이모 회원)

깨물면 모두 아프다

모든 작품은 귀하다. 졸작이든 명작이든, 평가 이전에 이미 가치 있고 소중하다. 예술이란 게 뭔가. 특정한 재능을 소유한 사람들이 인간을 탐구하고 삶을 사유하고 의미를 창출하는 활동 아닌가. 먹고사는 세속적인 일과는 거리가 멀고 이기적인 의도의 소산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궁극적으로 먹고사는 일이고 ‘나’의 문제와 지척이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은 일상에 치이다 보면 놓치기 쉬운 정신적 가치, 공적 문제, 이타적 실천, 닥쳐올 위기에 대해 궁구한다. 아픈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고, 쓰러진 자의 애환을 기록하며, 공동체의 결함을 드러내고, 더 나은 삶에 관해 고민한다. 그러니 어떤 예술이고 하찮을 수가 있고 볼품없을 수가 있겠는가.

때로는 재능이 모자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의도가 엉뚱할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외면당한 수많은 명작을 기억하고 있다. 오늘의 졸작이 내일의 명작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노고와 열정을 생각해보라. 넉넉한 경제적 대가가 주는 것도 아니고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도 아닌데, 그저 예술의 숭고한 이상에 매료된 죄로, 예술왕국의 신민으로 선택된 벌로 예술가라는 천역을 짊어진 그들을 생각하면 과연 상하가 어디 있고 경중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예술은 양질전환의 법칙이 견고하게 적용되는 영역이다. 양적 축적이 질적 변화를 불러온다. 한 편의 걸작은 수많은 평작과 졸작을 배경으로 탄생한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무모한 실험의 목록 끝자락에 명작이 등록된다. 그러니 깨물어 아프지 않은 작품이 어디 있으며, 보잘것없고 추레하다고 내팽개칠 공연이 어디 있겠는가!

비평은 언제 발생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아니, 그러므로 더더욱 평가가 필요하다. 결함을 메우고 작품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과 평가가 필수적이다. 문학이나 음악, 미술과 달리 연극은 뛰어난 개인의 숭고한 영혼으로 탄생하는 게 아니다. 연극은 토론과 설득, 타협, 중재가 쉴 새 없이 반복되는 집단적 예술이다. 침범 불가능한 개인의 창조력에 의존하는 게 아니라, 집단의 조화와 협업이 중시되는 영역이다. 연극은 수시로 바꾸고 고치고 더하고 덜면서 최적의 효과, 최고의 앙상블이 도출되도록 합의해가는 세속적 예술이다. 극작가에서 연출가로, 연출가에서 배우로 창작의 주체는 바뀐다. 창작과정 자체가 다양한 의견의 집산이자 열린 체계를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 연극은 연행이 끝났을 때 완성되는 게 아니라, 관객이 창작과정에 합류했을 때 완성된다. 커튼콜이 종료되었을 때 비로소 연극의 창조행위는 끝을 맺는 것이다. 연극 창조의 방점은 ‘무엇을 보여줄까’가 아니라, ‘어떻게 보이는가’에 있다. 연극 미학의 실체는 무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관객의 의식과 기억 속에 존재한다. 바로 여기서 비평이 발생한다. 문학은 독자 없이도 성립한다. 출판되어 시장에 나오는 순간 문학은 이미 완성된 상태이다. 음악도 악보 상태로 이미 창작은 종결되며, 미술도 붓을 놓는 순간 불가침의 완결성을 갖는다. 하지만 연극은 마지막 대사를 마쳤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다. 연극은 관객이 들어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관객의 감흥과 반응은 창작의 일부로 포함된다. 관객이 다르면 공연도 달라진다. 매회 새로운 관객과 새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비평은 평가에 특화된 관객일 뿐이다. 관객으로서 비평은 연극의 요소이자 숙명이다.

비평은 왜 필요한가

이러한 ‘보는 자’ 우위 현상은 관객의 수용과 반응을 중시하는 현대연극에 와서 더욱더 강화되고 있다. 오늘날 연극예술은 국가지원제도, 비평가집단, SNS를 장착한 관객에 의해 일상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전제권력의 검열과 달리 비평은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다원성과 자율성이 클수록 비평은 왕성해진다. 예술시장의 가속화된 경쟁체제도 비평에 힘을 실어주었다. 비평은 때로는 판관으로, 때로는 동료로서 경쟁체제에 개입했다.

관객에게 비평은 공연을 선별하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대중에게 주어진 문화향유기회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주1회든 월1회든 허투루 쓸 수 없는 소중한 기회이다. 서구 일간지에 실리는 공연비평기사는 대중의 문화 욕구 발산을 위한 좌표 구실을 한다. 관객 수와 매표수익으로 계량화된 대중의 취향은 문화융성이라는 국가사업의 잣대가 된다. 물론 대중성이 곧 예술성은 아니다. 하지만 높은 예술성은 대중성의 필요조건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예술성 높은 작품이 대중에게 외면받을 때이다. 비평의 존재증명이 필요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때 비평은 예술을 옹호하는 전사가 된다. 멀리 가면 플라톤의 시인추방론에 맞서 연극을 변호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가까이에는 고전주의 꼰대로부터 낭만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전장에 나선 칸트가 있다. 특히 칸트는 호불호의 취향 문제를 미학적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근대비평의 비조라 칭할 수 있다. 칸트 이후 예술은 비평의 제단 위에 놓인 성배와 같았다. 비평은 예술의 친위부대이자 후원자이자 변호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평 없이 ‘생존’할 수 없었다. 칸트가 낭만주의 전속 비평가였듯, 루카치는 리얼리즘 호위무사였고, 형식주의는 모더니즘의 순장조였다. 조건성, 인형성, 부조리, 잔혹성, 실존성, 저항성, 비판성, 기호성 등 20세기를 수놓은 많은 경향은 비평의 제단 위에서 제빛을 드러냈다.

비평의 본질은 평가이다

오늘날 비평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대답은 비관적이다. 예술적 결기도, 구체적 실효성도, 올찬 미학도 부족하다. 무엇보다 평가에 서툴다. 비평(批評)은 시비를 견주어(批) 말로 가려내다(評)란 뜻이다. 뭐가 좋고 나쁜지 분별하는 것이 비평의 본령이다. 인도유럽어족의 어근 krei-는 ‘체로 치다, 구분하다, 분리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어 kritikos는 ‘판단을 내릴 수 있는’이란 뜻이고, krinein은 ‘분리하다, 결정하다’란 뜻이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라틴어 criticus는 ‘판사, 검열자, 평가자’, ‘문학작품에서 잘못된 문장을 식별하는 사람’으로 사용되었고, 14세기 프랑스어 critique는 사물에 대한 뛰어난 판단력을 보유한 사람을 뜻하다가 17세기부터는 ‘책, 연극 등의 장점을 판단하는 자’란 의미를 획득했다. 영미권에서 critic은 날카로운 비판자, 실수와 결함을 찾아내는 자 등의 뉘앙스를 지녔다. 비평은 해설하는 게 아니라,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이다. 좋고 나쁨을, 옳고 그름을, 미와 추를, 옥과 석을 가려내고 분별하는 일이다.

George Santayana는 <The Life of Reason>(1906)에서 “예술가가 어떻게 느꼈는지 이해하는 것은 비평이 아니다. 비평은 작품의 좋은 점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희곡의 가치를 분석하는 것은 문학에서 하는 일(литературовед)이다. 연극의 역사를 탐구하고 발굴하는 이는 연극사가(историк театра)이고, 연극의 개념과 미학을 논구하는 자는 연극학자(теоретик театра)이다. 그리고 연극비평가(театральный критик)가 있다. 비평가가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평 본래의 평가이고, 다른 하나는 리뷰 쓰기이다. 리뷰(review)는 말 그대로 공연을 ‘다시 떠올리기’이다. 작가의 극작술이 어떠했는지, 배우가 배역을 잘 소화했는지, 무대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었는지가 리뷰의 대상이다. 극작가나 연출가의 소개, 공연의 줄거리와 소재·주제의 특징도 함께 나열할 수 있다. 주로 초연 직후 일간지의 공연꼭지에 올라오는 글이 되새김질 리뷰이다. 공연의 기존 정보를 제공하고, 필자의 인상과 입장에 초점을 두며, 관객을 위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리뷰는 한마디로 ‘저널리즘적 약식 비평’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오늘날 기자들이 쓰는 공연기사는 대부분 리뷰이다. 반면 비평은 공연이 예술적 기준에 부합하는지 판단하고, 공연의 유기성과 총체성에 의거하여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일이다.

객관성의 판타지

한국 비평에는 평가가 빈약하고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이 부족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평가에 있어서 무색무취하다. 마치 비평은 평가나 판단과는 거리가 먼 듯 딴청이다. 평가와 판단은 객관성을 저해하는 독소인 것처럼 도외시한다. 객관성이란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제거할 때가 아니라, 그 판단이 보편타당한 논리와 설득력을 갖추었을 때 성립한다. 판단을 지울 때가 아니라, 판단을 선명하게 내세울 때 드러나는 것이다. 평가를 회피하고 판단을 거부한 비평을 읽다보면 한국연극은 이만한 태평성대가 없다. 좋은 공연 일색이고 흠절이라곤 전무하다. 가끔 눈에 띄는 지적은 그저 미미하고 지엽적일 뿐이다. 이렇게 좋은 공연이 널렸으니 극장은 관객으로 미어터지고, 연극은 흥성하고 번창할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가? 관객은 나날이 줄고 공연은 빈약해진다. 평가 없는 비평이 낳은 결과이다.

평가의 부재는 비평이 전제하는 예술적 기준이 부실한 탓이다. 훈련된 비평가라면 자신만의 기준을 가져야 한다. 기준이 선명할 때 평가는 설득력을 갖는다. 가끔은 자신의 주관적 기준을 드러내길 꺼리는 비평을 만난다. 자신의 주관과 취향을 숨기고 무인칭의 모호함을 객관성으로 위장한다. 그런 몰취미한 객관성은 자신의 박약한 주관을 은폐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비평은 무사공평한 판관이 아니다. 논리적인 편애, 이성적인 열광, 냉철한 도취, 정의로운 숭배가 (예술)비평의 덕목이다. (예술)비평에 있어서 객관성은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비평 외부에 있는 객관성이나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주관을 객관화하는 일이다. 이것이 칸트가 말한 미적 판단의 주관적 보편성이다. 주관적 원리를 보편타당하게 드러내지 못할 때, 자신의 주관적 공통감(sensus communis)을 객관화시키지 못할 때, 비평은 빅데이터를 능가할 수도 없고 AI를 따돌릴 길도 없어진다.

관객은 떠나는데 비평은 착하다

때로는 비판 없는 착한 비평도 문제가 된다. 사적인 자리에선 공연의 결함에 대해 신랄한 지적을 가하면서도 매체에 글을 게재할 때면 인자함과 덕이 넘친다. 부실한 구성은 간결함으로, 극작 오류는 여운으로, 엉뚱한 비약은 개성으로, 멋없는 취향은 담백함으로, 미숙한 과욕은 순수한 열정으로 격상된다. 치명적 결함조차 사소한 실수로 용인된다. 비평의 후덕함은 감동적이지만, 예술 몰락의 길에 아스팔트를 까는 짓이다. 근거 약한 착한 비평은 아픈 자의 입에 설탕을 쏟아붓는 짓이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는 거짓말은 말자. 비평의 공허한 칭찬은 관객을 떠나게 만들 뿐이다. 관객의 기준과 요구는 높아져만 간다. 착한 비평은 공연의 성장판을 억누르는 원흉 중 하나이다. 물론 눈에 심지 켜고 악담을 남발하란 말은 아니다. 혐오에 가까운 폄하 발언은 삼갈 일이다. 평가의 정확한 기준과 비판 근거의 명징한 설명은 필수이다.

비평을 아예 리뷰라는 용어로 대체하는 행태도 문제다. 비평정신과 비평철학이 부재하다는 증거이다. 리뷰와 비평은 명백히 다르다. 리뷰에는 ‘정신’도 ‘철학’도 필요 없다. 안내문에 가깝기 때문이다. 사실, 평가 없는 모호한 비평, 비판을 삭제한 착한 비평은 대개 리뷰와 구별되지 않는다. 심지어 감상문이나 설명문으로 오인될 정도이다. 연극비평을 문학분석으로 퉁친 경우도 다반사이다. 제목은 공연비평인데 내용은 희곡분석이다. 국문과 (희곡)문학비평 전공자들이 공연비평계로 대거 유입된 특이한 역사 탓이다. 대학 교강사 중심의 강단비평이기 때문이다. 공연비평의 백미는 연출술과 연기론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비평의 절반은 희곡에 기반한 내용미학이 차지한다. 어떻게 공연되었는지 분석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말하는지에만 골몰한다. 연출가들이 자신만의 고유한 표현미학 구축에 어눌하고 새로운 무대언어 개발에 미진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평이 자행한 형식의 방관이 표현미학을 경시하는 연출 풍토를 허용한 건 아닌가? 우리에게 과연 표현미학을 연구하는 연출술이란 학문이 존재하기나 하는가? 변별적 연출술과 무대적 정체성을 소유한 연출가는 극소수가 아닌가? 한국연극의 연출술은 과연 실체가 있는가? 연극이 연극답지 않을 때 관객은 떠난다. 연극의 매력은 현장성에 있는 게 아니라, 연극만의 표현력에 있다. 연극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고유한 무대언어가 있다. 비평이 표현미학에 눈을 밝히지 못하면 관객은 떠날 수밖에 없다.

강단비평의 명암

국문과 문학전공자 중심의 강단비평은 불모지와 같던 연극비평을 개척한 공로가 크다. 하지만 그 공로와 별개로 오늘날 그 폐해는 적지 않다. 대학에 근거지를 둔 강단비평은 연극계와 운명을 같이 하는 전업 현장비평가의 출현을 막았다. 오늘날 전업 현장비평을 위한 제도와 지원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강단비평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폐해는 이뿐만 아니다. 연극비평이 대중과의 접촉을 꺼리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피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강단비평이 ‘비평’을 학문의 한 영역으로 끌어들여 연극을 학제적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연극사, 연극이론, 연극학, 심지어 문학비평(희곡)까지 겸업하면서 연극비평을 현장과 유리된 이론과 분석, 기록의 영역으로 격리시킨다. 학으로서의 비평이 득세하고 담론생산이 주임무로 승격한다. 하지만 연극비평의 제1준칙은 공연에 대한 미적 판단과 평가이다. 비평은 저 멀리 강단에서 관찰자 역할을 할 게 아니라, 현장에서 운명을 걸고 제1준칙의 초병이 되어야 한다. 미적 판단과 평가가 누적되었을 때, 담론을 내세울 수도, 사적 접근을 허용할 수도 있다. 강단비평 특유의 관찰자적 안이함과 사후성(事後性)은 자신의 이론적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데에는 적합할지도 몰라도 현장의 갈증과 다급함을 해소하는 데는 굼뜰 수밖에 없다.

무엇이 평가를 막는가?

객관성에 마취된 중립 비평, 취미판단을 억압하는 나열 비평, 반론의 여지를 차단한 두루뭉술 비평, 심기 관리에 열중인 눈치 비평 등은 하나 같이 평가를 두려워한다. 평가를 배제한 비평을 주장한 자도 있다. 아서 단토는 비평가의 임무는 평가가 아니라 설명이라고 못 박았다. 평가의 기능은 시장과 제도가 담당하고, 비평은 선택된 작품을 대중에게 해설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매매와 소장이 가능한 미술 분야이기 때문에 가능한 주장이다. 특히 대중과 유리된 현대미술에선 그럴 수밖에 없다. 비평이 큐레이터와 경쟁하며 해석 투쟁에 동원되는 구조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연극비평에는 맞지 않는다. 그 연원부터 대중의 감성에서 출발한 연극은 객석의 반응을 외면하기 힘들다. 무대는 객석을 배려했고, 객석은 무대에 협력했다. 비평이 해설에 급급한 경우는 드물었다.

평가 없는 비평을 사주하는 또 다른 경우는 이론에 경도된 비평과 소재에 함몰된 비평이다. 전자가 학술적 비평이라면, 후자는 정치적 비평이다. 학술적 비평은 공연을 설명하기 위해 미학 이론을 끌어오는 게 아니라, 이론의 정당성을 증명하기 위해 공연을 차출한다. 공연에 대한 평가보다 이론과의 정합성이 우선이다. 공연은 이론의 한 사례, 혹은 실천의 한 방편으로 전락한다. 한편, 정치적 비평은 소재나 주제의 정당성을 부각하는 데에 몰두한다. 넓게는 내용미학의 아류이고 좁게는 소재주의의 다른 형태이다. 평가는 무의미하거나 불경한 것으로 취급된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윤리적 요구가 미학적 판단을 대체한다. ‘올바른 것은 아름답다’는 고전주의적 명제를 신성시한다. 공연의 흠결이나 미학적 빈틈 따위는 관심 대상이 아니다. 소재의 올바름이 지고의 가치이다.

아예 평가 자격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무슨 자격으로 평하느냐, 누가 평가의 권리를 부여했느냐고 묻는 부류이다. 평가는 비평의 권리가 아니라 연극의 의무이다. 연극이 시킨 일이고 연극이 하는 일이다. 연극이라는 예술제도를 승인한 이상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틀린 비평은 있어도 나쁜 비평은 없다.

비평의 자유를 온정주의로 제한하는 시대적 분위기도 문제다. 공감과 위로의 시대 맞다. 하지만 과도하다. 모두가 상처 입은 사람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온정과 지지만을 갈구한다. 쓴소리와 직언은 인품 결격과 몰상식으로 매도된다. 관점의 차이가 전가의 보도처럼 앞장을 서고, 칭찬을 우선시하는 미풍양속이 본대를 이루고, 기본 예의가 없다는 싸가지론이 말미를 장식한다. 응원과 격려가 꽃피는 아름다운 연극계가 조성되자 관객들이 떠났다. 이제 여긴 ‘우리’만 남을 것이다.

사실, 평가를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평가를 무력화하는 연극제도이다. 평가의 가장 큰 효용은 공연의 개선 가능성에 있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는 비평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하지만 재공연 기약이 없는 일회성 상연행태는 평가를 무색하게 만든다. 극작가는 개작 수정을 고려하지 않고 연출가는 새로운 시도를 검토하지 않는다. 평가는 객쩍고 비판은 겸연쩍다. 비평이 더 나은 대안을 위한 참조물이 될 수 없다면 얼굴 붉히는 평가에 애태울 일 없다. 모두 레퍼토리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레퍼토리시스템은 비평을 살리는 영약이기도 하다.

부지런한 비평, 반성하는 비평

비판은 고단하다. 찬사야 근거를 얼버무려도 티 나지 않지만, 부정적 평가는 꼼꼼하고 정확해야 한다. 공력이 배로 들어간다. 예술가와의 껄끄러운 관계도 불편하지만, 더 많은 시간과 집중력을 투여하는 점도 꺼려지는 대목이다. 비평이 고단해야 관객이 확보하는 감상의 진폭이 커진다. 착한 비평은 미학적 무기력이지만, 게으른 비평은 도덕적 해이이다. 비평은 부지런해야 한다. 작품의 결함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발생했으며 무대요소들 간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소상히 밝히고 평가해야 한다.

쪼그라들고 왜소해진 연극시장은 처연하고 애처로운 지경이다. 게토화의 조짐도 뚜렷하다. 객석을 채우는 건 지인과 비평가, 그리고 소수의 연극 애호가들이다. ‘순수관객’의 비율은 턱없이 낮다. 파급력·확장력을 상실하고, 끼리끼리 번갈아 자리를 채우는 현상이 고착화하고 있다. 이런 폐쇄적 게토화에 비평의 책임은 얼마나 될까? 자기 기준, 자기 취향 없이 평가를 주저한 비평은 과연 떳떳할 수 있을까?

새 판이 열린다

올 연말쯤이면 코로나19 사태는 진정국면에 진입할 것이다. 2020-21년은 고통과 인내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모두 무대 뒤에 잔뜩 움츠린 채 훗날을 기약했다. 다가올 ‘훗날’은 장밋빛일까? 예전의 강자는 한층 강화된 무기를 가져올 것이고, 기회를 엿보던 2인자는 판을 뒤집을 비장의 카드를 내놓을 것이다. 판도의 변화가 예상된다. 제한된 문화시장을 놓고 영화, 뮤지컬, 연극, 클래식이 세력다툼을 벌일 것이고, 연극시장 내에서도 새로운 영토전쟁이 펼쳐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대목은 연극과 타장르의 경쟁이다. 불행히도 전망은 암울하다. 영화와 뮤지컬은 폭발적으로 관객을 흡수할 것이나, 연극은 원상복구에도 진땀을 뺄 것이다. 연극계는 반등의 탄성조차 상실한 건 아닐까?. 결국 장르간 빈부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늘 뺏기기만 하던 연극은 과연 ‘존버’에 성공할 수 있을까? 연극계는 다가올 일전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솔직히 불안하다. 전략은 본 적이 없고 비전은 들은 적이 없다. 각자의 진지를 사수하는 수밖에. 진지공사에 돌입할 때이다. 취향과 기준을 갖춘 예리한 평가가 비평의 방어선이다.

* 이 글은 <공연과 이론>(2021, 봄호)에 실린 글을 수정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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