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무의 월간 짤평

공연명: <이유는 있다>

관람일시: 2021.06.02.19:30

극장: 스튜디오76

<이유는 있다>에는 노포의 그윽함이 있다. 소극장의 살가움, 능수능란한 고수 배우들의 친근한 연기, 3면 객석배치의 구경꾼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기본기를 갖춘 쫀득쫀득한 대사와 얼큰한 기승전결의 국물맛, 무림의 칼잡이들이 썰어주는 밑반찬과 코믹의 단맛과 진지함의 짠맛이 조화된 상차림 등 본전 아깝지 않은 한 끼 식사이다.

아쉬운 건 포만감. 알찬 만찬인데 배가 차지 않는다. 갈등의 봉이 높아야 반전의 골도 깊은 법이다. 그 사이의 아득한 낙차가 극적 감흥의 크기이다. 출발은 좋았다. 범행 장면을 반복하는 두 개의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꿀맛이다. 인물과 사건을 소개하는 발단-전개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강하게 식욕을 자극한다. 김검사의 등장부터 리듬이 느슨하게 풀리기 시작한다. 발화 타이밍이 조금씩 삐걱대고, 주고받는 대사의 리듬이 처진다. 대사도 간이 맞지 않다. 전직 검사에 유력 국회의원 후보라는 강한 향에 비해 긴장감이 싱겁다. 갈등을 심화시켜, 즉 형사와 피의자라는 일대일 구도를 권력자와 수사진이라는 집단대결구도로 확대하여 사건의 무게도, 날카로움도 강화해야 하나, 김검사는 거품만 피우고 물러난다.

도약대가 되어야 할 김검사의 등장은 바람 빠진 풍선 같아서 천회장이 그 위에 올라탔을 땐 갈등의 격발을 향해 튕겨 오르지 못하고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다. 물론 천회장은 스스로 준비한 격발의 장약이 있다. 쩌렁쩌렁한 사자후와 날카로운 눈매로 인물과 무대를 장악한다. 피해자의 출생비밀이 드러나고 친딸이 아니라는 선언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안기부 시절 도석의 아버지를 간첩으로 조작한 사실이 폭로된다. 이 놀라운 세 가지 사실은 갈등의 정점에서 강한 파토스를 유발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실들은 누적된 긴장감을 등에 업고 갈등의 격발로 치솟지 못하고 변죽만 울린다.

천회장의 친딸 부정은 그를 사건의 주변부로 내몬다. 수백억대 투기, 경제계 거물, 살인사건이 연상시키는 은밀한 음모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소실되고, 수십 년 전 간첩조작사건이 불쑥 튀어나와 도석의 성장사와 얽힌다. ‘이유’는 ‘과거’에 있고, 여혐 살인이니 권세가니 하는 현재의 정보는 모두 연막이었다.

반전의 관건은 도석의 범죄가 여혐 살인이냐, 복수극이냐 하는 것. 도석은 천회장의 면전 사과를 받기 위해 여혐 살인을 주장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半轉에 그친다. 첫째, 그토록 치밀하게 준비한 천회장과의 대면에서 도석은 사과 한마디 얻지 못한다. 그 기회를 그렇게 허망하게 날릴 수 있을까? 둘째, 도석의 복수는 천회장에게 심리적 타격을 가하는 것이나 그건 헛된 기대에 불과했다. 잘 죽었다고 큰소리치는 그 앞에서 수사반장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항변하지만, 그의 고성이 적절한가는 차치하고, 과연 그런 윽박이 기존의 갈등라인과 연계되는 것인가? 권세가의 수사방해와 숨겨진 음모가 갈등라인의 흐름인데, 느닷없은 수사반장의 고성이 뭔가. 결국 도석의 복수극은 되려 앓던 이 뽑아준 격이 되고 말았다. 반전이 서늘한 느낌을 주기보다 황망함을 안기는 이유이다.

반전카드가 담긴 도석의 일기장. 도석은 그걸 공개하라고 준 걸까, 반장에게 선물로 준 걸까. 간첩조작사건의 폭로는 친딸 죽음에도 눈 깜짝 않던 천회장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의 공격무기 아닐까? 그렇다면 이건 수사의 방향을 전환할 호기 아닌가.

도석은 자신의 범행이 단순 여혐 살인이라고 몇 차례 주장한다. 작가의 의도, 즉 도석의 용의주도함이 싸늘하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그를 복잡하게 형상화하여 종잡을 수 없게 하거나, 극도로 단순화하여 오인을 유도해야 할 것이다. 배우의 선택은 둘 중 어정쩡. 참 형상화가 쉽지 않은 인물이다. 검찰 송치 직전에 꼬깃꼬깃 메모지를 건네는 낡은 설정도 어정쩡하긴 마찬가지.


공연명: <반성문, 살인기억>

관람일시: 2021.06.04.19:30

극장: 씨어터 쿰

1. <반성문, 살인기억>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이다. 아내를 두고 집을 떠난 남편이 사고로 돌아오지 못하는 서사축과 애꿎게 죽은 동생을 위해 음모자를 살해한 누나의 에피소드가 극중극의 두 축이고,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노인의 신분을 추적하는 바깥 이야기가 액자극을 담당하고 있다. 한마디로 명령에 의한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이야기이다.

2.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혹은 배경으로 한 공연은 팩트와 픽션의 분배, 폭력의 형상화 문제, 사건의 본질에 대한 통찰, 공감과 동참에 대한 호소가 필수적이다. 국가폭력에 대한 공분을 접근하기 쉬운 멜로드라마적 기법으로 풀어내려는 극작 의도는 탓할 수 없다. 하지만 멜로드라마의 문법에 과도하게 침윤한 나머지 형제복지원 사건의 본질을 폭로하는 데는 실패한다. 군사정권의 패악과 책임자 처벌의 촉구는 언감생심.

3. <반성문, 살인기억>은 국가주의, 폭력,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 등 사건의 본질에 대한 성찰 대신 처량한 사연으로 결별한 젊은 부부의 애틋한 사랑과 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간간이 들리는 관객의 훌쩍거림은 공연의 예술적 효과라기보다는 멜로드라마가 자극한 말초적 감각 때문일 공산이 크다. 그래서 그것은 연극예술의 숭고함이나 강렬함의 증거라기보다 동일 자극에 대한 동일 반응이라는 생체실험의 확인 이상이 아니다.

4. 멜로드라마는 그 자체로 상투적인 것은 아니다. 익숙하고도 즉각적인 감정발화를 통해 공연의 결론에 효과적으로 도달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위무와 공감을 도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섬세하게 축조된 서사의 엄밀함이 없다면 멜로드라마(적 기법)는 지극히 피상적인 감정 소모의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소녀의 살인 장면을 보자. 폭력은 관객의 분노와 울화를 촉발한다. 국가의 이미지가 충분히 입력되지 않은 교관의 폭력은 일방적인 선악 구도만 형상화한다. 그런 통속적 기법은 성찰이나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동생의 죽음 앞에서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르는 소녀를 보라. 그녀의 살인충동과 고뇌과정은 삭제하고 오직 분노발산과 정의실현만을 표현한다. 쉬운 죽음도, 마땅한 죽음도 없다. 사악한 춘자라 할지라도.

5. 엔딩의 판타지: 관객의 말초감각을 자극하는 과도한 판타지는 현실을 무참히 삭제한다. 피해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복남의 반성은 수용되고, 그의 삶은 만남과 화해와 용서로 미화된다. 그가 지난 30년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질문하지 않는다. 노숙자가 된 교관의 삶도 따지지 않는다. 피해자는 암묵적으로 용서한 것이고, 갈등은 봉합되고, 복남에겐 이제 아내와의 사후 만남만이 대기한다.

6. 상황의 분위기에 계속해서 극단적 변화를 주지 않으면 멜로드라마의 고루한 느낌을 피할 길이 없다. 리듬의 완급 반복, 코믹 릴리프, 대위법적 대조을 부여해야 한다. 현재와 과거를 교차편집하거나 시간을 중첩하는 몽타주적 구성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액자의 수사극 모티프는 멜로드라마의 끈적거림을 위장할 수 있는 꽤 괜찮은 연막이 될 수 있었을 터. 철중과 수미의 옥신각신, 최신수사기법,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쾌감 등을 교차편집으로 살리면 멜로의 상투성만은 벗어났을 지도 모른다.

7. 멜로를 정공법으로 돌파하고자 한 연출의 선택은 아쉽다. 멜로드라마를 기막힌 연출술로 중화시킨 대표적 작품이 <푸르른 날에>(고선웅 연출)이다. <푸르른 날에>는 연출술과 희곡이 대결할 때, 연출이 어떻게 희곡의 기름기를 제거하는지, 어떻게 상투성을 획기적으로 전환하는지, 연출이 어떤 표현전략을 써야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와 같은 공연이다.

8. 제목도 내용 요약형이라 호기심이 반감한다.


공연명: <도덕의 계보학>

관람일시: 2021.06.10.20:00

극장: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배우들은 움직임 없이, 별다른 표정(연기) 없이 한 쪽을 응시하고 대사를 내뱉는다. 발성은 모노톤이고 별다른 화술(연기) 없이 단일 어조이다. 이렇게 감정과 어조와 표정을 지우면 말이 살아나기도 한다. 오직 말에 집중할 뿐, 다른 행위요소는 말을 오염시키거나 왜곡시키는 이물질이다. 그렇게 행위를 지우고 치켜세운 말이 ‘신성한 말’, ‘순수한 말’, ‘주술적 말’이 되기도 한다. 20세기의 많은 실험들이 그 사례들이다. 입만 보여주기도 하고, 말을 녹음하여 들여주기도 하고, 마이크로 증폭하기도 하고, 말과 행위를 완전히 분리하기도 하고, 말의 관습적 어조를 변형하기도 했다. 말을 찾기 위한 사투였다.

<도덕의 계보학>의 말은, 감정과 어조와 표정을 지운 그 말은 그 자체로 앙상하다. 뭔가를 지우고 덜고 깎고 떼어낸 게 아니라, 원래 부족하고 모자란 말이다. 차고 넘쳐서 풍성하던 말이 아니라, 채운 적 없던, 풍만을 모르던 말. 그래서 말의 신성함이나 순수함이나 주술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공연명: <스웨트>

관람일시: 2021.06.21.19:30

극장: 명동예술극장

1998년 미국 중심의 글로벌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IMF는 한국정부에 비정규직 제도 도입을 ‘권고’한다. 노동자를 쉽게 자르고 부리고 굴리도록 허용한 법이다. 20년 후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은 비정규직 제도 철폐를 공약했지만, 빈말로 종결될 공산이 크다. 대한민국 노동자들은 아직도 IMF 비상체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중산층은 붕괴되었고 빈부격차는 심화되었다.

2008년 미국의 서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지만, 당사자 미국은 ‘인류’에게 일말의 사과도 없었다. 수억에 이르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전세계 빈부격차를 하늘땅만큼 벌렸는데도 사과는커녕 자신의 국부를 늘이는 데에만 혈안이었다. 국제적 상호부조나 전지구적 빈곤퇴치, 이를 위한 군축, 지역전 해소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자국 중심주의야 탓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자국민의 고용을 유지하고 배를 불리기 위해 글로벌 착취와 강압/횡포를 자행해온 미국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신자유주의와 글로벌화란 결국 강한 자들이 종목도 바꾸고 골대도 옮기고 규칙도 바꿔가며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부를 재편하자는 논리이다. 기존 방식에 추격자가 따라붙으니 한차례 살풀이를 하자는 것. 그 강자의 논리 덕분에 우리는 20년 넘게 비정규직이라는 노예제도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고, 경쟁/생산성의 미명 하에 매일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책임자 처벌도 못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우리나라도 신자유주의 덕에 여기까지 올라오지 않았냐는 결과론은 때려치우자. 비열한 논리이다.

미국 노동자도 우리와의 연대 대상 아니냐는 어설픈 만노단(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도 접어두자. 차별과 배제의 화신인 트럼프를 뽑은 건 백인 노동자들이었다.

그런 안하무인 미국에서 생산된 희곡이 왔다. 무려 퓰리처상 수상 희곡이다. 그런데 내용이 가소롭다. 신시아는 자기 손으로 아들을 해고했다고 아파한다. 경제위기 때마다 무섭게 치솟던 자살률과 살인적 작업환경에 노출된 수많은 노동자를 떠올리면 한가하기 그지없다. 수많은 용균이 엄마들을 생각하면 얼굴마저 화끈거린다. 피켓라인 시위에, 관리직-생산직 갈등을 보자니 한숨이 나온다. 크레인 농성, 굴뚝농성, 수백일 천막농성이 지천이고, 혈서, 단식, 삭발이 일상인 이곳에서 저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듣자니 딴 세상이다. 저건 1980년대 영국이 이미 거쳤던 서사(<빌리 엘리어트>, <풀 몬티> 등) 아닌가. 저 때늦은 불황 사춘기를 막 지나는 미국 실업자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시시풍덩하고 멋쩍다.

그래도 희곡의 완성도가 역사적 배경에 좌우되는 건 아니다. 우리의 촉감에는 흐물흐물하고 야들야들한 소재더라도 갈등 라인이 살아있으면 좋은 희곡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스웨트>는 정리해고, 노노갈등, 인종갈등을 배합하여 폭행상해죄라는 핵사건을 뽑아올리고 있지만, 그 극적 구도가 부실하다. 갈등의 근원은 자본가에게 있지만 폭력의 대상은 애꿎은 오스카이고, 최종적 피해자는 스탠이 된다. 상황은 우발적이고, 결과는 엉뚱하다. 제이슨과 크리스의 재회도 모호하다. 아마도 크리스가 제이슨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듯한데, 그에 관해선 더 이상 유의미한 전개는 없다. 이런 종잡을 수 없는 극적 진행은 2000년대부터 20년 넘게 미국을 괴롭혀온 실업문제에 대한 통쾌한 비판과 왜곡된 인종차별에 대한 폭로라는 소재에 주목하게 만드는 전략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단히 불행히도, 우리는 저들의 불행에 공감할 힘도 남아있지 않고, 저들의 고통에 맞장구칠 아량도 남아있지 않다. 2021년 5월까지 과로로 죽고 깔려죽고 떨어져죽은 노동자 수만 344명이다.

성량과 화술의 문제도 크다. 성량이 작으면 중요 대사를 할 때 객석을 지향해야 한다. 배우들 간 성량의 차이도 어느 정도 조절할 필요가 있다. 잘 들리는 소리에 튜닝되면 다른 소리는 쉽게 놓치기 때문이다.

무대배경이 가까이, 높게 서 있으면 배우의 움직임이 묻히기 쉽다. 여느 때보다 동작이 커야 한다. 송인성 배우의 동작과 표정이 적절하다.

섬세한 심리묘사(따위)는 없다. 3시간 넘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 때문일까.

꼬투리: “이제 움직여야 할 때야.”란 표현은 time to move의 번역어 같은데, “떠야 할 때야”가 더 적합하지 않을지.


공연명: <목선>

관람일시: 2021.06.23.19:30

극장: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양식화의 문법

– ‘현실’은 방대하고 산만하고 조야하다. 예술가는 자신의 미학적 기획에 따라 현실에서 소재와 디테일을 취사선택한다. 현실의 일부를 발췌하여 변형, 배치, 병합 등의 작업을 거쳐 짜임새를 갖춘(=예술적 형식미)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것이다.

– ‘현실의 일부’가 분석과 인과론의 과정을 거치면 리얼리즘이 되고, 과장과 종합의 절차를 거치면 모더니즘이 된다.

– 양식화는 과장과 종합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의 대표적 표현미학이다.

– 그래서 양식화는 일상적 디테일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대극적인 것을 격렬하게 뒤섞고(=종합), 의도적으로 모순이 첨예화되도록 과장, 확대, 혹은 단순화한다. 현실의 지엽말단을 제거하고 본질적 측면만 단순하게 확대/이질화하는 방식이다.

– 단순화와 과장은 견고한 현실의 거피를 벗겨내기 위한 양식화의 무기이다. 그래서 양식화는 그로테스크 미학을 지향한다. 현실의 진면목이 드러날 때까지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집요하게 과장하여 그로테스크적 이질감/기괴함이 느껴지게 만드는 것이다. 현실의 이면, 즉 비가시적 세계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이 그로테스크의 목적이다.

– 양식화-그로테스크는 일상을 기괴하게 변형하여 관객을 수수께끼 상태에 빠뜨린다. 낯선 일상의 파편/왜곡/변형 속에서 진짜 현실을 발굴해야 하기 때문이다.

– 예술가가 마련한 그 수수께끼를 넘어섰을 때 자동화된 일상은 새로운 감각세계로, 무료한 현실은 해석을 기다리는 의미세계로, 저속한 물질적 삶은 신성한 영적 세계로 변모한다.

– 19c말 일상이 무대에 도입되기 전까지, 연극은 그로테스크의 향연이었다. 고대그리스비극의 가면, 코러스의 합성된 음성, 시간과 공간의 변형을 보라. 연극은 본질적으로 그로테스크적이다.

◆ <목선>의 오류

– 윤한솔 연출은 한국에서 양식화를 추구하는 드문 예술가이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다.

– 하지만 <목선>은 양식화에 실패하고 있다. 무질서와 혼재를 조화로 이끄는 종합의 힘도 부족하고 기존 인식의 장벽을 깨는 과장의 묘미 또한 여리다. 깊이 없는 피상적 양식화에 그치고 있다. 희곡 자체가 양식화에 부적합하기도 하다.

– 보이스피싱 피해자 남편(뻔뻔함이란 성격의 양식화), 무능력한 아버지(화술적 양식화) 등에서 일부 그로테스크적 묘사가 있으나 개별적 개성에 그치고 있다.

– 그로테스크는 유희적 성격 못지않게 현실의 각성이 도달할 높은 층위도 중요하다. 하지만 <목선>에는 그 어디에도 각성의 도약이 착지할 높은 인식적 지평은 마련되지 않았다. 액면가 그대로이다.

– 상상력은 부족하고 표현성은 박약하다보니 양식화는 맹목성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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