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연재글을 보낸 것이 1월 말이었는데 어느새 12월호 원고를 쓴다. 늘 그렇듯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프리랜서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12’라는 숫자를 맞이하고 스스로 올해를 정리하고 마감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올해의 처음이 아니라 내가 일을 시작한 15년 전 그때까지 가버렸다. 기획팀으로 참여했던 첫 공연이 있던 해의 나는, 가을 이맘때에는 무직상태나 다를 바 없는 대학원생이었고 논문 학기였다. 3월부터 9월까지 총 쉬었던 날이 스무날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봄부터 여름까지 진행된 시즌1에서는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신나서, 극장에 있는 것이 좋아서 한 달 동안 단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극장으로 출근했던 때도 있었다. 여름쯤 되어서 이 작품이 결국은 제작자의 큰 손해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았지만 문제의 ‘마지막 주 버프’는 그중 몇 사람의 기억오류를 만들어내고 두어 주 만에 시즌2를 진행했었다. 그렇게 3번의 계절을 바쁘게 살았던 나는 늦가을이 되어서야 논문을 본격적으로 잡았는데 이제 와 집에서 종일 있기도 눈치 보여서 대학원 원우회실에서 같은 기획팀이었던 친구와 논문을 썼더랬다. 당시 80만원이었던 인턴 월급을 마지막 달에는 상급자가 동의 없이 10만원 적게 받아가라고 했던 것이 어찌나 화가 났던지. “공연으로 번 게 없는데 월급을 다 받아가고 싶니?”라는 말이 아직도 선하다. 가끔 대학로에 공연을 보러오는 그 사람을 보는데 여전히 그와 마주하면 기분이 나쁠 정도다. ‘-10만원’이 15년을 간다.
작년은 코로나임에도 그리 바쁘더니 올해는 단 한 편이었다, 내가 참여한 작품이. 그마저도 방역에 치여서 이리저리 사람들의 볼멘소리만 듣다 끝난 기분이었다, 내가 주로 일하는 극장은 내가 아니어도 대표와 직원 모두 방역에 예민한 편인데 덕분에 대관을 온 어느 팀에서는 스태프 회의에서 이 극장이 방역이 그리 깐깐하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더란다. 누군가는 이런 식으로 되겠냐고 하고 누군가는 이렇게까지 하면 되겠냐는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었다. 위드 코로나라고 해도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방역 활동에는 큰 차이가 없다. 내년에도 계속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내가 기획자인지 방역요원인지 고민을 해야 할 지경이다.
12월 호에 원래 하려던 이야기는 ‘보도자료’에 대한 이야기였다. 내가 참여하는 작품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언론 보도용 보도 자료를 써서 내보내고 포스터나 전단은 웹 전용으로라도 꼭 만든다. 단1회 공연이라고 해도 기록용으로 사진도 매번 찍는 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이유는 내가 참여한 작품이 서울연극제에 참가하게 되면서 작품의 관련자들 중 80%이상이 서울연극협회의 정회원이 되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중반으로 이루어진 이들은 대부분 정회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내년에 있을 공연 참여를 위해 이번에 자격을 갖춰 정회원 등록을 해야 했는데 몇몇 사람들이 어쩌면 정회원이 될 수 없는 상황이라기에 단체 안에서 다소 근심을 했다. 각자가 열심히 여러 무대에서 공연활동을 해왔는데 의외로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포스터, 전단, 프로그램북이 전무한 경우가 있었고, 언론으로 보도된 기록도 없는 공연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 특히 서울연극협회 가입이기에 서울에서 공연한 기록이 우선이어서 대학로 한복판에서 일하고, 대학로 주변부에 살며 2,30대를 보내온 이들이기에 바라보기에 안타까웠다.
얼마 전 예술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에서 어떤 전문가가 요즘에 홍보를 하라고 할 때 보도 자료를 만들면 구세대, 영상을 만들면 신세대라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얼마간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구세대인가, 이젠 정말 보도 자료의 쓸모가 사라지는 것일까라는 생각에 고민도 했는데 그래도 또 아직은 이것이 우리의 활동을 공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된다고 하니 다행스러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올해는 단 한 편의 연극에만 참여했지만 내년에는 이미 한 편이 확정되었고 마침 그 작품이 나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작품이라서 다행스럽다. 어쩌면, 아마도 그 작품이 연극기획자로서 마지막 경력이 될 테니.
#누군가는 아직 너의 쓰임이 많이 남았다고 해줄 테지만, 내가 원하는 실험성 있는 창작품을 만드는 작가와 연출가, 배우들에게 나는 이제 ‘안 된다’, ‘어렵다’, ‘돈이 없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잔소리 많은 선배가 되어버렸다. 해봤기 때문에, 실패해봤기 때문에, 경험해 보았기 때문에 그 길은 아니라고, 그 방법은 힘들다고, 그 선택은 외면 받을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또한 절대 즐거운 역할도 아니다.
#15년 전 이맘때 차가운 한남동 버스정류장에서 다시는 공연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속상해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타야 하는 경기도행 붉은 버스가 사람으로 가득 차 나를 지나쳐 버렸을 때 대학로를 지나온 파란버스를 보면서 나만 빼고 모두 즐거운 것 같아 눈물이 왈칵 나는 것 같은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만나서 ‘넌 앞으로 연극이고 뮤지컬이고 하고 싶었던 작품들도 모두 하고, 네가 참여하는 작품들은 상도 받고, 어딜 가도 팀장님으로 불리는 삶을 살게 된단다’라고 말해주면 좋겠지만 그 옆의 또 다른 나는 ‘그래봤자 너는 결국 다른 일로 열심히 경력을 쌓아 거기서 번 돈으로 대학로를 다녀’라고 냉소적으로 속삭일 것이 분명하니 관두도록 하자.
#2월부터 지금까지 무척 두서없고 이상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10회나 내보내주시다니 ‘오늘의 서울연극’도 좀 이상한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상한 저와 여러분들이니까 ‘연극’같은걸 좋아하고, 사랑하고, 찾고, 또 (혼자서)미워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미워도 다시 한 번, 2022년 봄 서울연극제가 진행되는 어느 소극장에서 뵙겠습니다. 그때쯤이면 ‘반’만 남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