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 김수미
연출 주애리
출연 김화영, 장연익, 추헌엽(목소리)
두 여자가 공항에서 마주친다. 트렁크 하나를 놓고 내 것이네 네 것이네 옥신각신하는 모습이 단순히 일상적 해프닝인양 보이는 것도 잠시, 과거를 향한 회한의 감정이 두 인물의 공통점으로 서서히 드러난다. 식칼을 소지한 다소 어수선해 보이는 여자(장연익 분)는 바람난 남편을 맞닥뜨리러 공항에 나왔다(‘나이프’). 고상한 몸가짐에 스카프를 두른 또 다른 여자(김화영 분)는 유학을 떠났던 이십대 아들을 마중 나왔다(‘스카프’). ‘나이프’와 ‘스카프’ 각각의 이미지가 두 배우의 몸짓과 화술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맞으러 나왔음에도 두 사람 모두 트렁크에 매여 있다. 나이프는 집을 나서면서 트렁크에 온갖 옛날 물건 잡동사니를 넣어왔다. 나름대로 자신의 이러한 행동을 ‘정리’라고 불렀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과거의 시간에 대한 미련을 의미한다. 남편을 살해하겠다는 극단적인 계획 자체가 아직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디로 갈 것도 아니면서 트렁크에 집착하는 것은 스카프도 마찬가지다. 작품 초반, 자신의 사라진 트렁크를 찾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스카프는 자신이 트렁크를 아예 안 가지고 온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가져가버린 것인지 반복해서 기억을 되짚는 모습이다. 여기에서 무대 위 트렁크가 단순히 일상의 ‘여행가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게 명확해진다. 가장 버리고 싶지만 결코 버릴 수 없는 기억.
짧은 시간 동안 둘은 타인에서 가벼운 커피 한 잔을 나누는 사이로, 밥 친구를 거쳐 술친구로 발전한다. 둘 중 세상을 더 오래 산 스카프는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는 나이프를 다독이고 그녀의 닫힌 관점을 환기시킨다. 그러고 보니 첫 만남의 순간에 나이프의 잡동사니 가득한 트렁크를 끌고 나가버린 것도 스카프였다. 두 낯선 여인들은 이전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과거의 고통을 서로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위로를 받는다. 처음에는 나이프가 언니인 스카프로부터 일방향으로 위로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스카프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만큼 타인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유학간 아들이 마지막으로 보내줬던 음악을 나이프와 함께 듣게 된 스카프는 마침내 그 아들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밝힌다. 아들의 시신을 찾으러 먼저 출국한 남편이 남들의 눈을 의식했던지 아무에게도 아들의 자살을 알리지 말라고 단속했던 것이다. 스카프의 회한은, 아들을 믿는다고만 반복해서 말했을 뿐 그의 아픔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알지 못했다는 것, 더 세심히 살피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스카프와의 대화를 통해 나이프는 자신의 무모한 행동이 자신은 물론 아들의 삶까지도 망쳐놓을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일상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 작품은 결혼/가정생활을 하면서 독이나 회한을 품게 된 두 여성 인물이 서로의 삶을 위로하게 된다는 이야기이지만, 세계 여러 곳을 떠올리게 하는 공항 안내 멘트(목소리: 추헌엽)와 무대 위 즐비한 트렁크가 만들어내는 ‘떠남’과 ‘정체’의 이미지를 통해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쉽사리 새로 시작하지 못하는 인간 보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운스테이지의 상수와 하수에 나뉘어 몰려있던 트렁크들 중 상수에 있던 트렁크들이 배우들의 손에 이끌려 하나둘씩 업스테이지 중앙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 독특한 미장센이 인상적이다. 누군가의 삶이고 기억인 수많은 트렁크들이 간헐적으로 들리는 공항 안내 방송을 배경으로 끊임없이 방랑하고 있는 것이다.
나이프와 스카프는 굳이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고 헤어진다. 나이프는 스카프와의 우연찮은 만남으로 자신과 자식의 삶을 위해 남편 살해를 단념하고 스카프 또한 지인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 없이 낯선 이로부터의 인간적 위로에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 장면을 피날레로 삼지 않았다. 나이프를 보내고 홀로 앉은 스카프는 곧 장남과의 전화를 통해 둘째 아들이 죽은 것이 오늘이 아니라 1년 전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자신의 위로로 나이프와 그의 남편, 그들의 아들까지 구원한 스카프야말로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참척의 고통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더한다. 살다가 “길이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나이프의 질문에 그것이 “가야할 방향을 찾는” “쉬어가는 시간”일 것이라고 대답했던 스카프의 말은 나이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말이 맞았던 것이다. 스카프에게는 더 긴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
작가는 괴로운 기억을 반복하는 스카프를 홀로 남겨두지 않았다. 에필로그 격인 마지막 장면, 나이프로 분했던 장연익 배우가 히말라야로 야크를 보러 떠나는 또 다른 여자로 다시 등장한다. 히말라야는 나이프와 스카프의 대화 속에 등장했던 지명, “인생이 티끌처럼 가벼워 진다”는 바로 그곳이다. 새로운 인물과 스카프의 대화는 일전의 나이프와 스카프의 첫 대화를 꼭 닮았지만 어쩐지 좀 더 희망적인 뉘앙스가 읽힌다. 나이프와의 대화 중 히말라야에 가보고 싶다며 임시 여권 발급 방법을 알고 있다고 말했던 스카프가 혹시 이번에는 이 긴 기다림을 끝내고 새로운 친구와 야크를 보러 떠날 수 있게 되는 건 아닐까. 떠날 수 있길. 꼭 그럴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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