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립극단 <스고파라갈>

글_김기란(연극평론가)

 

 쿵짝 프로젝트의 임성현이 쓰고 연출한 <스고파라갈>(2023.08.24-09.17,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은 정확히 80분 공연되었다. 고시(告示)했던 대로 80분의 공연으로 마무리된 점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최근 고시된 공연 시간에 부족하거나 넘치게 공연되는 경우가 왕왕 있어 왔기 때문이다(약속된 공연 시간을 간단히 무시하는 행태에 우리는 너무 너그럽다 !) 인류의 역사 이래‘극장(Theatre)’에게 부여되었던 공공성을 생각하면 약속된 공연 시간을 맞추는 정성과 집중은 마땅히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스고파라갈>은 첫 공연을 관람했음에도 빈틈없이 계획된 완성도가 느껴지는 공연이었다.

 더욱 중요한, 80분의 공연에 안도했던 이유는 이번 공연에서 사용된 끝없이 확장되는‘반복’의 패턴 때문이다. 마치‘고도를 기다리는’순환적 상황에서 공연의 시작과 끝을 지정할 수 없는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땅거북을 관찰하며 8명의 바다거북이 이야기를 서술하고 토론하는 상황은 반복을 거듭하고, 그 진행은 때때로 방해 속에 공전하며, 그 와중에 종결 없이 끝없이 확장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라니. 80분이라는 정해진 시간이 없었다면 8명의 바다거북은 밤을 새워 이어달리기하듯 인류의 역사를 말하고, 말하고, 또 말했을 것이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인물도, 행동도, 사건도 없기 때문에 지루했지만 그렇다고 <스고파라갈>ᅌᅵ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고파라갈>은 각 잡지 않은 가벼운 B급 갬성으로 충만했다. 각을 맞춘 공연자들의 동작은 엄격한 만큼 우스꽝스러웠고, 그들의 대화는 진지한 만큼 말장난으로 반복되는 내용은 엉뚱했다. 인류 진화의 열쇠를 갈라파고스의 땅거북에서 찾았던 과학자 찰스 다윈은 윈다 스찰 선생으로 호명되어, 땅거북을 진화론의 증거가 아닌, 인간의 욕망에 충실한 자본으로 제공한다. 찰스 다윈이 윈다 스찰이 되는 방식은 대단한 은유적 조작이나 고민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그 이름을 거꾸로 읽었을 뿐이다. <스고파라갈>에 등장하는 역사 속 인물들은 이렇게 그 이름을 거꾸로 호명 당하는 방식으로 끌려나온다.‘거꾸로’에 함의될 수 있는 혹은 기대할 수 있는 전복까지 나가지 못하고, 말 그대로 거꾸로 호명될 뿐이다. 육지에 서식하는 땅거북임에도 바다로 돌아가려 애쓰던 땅거북이 끝내 바다에 도달하지 못하고 거꾸로 맴돌고만 있는 극 안의 상황을 환기시키기도 하겠지만, 의도적으로 부여된 의미는 없다고 본다.

 최근 이전 세대의 명작을 MZ세대의 B급 갬성으로 재소비하는 현상이 인기를 끌며 유행으로 목도된다. 카카오TV <야인 이즈 백>과 MBC의 <다큐 플렉스-전원일기 2021>은 이전 세대가 열광했던 명작 드라마를 지금 소비될 수 있는 대중문화 콘텐츠로 재탄생시켜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2002년 방송 당시 최고 시청률 57%를 기록했던 TV드라마 <야인시대>를 B급 예능으로 바꾼 <야인 이즈 백>이나 김혜자, 최불암, 김수미, 고두심 등 당시 드라마의 주역들이 출연해 근황을 공개한 총 4부작 다큐멘터리 <다큐 플렉스-전원일기 2021>은 그때 드라마에 열광했던 올드팬에게는 추억을, 젊은 MZ세대들에게는 현재의 감성에 맞게 변형된 재미를 선사했다. 진지함이 부담이 되는 영웅서사나 성실한 노동을 강요하는 고루함 대신,‘멋지지만 웃긴 아재’들의 인간적인 허술함이 부각된다.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임성현이 MZ세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스고파라갈>은 이러한 트랜드에 발 빠르게 반응한 공연임은 분명하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스고파라갈> 역시 패러디1, 예능, 토크쇼, 다큐까지 뒤섞는 엉뚱발랄함으로‘기후위기와 예술’이라는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를 줄인 MZ세대의 어휘)한 이번 창작공감 시리즈(연출)의 주제를 풀어냈다. 크게 찰스 다윈(윈다 스찰)이 갈라파고스섬에서 발견한 땅거북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예수(스저지)와 베드로(로드베)의 이야기가 곁들여져 8명의 바다거북의 난장스런 서술과 토크가 이어진다. 12개의 장면은 인간의 욕망에 이용당하며 뜻한 바 바다로 돌아가지 못하는 바다거북의 이야기와 예술가의 이야기가 교차된다. 중요한 인류 역사가 가벼운 B급 갬성으로 조롱되다시피 서술되고 거기서 블래코미디식 씁쓸함이 감각될 즈음, 이 땅의 예술가들의 현실 이야기로 태세를 전환하는 방식이다.“바다, 바다로 가야 해”라는 음향과 총소리를 신호로 구획되는 장면은 당연히 연결이 없다. 사실 연결될 필요도 없다. 찰스 다윈과 예수에 대한 상식적 이해를 가진 관객이라면 장면이 구성하는 이야기의 연결이 아니라, 알고 있는 상식이 변주되고 조롱되는데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혹 갑자기 등장한 예수의 서사가 다소 생뚱맞았다면, 작가이자 연출인 임성현의 전작인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2020)를 떠올려 보라.“개신교 보수화의 거시적인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아우르며 한국 개신교 권력 전반에 비판의 시각”을 드러냈던 이 작품에서 임성현은 기독교 예배 순서와 형식을 고스란히 따르며 무대와 객석 포함 극장 전체를 대형 예배당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예수의 생애를 퀴어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극중극을 포함시키며, 공연 진행 당시 연극계의 논쟁의 대상이었던 남산예술센터의 문제도 은근슬쩍 밀어넣었다. 그가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은 미시적이라기보다 거시적이다. 역사적, 사회적 흐름과 맥락을 큰 틀로 잡고, 그 사이사이 다루고 싶은 내용이나 관점을 끼어 넣어 변형한다. 다루는 대상이 익숙한 만큼 변형이 만들어낸 균열은 인지적 설득이 아니라, 감각적 호응을 의도한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스고파라갈> 역시 마찬가지다. 익히 알려진 인물과 역사를‘거꾸로’바라보며(혹은 조롱하며) 똑바로 바라볼 때(혹은 존경의 대상으로 바라볼 때)와는 다른 불균형과 기괴함, 불편함을 감각하게 된다. 그 과정은 진지하기보다 촘촘한 장난 탓에 유쾌하다. 공연은 거기까지다. 쉽게 호응을 끌어낸 만큼, 한바탕 웃고 난 뒤에는 왜 웃었는지 따지는 일이 허무해진다. 변형의 틈새에 개입된 이야기는 촘촘한 장난에 비해 다소 성글고 거칠다.‘거북이의 진화는 곧 자본의 진화’라는 설정은 횡폭한 자본의 논리, 그것을 작동시키는 인간의 욕망을 생각하게 하고, 실상 여기서 새로운 긴장이나 충격은 없다. 말하자면 변형의 틈새에서 생산되는 감각의 양과 질은 풍성하지도 다양하지도 않다. 그래서인지“의미의 고정”을 의도하지 않은 것이 이해되지 않을 만큼, <스고파라갈> 공연의 의미는 분명해 보인다. 변형의 정도가 얕고 직접적이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이든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환기되는 효과를 끌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공연을 끌어가는 거북이는 빼어난 공연 진행의 활용 못지 않게 2009년 공연되었던 스페인 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다윈의 거북이>부터 삼국유사의 <구지가>를 연상시킬 만큼 풍성한 기표로 작용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것은 마지막 장면이다. 관객의‘좋아요’를 종용하는 어설픈 게임을 통해 영업이 되어버린 예술작업, 예술을 평가한다는 것의 본질과 의미를 유쾌하게 비틀었다. 지금 <스고파라갈>ᅌᅳᆯ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는 이 연극평론의 의미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듯하다. 무릇 연극평론이란 공연의 종료와 함께 사라질 운명의 공연 작품을 기록함과 동시에 그 시대의 연극사와 연극성을 구성하는 기초 자료가 된다. 이런 방식으로 존재해왔던 연극평론의 고전적 의미가 혹 영업 전략으로 변형되고 소비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고 또 자문해본다.

 


 

 

  1. 임성현은 대본의 작가 노트 역시 마르크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11을 패러디하는 꼼꼼함을 놓치지 않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