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극작가 탐방

글_이재진

실러(Johann Christoph 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

-2

(2)<간계와사랑> (3)<메시나 신부>

고전비극에서 시민비극으로

믿음을 밑바탕으로 하는 기독교는 ‘보여주는’ 연극공연을 본래 환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양연극을 유지, 발전시킨 주체는 무어라 해도 극장 문을 닫고자 했던 바로 그 교회였다. 예배(liturgy)에 연극형식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성경 공부나 라틴어 교육을 위해 학교 수업에 연극을 활용했다. 교회 다음은 시민계급이었다. 십자군 원정 이후 기사 계급이 점차 몰락하고 아랍권과의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상권이 일어나 시민들의 입지가 강화되고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민계급의 의식과 부의 성장으로 시민이 점차 극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교회, 시민 못지않게 연극발전에 기여한 주체는 귀족들이 중심이 되어 지원하고 운영하던 궁중극(court theatre)이었다. 분산되어 살고 있던 귀족들은 때때로 궁전에 모여 음악을 듣거나 춤을 추거나 연극을 감상하였다.

고전비극과 시민비극사이에 커다란 차이점은 무엇보다 주인공의 신분이다. 주인공이 귀족에서 서민으로 내려간다. 궁중이란 무대에서 서민의 세계로 바뀐다. 그에 따라 물론 언어도 달라진다. 비극에서 쓰는 고양된 운율적인 언어에서 이야기체의 대사로 전환된다. 실생활(현실)에 더 가까워진다. 작품 속의 인물만 바뀐 것이 아니라 관객 역시 신분 전환과 연계되어 변화된다. 배경은 화려한 궁중의 행복한 분위기보다는 서민의 정서적으로 평온함과 차분한 분위기를 선호하게 된다.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게 된다. 맹세와 위증, 죽음이 무대를 메꾼다. 비정치적 가족 갈등, 사회적인 갈등이나 모순은 가능하면 손대지 않는다.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 1784])

재상의 아들 페르디난트는 궁중 악사의 딸 루이제를 사랑한다. 재상은 자신의 아들이 평민보다는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다. 재상은 루이제의 집에 갔다가 루이제의 아버지와 다툼이 벌어진다. 흥분한 나머지 루이제 아버지는 재상을 욕보인다. 재상은 이를 이용하여 루이제에게 거짓 편지를 쓰도록 협박하게 된다. 위험에 처한 아버지 때문에 루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재상이 불러주는 대로 시종장을 사랑한다는 식의 거짓 편지를 받아 적는다. 이 편지를 페르디난트가 보도록 계략을 꾸민다.

배반당했다고 재상의 아들 페르디난트는 궁중 악사의 딸 루이제를 사랑한다. 재상은 자신의 아들이 평민보다는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하고 있다. 재상은 루이제의 집에 갔다가 루이제의 아버지와 다툼이 벌어진다. 흥분한 나머지 루이제 아버지는 재상을 욕보인다. 재상은 이를 이용하여 루이제에게 거짓 편지를 쓰도록 협박하게 된다. 위험에 처한 아버지 때문에 루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재상이 불러주는 대로 시종장을 사랑한다는 식의 거짓 편지를 받아 적는다. 이 편지를 페르디난트가 보도록 계략을 꾸민다. 배반당했다고 오해한 페르디난트는 주스에 독약을 타서 루이제를 먹인다.

루이제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 오, 이제 더 이상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어 – 죽음은 – 죽음은 모든 맹세의 고리를 풀어주니까 – 당신 같이 불쌍한 사람이 이 세상 또 있을까! – 아무 잘못도 없이 나는 죽어요,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놀라며) 뭐라는 거야? – 이런 여행을 떠나면서 거짓말은 안고 가지는 않는 법이거늘!

루이제 내가 거짓말을 하다니 – 거짓말이 아니에요 – 나는 평생 단 한번 거짓말을 했을 뿐이에요 – 하, 몸속이 너무 차가워지네 – 시종장에게 편지를 쓸 때, 단 한번 – 페르디난트 하, 그놈의 편지! – 젠장! 온몸의 피가 다시 끓어오르는구나.

루이제 (혀가 점점 무거워지고 손가락이 마비되며 경련한다.) 그 편지는 – 정신 차려요, 그리고 끔찍한 이야기니 잘 들어요 – 이 손으로 편지를 썼지만 내 가슴은 저주하고 있었지요 – 편지는 당신 아버님이 불러주었습니다.

페르디난트 (몸이 굳어지며 조각상처럼 오랫동안 뻣뻣하게 굳어 서 있다가, 벼락을 맞은 듯 순간 쓰러진다.)

루이제 고약한 오해가 생겼어요 – 페르디난트 – 내게 강요를 했어요 – 용서 하세요 – 당신의 루이제는 기꺼이 죽음을 택했을 겁니다. – 하지만 우리 아버지 때문에 – 너무 위험해서 – 그 사람들의 계략은 너무나 – —

페르디난트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며 고통 속에 휘말리며 루이제 앞에 무릎을 꿇는다.) 잠깐! 잠깐만! 나를 떠나지 말아! 나의 천사! (손을 잡았다가 순간 다시 놓는다) 차가워, 차갑고 축축해! 이 여인의 영혼은 떠났어. (다시 벌떡 일어나) 루이제의 하나님! 자비를! 이 천인공노할 살인자에게 자비를! — (독이 든 잔을 잡는다.) (5막7장)

비열한 술책과 간계로 인해 수상의 아들 페르디난트(Ferdinand)와 악사의 딸 루이제(Luise) 사이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레씽의 모델을 쫓고 있다. 계급상의 문제가 해체되고, 귀족과 시민 사이에 인간적인 문제가 중심에 놓이게 되고 정치적 권력을 고발하는 비극이다.

정치적 드라마로 평가받는 <간계와 사랑>도 주인공 페르디난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은 절대적 사랑을 갈구하는 ‘폭풍노도’형 젊은이의 비극이라 볼 수도 있다. 페르디난트는 불공정하고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절대군주하의 질서를 비난한다. 신분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궁중 생활을 멸시하며, 그런 생활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신의 품에 안기고자, 순수한 사랑을 꿈꾸는 등 감상적인 생각에 파묻혀 있다. (이런 주인공의 생각은 그 당시 유행하던 루쏘의 자연친화적인 사상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절대적 사랑에 집착하는 페르디난트는 한 통의 편지 사건으로 쉽게 질투에 눈이 멀게 되고 (오셀로의 손수건처럼!) 스스로를 심판관으로 착각하고 죄 없는 여인을 죽이고 만다.

그 당시 뷔르템베르크(Württemberg) 공국은 상대적으로 가난했으나, 영주는 베르사유를 흉내 내며 지나치게 축제, 무도회, 사냥에 빠졌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젊은이들을 노예처럼 미국에 팔아 넘겼다. [간계와 사랑]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직접 언급한 유일한 실러의 작품이며 현실문제를 직접 무대배경으로 삼은 마지막 작품이기도 하다. 1784년 4월 프랑크푸르트/마인에서 초연되었다. 정치적 이유로 초연이 있은 직후 이 작품은 공연이 금지되었다. 검열 때문에 그 후 실러는 현재를 배경으로 삼는 드라마는 쓰지 않고 역사적 배경을 무대의 시제로 삼았다. <간계와 사랑>은 독일 고전의 최고 걸작으로, 학생들의 필독서에 속한다.

<메시나 신부>(Die Braut von Messina. 1803)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수용한 <메시나 新婦>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처절함, 형제간의 갈등, 증오, 질투, 사랑, 근친상간, 결투, 살인, 죽음, 화해 등을 주제로 담고 있다. 소재 역시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 비극에 부합된다. 실러는 이 비극을 개인의 잘못(죄)이 전체 가문의 몰락을 가져온다는 그리스 고전비극의 틀에 맞추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에서처럼 이미 정해진 운명은 아무리 헤어나려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종교적 성격의 운명극은 아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운명이 아니라 개인의 잘못이 결국 비극의 원인이라고 코러스는 노래한다.

무대는 고대와 현대를 어우르는, 기독교와 이교도가 만나는 시칠리아의 메씨나로 정해져 있다. 메씨나 성은 기독교, 그리스신화, 이슬람교가 서로 교차하고 서로 융합된 곳이다. 물론 이 작품의 기조에는 기독교적인 사상이 깔려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에 나타나는 인간의 운명이 핵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꿈에 나타나는 동화적기법은 무어족의 민간 신앙에 근거한다. 이런 세 가지 신화적, 종교적, 토속적 요소가 극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 이런 요소들의 조합은 작품의 깊은 주제와 맞닿아 있다.여동생인 줄 모르고 형제간 빼앗고 빼앗기는 동화 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사고의 영역에 얽매어 있지 않다.시간을 뛰어 넘는 새로운 시대적 문제를 담고 있다. 종교적인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도, 신화적인 범주에 머물러 있지도, 도덕적인 사고의 영역에 얽매여 있지도 않다.신들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그런 옛날이야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용서를 구하고 희망을 쫓는 매우 현대적인 인간 드라마이다.

줄거리를 살펴보자. 얼마전 메시나 성주가 죽었다. 늘 싸우며 분란을 일삼던 돈 마누엘(Don Manuel)과 돈 체자르(Don Cesar) 두 형제는 이제 화해하고 손을 잡는다. 홀로된 어머니 이사벨라(Isabella)는 두 아들에게 숨겨두었던 누이동생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그간 수도원에서 자란 베아트리체(Beatrice)를 이제 곧 성으로 부른단다.

이사벨라가 임신했을 때 남편인 영주가 꿈을 꾸었다. 점성가는 이 아이가 태어나면 이 집안을 송두리째 망가트린다고 해몽을 했다. 이사벨라도 꿈을 꾸었다. 수도승은 이 아이 덕분에 피를 뿌리는 분쟁 속의 두 형제가 끝내 사랑의 손을 잡으리라 확인해 주었다. 딸아이가 태어나자, 영주는 죽이라고 명령한다. (외디푸스, 파리스, 오레스테스는 모두 이와 비슷한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수도승의 해몽을 더 믿었다. 결국 베아트리체는 깊은 산속의 어느 수녀원에서 자라게 된 것이다.

숲속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돈 마누엘은 우연히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돈 체자르는 아버지가 죽자, 추도미사에 몰래 찾아온 누이를 만나게 된다. 두 형제는 모두 여동생인 줄 모르고 한눈에 반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서 만나기로 한다. 형이 베아트리체를 껴안은 모습을 보자 질투에 눈이 먼 돈 체자르는 순간적으로 형을 찔러 죽인다. 이사벨라가 이 비극의 전말을 밝힌다. 동생은 죽음으로서 형에게 용서를 빌고자 한다. 코러스가, 엄마가, 여동생이, 울며 만류하며 매달려본다. 베아트리체가 눈물을 흘리자, 자신을 위해서도 눈물을 흘려준다며 그 눈물이면 충분하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돈 체자르는 형의 곁으로 찾아간다.

(이 순간 합창 소리가 들린다. 날개문이 열리고 예배당에는 상여가 높이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관은 여러 촛대로 둘러싸여있다.)

돈 체자르(관을 향해)— 누이의 눈물을 나는 보았어, 그 눈물은 나를 위해 흘려주는 것이기도 했어, 그 정도면 이 가슴은 후련해, 형에게 가겠어.

(단도로 몸을 찌르고, 죽으며 누이를 잡으며 미끄러지듯 쓰러진다.) (4막10장)

공연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초연(1803. 3. 19)이 있었다. 예나(Jena) 대학생들은 마차 32개에 가득 나누어 타고 몰려왔다. 실러는 그 당시 예나대학 교수(역사)였다. 막이 내리자 학생들은 브라보를 연호하며 만세를 부르며 갈채를 보냈다. 장년층은 특히 젊은이들의 난동에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바이마르 극장과 같이 품위 있는 예술의 전당에서 학생들이 보인 비이성적 행동을 처벌하기 위해 바이마르 경찰이 나설 정도였다. 열광적인 학생들과는 달리 일반 관객이나 비평가들의 반응은 하지만 싸늘했다. 비난의 핵심은 우선 종교적인 차원의 문제였다. 실러는 작품에서 기독교와 그리스 신화세계, 토속신앙 등과 조합했기 때문이다.

종교적 이유보다도 이미 흘러간 구시대의 산물로 생각하던 그리스 고전 비극의 특징인 코러스를 도입했기 때문에 반응이 더욱 부정적이었다. 기원전 6세기 중렵 테스피스(Thespis)가 처음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코러스에(보통 15~24명 정도), 이에 응답하는 제1배우(Protangonist)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비극경연이 점차 뜨거워지자 (아이스퀼로스 – 소포클레스 – 에우리피데스) 연극적 요소가 더욱 강헤졌다. 코러스는 점점 축소되고 배우는 하나 둘 많아진다. 실러는 그리스 고전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이 비극에 그대로 담아 18세기 초의 독일연극 무대에 옮겨놓았던 것이다.

가족처럼 지내던, 자유투사이며 시인이던 쾨르너(Theodor Körner. 1791-1813)는 실러를 위로하는 격려의 편지를 보낸다. “요즘 사람들의 시끄러운 박수갈채를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요, 앞으로 다가올 후손들 중 질 높은 예술애호가들에게서 흘러나올 끊임 없는 명성을 기대하십시요.”

<메시나 신부>는, 그 당시나 지금이나, 관객에게서 아주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하지만, 나는 형제간에 벌어지는 단순하게 보이는 이 비극을 언젠가 우리 무대에 꼭 올리고 싶다. 실러에 도전이나 하듯 나는 원문의 줄까지 모두 맞추어 번역했다. 번역서에(지만지. 2011) 제법 상세하게 해설을 달아 놓았으니 참고하시라!


  • 무료정기구독을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메일을 보내주세요.
  • 리뷰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ohskon@naver.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