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스토리켓X극단 커브볼 <실종법칙>

글_김기란(연극평론가)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작가인 황수아가 쓰고, 주애리가 연출한 <실종법칙>(2023.11.18.-11.19, 민송아트홀 2관)은 제23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 공식참가작으로 공연되었다. 2인극은 단 두 명의 배우가 역동적인‘밀당’으로 극을 끌어가야 하는 매우 어려운 공연 형식이다. 배우의 기량이 비슷해야 하고, 연출의 밀도도 높아야 하며, 못지않게 대본의 힘도 중요하다. 국내에서 창작되는 희곡 중 2인극의 편수도 많지 않거니와 그 중 수작(秀作)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실종법칙>ᅌᅳᆫ 연기, 연출, 대본이 합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다. 무엇보다도 황수아 작가의 대본은 이제까지의 국내 창작 2인극 중에서도 단연코 으뜸이라 할 수 있을 만큼 2인극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여러 편의 공연이 교차로 진행되는 민송아트홀 2관의 무대는 최소한의 장치로 최대의 상상력을 끌어내야 했다. <실종법칙>의 무대는 무대를 가로지르는 탁자 하나와 의자 서너 개로 꾸며졌다. 그 외 극의 공간이 반지하방임을 보여주는, 창문을 형상화한 사각틀이 무대 중앙에 걸려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바로 그 오브제, 남성 재킷이 걸린 옷걸이 하나, 단 이 3가지의 공간 구성 요소만으로 60분 남짓한 공연은 한 겹씩 벗겨지는 비밀과 그로 인한 긴장을 증폭시키고, 극적 반전의 폭발적인 위력을 끌어냈다.

 

사진 제공: 스토리켓

 

한 남자의 형상이 어슴푸레 보이는 매우 어두운 첫 장면은 앞으로의 이야기 진행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찰라의 순간, 무대는 다시 어둠에 잠기고 방심한 관객들을 놀래키는 한 여성의 고함소리로 무대는 밝아진다. 간결하면서도 효과적인 연출력이다. 밝아진 무대에는 분노로 가득 차 독설을 쏟아내는 30대 여성 유영(김시영 분)과 그녀의 분노를 담담히 받아내는 침착한 20대 남성 민우(한상훈 분)가 이미 대결 중이다. 대개의 2인극 무대가 그렇듯, 한 번 등장하면 퇴장은 없다. 등장한 두 배우는 공연의 끝까지 커졌다 작아지는 힘의 역학 관계를 보여주며 주도권을 쟁탈하기 위한 연기를 만들어야 한다. 공연의 시작과 동시에 제시된 두 배우(인물)의 대결 상황은 실종된 여성의 행방을 쫓는 분석극의 성격을 띤 <실종법칙>의 입체적 진행을 위한 전제로 충분히 훌륭했다.

<실종법칙> 초반의 주도권은 실종된 여동생 유진의 행방을 탐문하기 위해 여동생의 남자친구인 민우를 찾아온 유영에게 있는 듯 보인다. 그녀의 앙칼진 목소리와 상대방의 대답을 단칼에 자르는 어투는 다혈질에 성급함을 장착한 유영의 성격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그리고 바로 이런 유영의 성격이 <실종법칙>의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중요한 요소임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속칭‘초식남’처럼 보이는 민우는 유영의 비수같은 말이 주는 모욕에도 목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이 조근조근 대답한다. 이 두 인물, 나아가 배우(연기)의 대비는 분명했고, 그만큼 유진의 실종이 아닌, 유영과 민우가 대결하는 지금, 여기의 상황과 내용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2인극이 요구하는, 그러나 실제 구현되기에는 매우 어려운 본질을 멋지게 돌파한 것이다.

극 초반 심정적으로 관객들은 유영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민우에게 마음이 쓰인다. 관객은 대개 무대 위 약자의 편이기 마련이다. 유진의 실종에 민우는 책임이 없는 것 같다. 민우는 억울하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다. 무엇보다 유진의 안위를 걱정하는 두 사람의 숨겨진 전사(前史)가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끌려 나오며, 이들과 유진의 관계는 간단하게 정리될 수 없는 것이 된다. 유영은 진정 유진을 걱정하는가. 혹은 민우는 여전히 유진을 사랑하는가. 관객들을 혼란스럽다. 유영과 민우는 유진의 치기 어린 창작욕을 함께 흉보고 맞장구친다. 하지만 유진을 질투하는 유영의 과거 엽기적 행적이 민우에 의해 폭로되며, 이제 극의 주도권은 민우에게 넘어간다. 관객들은 유영을 의심하게 된다.

 

사진 제공: 스토리켓

 

유진의 행방을 탐문하는 유영의 분노가 히스테릭하게 고조되고 민우가 궁지에 몰릴 즈음, 유전적 곰팡이 알레르기로 기침을 하는 유영에게 민우가 권하는 한 잔의 물이 극의 흐름을 진정시킨다. 중간중간 경찰서에서 걸려온 전화도 극의 흐름을 전환한다. 유진의 실종은 어쩌면 무대에 등장하지 않으나 대화 속에 언급된 새 남자친구 변리사와 연관된 것 같다. 유영은 새로운 가능성에 절규하고, 발작적인 기침을 쏟아낸다. 물비린내를 이유로 유영이 마시기를 거부했던 물컵은 여전히 무대 위 탁자 위에 놓여 있다. 다시 한 번 민우는 유영에게 물컵을 내밀고, 심한 기침에 숨이 넘어가던 유영은 물을 마신다. 민우는 그런 유영을 바라보며, 경찰서로 달려간다. 그때까지 무대 중앙 옷걸이에 걸려있던 자신의 재킷을 걸친 채. 소름 끼치는 반전, 관객석을 숨죽이게 한 긴장의 전율은 바로 재킷이 벗겨진 옷걸이로부터 가능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빛나는 옷걸이, 재킷 속에 덧걸쳐 있던, 바로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관객석은 엄청난 충격이 가져온 깊은 침묵에 빠진다.

유전적 곰팡이 알레르기, 물컵, 딸기 케익, 빨간 가디건’까지 황수아 작가와 연출은 대본이 제공한‘밑밥’을 빠짐없이 활용하고, 극 후반 그것들을 모두 회수하며 강렬한 극적 효과를 끌어냈다. 잘 짜인 정통 드라마의 진수이자 2인극의 미덕을 한껏 보여준 놀라운 공연이었다. 반전의 요소는 이 글에서 스포일러하지 않았으니, 다시 공연된다면 관람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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