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건표(연극평론가)
일본 현대 희곡을 지속해서 무대화하고 있는 배우 고수희의 극단 58번국도는 <접수>(베츠야쿠 미노루 작), <이방인의 뜰>(카리마 카오스 작)에 이어 세 번째 작품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요시다 코나츠 작, 최소현 연출, 배선애 드라마투르그)을 공연했다. 극중인물 후타로(이근희 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삶과 인생을 멜랑꼴리하면서도 희비극의 전경처럼 그려내고 있는 작품으로, 고수희가 나옥희라는 활동명으로 희곡을 번역했다.전작 두 편의 성적표는 관객 평가와 리뷰를 보면 대체로 좋다. <접수>는 1980년대 일본에서 초연된 단막극으로 블랙 코미디적이면서도 부조리한 작품이다.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는 극중인물 ‘남자’가 한 상가 건물 요시다 클리닉(신경정신과)에 진료를 접수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단막극이다. 태평양 전쟁과 일본의 초고도의 성장과정에서 버블경제를 겪은 작가는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는 한 인간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 사회를 그려내고 있다. 밀집된 병원 건물에 36개의 진료 접수가 끝나야 온전한 인간으로 치유되고 살아갈 수 있는 초현대화된 세상을 블랙코미디로 조롱하는 작품으로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렀다.
두 번째 작품 <이방인의 뜰>은 두 남녀를 통해 현행 사형제도의 미래를 투영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붉은색 분위기의 교도소 면회실 무대장치가 오묘하고 독특했는데, 여자 사형수(히구치 코토하, 최유리 분), 그리고 수감자를 대상으로 봉사 모임 활동을 하고 있는 연극 연출가이자 작가로 설정된 니노마에 하루(김재일 분)의 대화가 아크릴 면회실 창을 사이에 두고 진행된다. 미래의 사형제도가 변경되고 직계가족, 배우자한테 동의받아야 사형수는 집행일을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이다. 작품 스토리가 필요했던 작가 하루와 사형수를 옥중결혼으로 관계 설정을 하면서 극이 진행된다. 연극적인 반전은, 서류 상 사형수 히구치의 남편이 된 작가 하루의 전 부인이 자살 충동이 있는 사람들을 유인해 7명을 죽인 사형수 히구치 코토하가 살인한 연쇄살인 피해자 중 한 명이었던 것. 예상하지 못했던 반전의 복수극이 갖는 극적인 긴장감이 두 배우의 밀도있는 심리극으로 더해지면서 사형제도의 문제를 고민하게 만든 사회성을 드러낸 작품이다.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도 인간의 삶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세 작품이 관통하고 있는 몇 개의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현시대 사회구조에서 살아가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블랙코미디로, 드라마 구조로, 몽환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웹툰의 전경처럼 구현하면서 극단 58번국도의 작업방식으로 무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타로의 가족사와 비와 고양이, 그리고 몇 개의 거짓말
이 작품은 고수희 배우가 일본 희곡을 번역한 것으로, 연출적인 특별한 구조와 배치보다는 희곡 서사를 배우들과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TV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동해 온 배우 이근희가 연극무대로 돌아와 60세의 후타로 역할을 그려내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성장기, 30대를 돌아 60번째 생일을 맞는 극중인물의 가정사와 결핍, 콤플렉스로 침전된 내면을 안정감 있는 연기로 보여주고 있다. 캐릭터로 연기하던 시간을 지나온 만큼 이번 작품에서는 6세부터 60세까지 변주되는 내면에 온기가 있는 연기로 웃음의 포인트를 살려내고 있다. 서자(庶子)로 태어난 어린 시절 성장기의 시시콜콜한 가정사와 아버지의 부재, 엄마의 죽음, 아들 텟페이(김재웅 분)의 동성애, 그리고 고양이에 대한 집착 등 후타로의 삶의 시간이 밀물처럼 스며들어 짠하게 만들었다. 드라마투르그 배선애 연극평론가는 “인간이 외롭고 슬퍼도 태어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후타로의 긍정적 감성을 이근희의 자연스러운 연기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100세 시대 고령화 사회에서 인생 후반전을 맞이한 후타로는 불안전한 내면(모성애, 사랑, 가족, 결혼과 이혼으로 인한)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고양이’를 통해 가족 분열과 결핍된 내면에서 사랑의 온기를 욕망하고 상처를 치유해 가는 후타로처럼 출생의 축복을 자축하는 생일을 기다리며 힘들고 외로운 인생 속에도 희망을 기대하며 후타로처럼 살아가고 있는지도.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현실적이면서도 우화적인 장면들이 과거와 현재로 중첩되어 진행된다. 연극은 조명이 어두워진 채로 “후타로, 육십 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라는 안내 음성으로 시작되고, 극중인물은 후타로와 아내 아유코(김해서 분), 엄마 키요미(정수연 분), 딸 나호(박지원 분)와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예비 사위 이즈미야(이종원 분), 아버지 료타와 조강지처인 사와코, 아들 텟페이와 그의 여자친구 엔도, 고양이 타마가 극을 이끌어가는 구조다. 후타로와 키요미를 제외하고는 배우들이 1인 2역을 맡고 있다. 이 작품에서 1인 2역은 네 명의 배우가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데 극적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연출적인 장치보다는 인간의 윤회적인 삶을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동성애자 아들로 등장하는 고양이 타마가 마지막 장면에서는 인간처럼 행동하고 가족들과 대화를 주고 받고 있다는 점, 후타로의 과거 시간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망자가 된 인물로 보이는 아버지는 사위로, 정실부인은 딸로, 극 중에서 과거로만 존재하는 후타로 삶에서 부재해 있는 아내는 아들의 여자친구 엔도로 인물들이 산자와 망자로 기억되는 인물로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와 고양이 타마는 내면으로 살아있는 분신(分身)의 존재로, 후타로 집과 과거와 현재의 가족들은 꿈처럼 재생되는 분위기이다. 극중 공간은 후타로가 혼자 사는 일본의 아담한 가정집 거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무대는 망자와 살아가는 현실의 시공간이 뒤엉켜 진행된다. 정사각형 구조로 보이는 거실은 소파와 고양이 인형이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좌측은 내부(방, 부엌)로 이동되는 공간이고 우측은 출입문으로 설정되어 있다. 후타로의 거실은 과거 가족들과의 기억이 재현되고 출입문 외부의 정사면 길의 공간은 후타로와 키요미, 고양이 타마와 현실에서 부재한 인물들과 후타로가 연결되는 공간으로 몽환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변화된다. 죽은 후타로의 엄마 키요미가 비가 쏟아지고 있는 후타로의 60세 생일에 고양이 인형을 들고 찾아오기도 하고, 기억으로 존재하는 과거 시간의 인물(가족)들이 삶으로 발화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연극이 우울하거나 비의 온기처럼 습하지 않다. 삶을 축복하는 것처럼 아프면서도 유쾌하고, 웃으면서도 씁쓸해지면서도 웃음이 터지는 일기장 같은 연극이다.
◆결핍으로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없는, 비와 불안전한 인간들. ‘인생은 그런 거야’
연극은 후타로의 6세 어린 시절과 33세, 60세 생일로 장면의 시간을 되돌리면서 후타로의 인생은 비를 피할 수 없는 삶을 마주하게 된다. 비는 후타로의 우울과 결핍의 내면성을 동일화시키고 있는 작가적 장치이면서도 온전한 사랑으로 채워진 인간의 내면은 부재해 있다. 극의 마지막 장면까지 쏟아지는 비는 초자연적 현상에서 살아가는 삶과 인생, 죽음과 슬픔, 인생의 상처와 결핍, 콤플렉스로 찢긴 멜랑꼴리한 삶의 은유다. 콤플렉스와 결핍으로 혈전(血栓)되어 있는 후타로의 가족은, 가족이면서도 사랑의 전류로 치유될 수 없는 불안전한 내면들을 보이고 있다. 치유의 약(藥)이 될 수 있는 것은 온전체의 사랑이다. 평생 비를 안고 살아가는 피할 수 없는 삶. 60세가 되어도 후타로는 폭우라는 비극적 현실과 출생이라는 환희 사이에 놓여 있다. 두 집 살림을 해 온 아버지, 오래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자신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아내, 관계를 끊어버린 딸과 아들. 아유코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위계 가정과 후타로의 관계에서 떨어져 나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 재혼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두 집 살림하는 아버지도 사랑의 결핍을 느끼는 존재다. 아들과 엔도의 동성애 사랑도 그런 것이다.
결혼을 앞두고 후타로를 찾아온 나호도 아빠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는 딸이다. 예비 사위와 나호 역시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도 후타로와 완전체의 가족애를 느낄 수 없다. 이러한 가족 같지 않은 어색함과 낯선 이질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면서도 극 중 인물들 삶의 전경은 애잔하다. 연극은 죽어서도 아들 후타로의 곁을 배회하는 키요미의 등장부터 60세의 후타로의 생일날 찾아온 나호와 사위 이즈미야부터 시작된다. 후타로의 6세 생일과 엄마의 고양이 선물, 쌀과자, 후타로의 33살 생일과 고양이 타마의 노쇠함과 죽음, 엔도와 텟페이의 동성애 사랑, 고양이(타마)의 환생 이야기와 타마의 이별 장면 등으로 극적 구성이 이루어지고 마지막은 극중 인물들이 하얀 우산을 쓴 채 이승의 현실에서 죽음으로 소멸하여 가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장면들은 예측할 수 없는 삶과 인생처럼 후타로의 현재와 과거 시간은 퍼즐처럼 뒤죽박죽 엉켜져서 진행된다. 이런 점에서 몇 개의 거짓말 같은 후타로의 이야기는 꿈같은 초현실적인 서사구조이면서도 일기장 같은 인생의 현실을 투영하고 있는 이야기다.
마지막으로 이 작품은 작가가 고양이의 환생론으로 불교의 윤회 사상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환생하는 노령묘는 죽음을 예감하고 아무도 보이지 않은 곳으로 사라지고, 이승의 인연을 거부하는 고양이는 인간 품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타마는 마지막 이별 장면에서 인간의 소리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을 의인화된 연극적 장치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은 후타로가 고양이 타마를 인간 이상으로 인지하고 있다는 설정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운명적인 현상(비)에서 살아가면서도 인생은 후타로의 생일처럼 생명이 태어나고 죽음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승에서 완전한 인간과 가족이 될 수 없었던 불완전한 인생이어도 삶과 인연은 기다리며 윤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픔과 상처로 통증을 느끼면서도 후타로처럼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게 인생 아닌가.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은 인간의 삶과 죽음, 윤회, 사랑, 운명과 생명, 인생의 키워드를 내포하면서도 웃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삶과 인생의 비극을 ‘인생은 그런 거야’라고 말하며 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희극적인 삶처럼 말이다.
◆돈키호테 ‘산초’ 캐릭터에서 ‘인생의 마음’으로 다가온 배우 이근희
대학로에서 ‘산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배우 이근희는 외형의 체구와 호탕한 성격으로 연극무대에서 존재감 있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의 연기를 90년대부터 볼 수 있었는데, 그때마다 독특한 화술과 자유로운 표정은 연극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연극 연기보다는 캐릭터로 각인된 배우였다. 이번 공연은 이근희를 위한 무대일 정도로 연기의 원숙함을 보여주었다.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이면서도 주변 인물(가족)로 분하는 젊은 단원들의 연기를 인물로 생동하는 호흡과 리듬으로 정제(精製)시키며 장면의 구성과 연출의 구도를 안정감 있게 끌고 가면서 장면의 포인트를 살려냈다. 특히 어린 시절은 연기로 과장하기 마련인데, 그 시간은 내면의 마음으로 녹아 있었고, 빨간 우산을 쓴 채 후타로의 인생을 거쳐 간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의 대화들을 떠올리는 장면은 애잔했다.
시간의 간극을 후타로라는 캐릭터로 표현해야 하는 삶의 시차를 배우 이근희의 연기가 후타로의 인생을 흡수해 내면으로 침전되어 있는 연기였다. 이근희를 중심으로 배우들이 인물의 특징을 내외면으로 살려낸 것이 작품의 성공 포인트라 할 수 있다.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은 특정 장면에서는 시트콤 리듬으로 극이 흘러가게 하면서도 후타로, 키요미, 타마(고양이)의 부동한 캐릭터들은 극 중 장면을 통해 삶과 인생, 생명과 죽음, 가족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장면의 구도와 연출적인 배치를 보여주었고, 후타로 가족으로 분한 배우들도 거칠면서도 개성 있는 캐릭터를 살려냈다. 극단 58번국도의 네 번째 작품은 연기파 배우인 고수희와 산초 이근희 배우의 콜라보 2인극, 혹은 두 배우가 중심인물이 되어 극을 이끌어가는 일본 희곡의 무대화를 기대하게 만든다. 극단 58번국도의 방향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계획이 아닐까 싶다. “후타로!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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