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서울 신포니에타 기획 및 연출
극단 듀공아, 외계 공작소, 동맹, 아레떼 연출부 드라마투르그
정상에 오르기 직전, 지난 여정에서 놓친 것들을 되짚어보는 다섯 번째 시간이다.
이번 연재의 주인공은 파우스트 연재에서 가장 많이 등장했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다. 파우스트와 관련된 그의 여러 작품 중 비교적 덜 알려진 합창곡인 ‘Chor der Engel(천사들의 합창) S.85’을 희곡, 음악 그리고 연출의 세 결로 해부해 보자.
먼저 텍스트는 파우스트 비극 2부의 말미인 ‘매장(Grablegung)’이다. 독일어 원문의 11,604행부터 11,843행까지로, 이 전 장에서 파우스트가 죽고, 이후 장은 장대한 파우스트의 마지막 장인 ‘심산유곡(Bergschluchten)’이다.
매장의 장은 레무르들의 짧은 독창과 합창으로 시작한다. 내기에서 승리한 메피스토펠레스가 의기양양하게 악마들을 불러들여 죽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데려가려 한다. 그때 하늘에서 천사들의 무리가 나타나고 악마들은 겁을 먹는다. 이어서 천사들이 장미꽃을 뿌리며 노래하는 구원의 합창과 짜증과 분노가 폭발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가 교차한다. 조금씩 악마들과 메피스토펠레스를 몰아내면서 무대를 완전히 장악한 천사들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데리고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 이후 약탈물을 빼앗긴 메피스토펠레스가 신세 한탄을 하며 장면이 끝난다. 이를 아래의 표로 정리했다.
1번에서 등장하는 레무르(Lemur)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하인 노릇을 하는 작은 요괴 무리다. (쉽게, 영화 ‘찰리의 초콜릿 공장’의 난쟁이 움파룸파 족을 생각하면 된다.) 독창(solo)와 합창(chor)을 번갈아 하며 분위기를 잡는다. 이후 2번부터 18번까지 짝수 번은 모두 메피스토펠레스의 대사인데, 잘 알다시피 괴테의 대사는 단순한 산문이 아니라 각운이 맞아떨어지는 세련된 운문이다. 그 사이 홀수 번은 천사들인데, 자세히 보면 3번의 ‘천사의 무리(Himmlische Heerschar)’, 11, 17번의 ‘천사들(Engel)’, 5, 7, 9, 13, 15번의 ‘천사들의 합창(Chor der Engel)’로 구분된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3번 ‘천사의 무리(Himmlische Heerschar)’는 운문이지만 노래는 아니다. 그리고 11번 ‘천사들(Engel)’은 천사들을 두려워하는 메피스토펠레스를 놀리기 위한 조롱이다. 마지막 17번 ‘천사들(Engel)’은 함부르크 판본(1948)에는 없고 프랑크푸르트 판본(1969)에는 추가된 부분으로, 역자 전영애는 원고 필사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한다.
괴테의 희곡 지시문에는 천사들이 무대 높은 곳에서 장미꽃을 뿌리며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 사이사이에 메피스토펠레스는 무대 위 즉, 땅으로 쏟아지는 꽃들과 합창을 홀로 감내하며 온갖 불평을 터뜨린다. 그렇게 합창과 대사를 여덟 번 주고받으면, 어느새 검고 음침한 매장의 무대는 흰 천사들로 가득 메워진다. 무대를 상하로 나누어 천사와 악마를 대비시키고, 인물(천사)의 수를 늘려 선이 악에 승리하는 설계다. 여기에 음향적 효과까지 덧붙인다. 독창은 합창을 이길 수 없고, 운문은 노래에 압도되기 마련이다. 괴테는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운문 독백을 주고, 천사들에게는 노래를 합창하게 함으로써 극적 장면에 청각적 효과를 더한다. 극작가 괴테의 멋진 연출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음악을 살펴보자.
리스트의 ‘Chor der Engel(천사들의 합창) S.85’은 혼성 합창단과 피아노 반주를 위한 약 12분 길이의 곡이다. 리스트는 괴테의 원문 중 표의 5, 7, 9, 13, 15번에 해당하는 부분만 가사로 선택했다. 음악 제목처럼 괴테가 ‘천사들의 합창(Chor der Engel)’이라고 명기한 부분의 원문만 따온 것이다. 홀수 번에 해당하는 레무르와 메피스토펠레스는 당연히 없고, 천사들의 대사인 3번과 11번도 빠졌다. 아마도 3번은 합창이 아닌 이유로, 11번은 산문인 이유로 뺐을 것이다. 그리고 17번은 당시 리스트가 읽었던 판본에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리스트의 음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그 도막들을 괴테 원문과 나란히 놓으면 위 표와 같다. (원문의 임시표기 번호와 음악의 순서가 헷갈릴 수 있으니, 음악의 구획은 [1], [2], [3], [4], [5]로 표기하겠다.) 아래 링크를 참조해 차분히 들어보자.
https://www.youtube.com/watch?v=9OJ0iFuF4pI
[1] 0’00’’~2’45’’ 부분은 괴테 텍스트의 지시문 ‘천사들이 장미꽃을 뿌리며.’로 시작한다. 리스트는 피아노의 우아한 아르페지오로 30초 동안 장미꽃을 날린다. 매장의 음침한 분위기가 완전히 가시면 여성 합창단이 피아노 반주 위에 ‘장미’와 ‘향유’ 그리고 ‘날개’를 얹는다. ‘서둘러 피어라(Eiler zu blühn)’을 반복한 후 두 번째 연을 한 번 더 반복하며 ‘봄’과 ‘낙원’을 강조한다. 짧은 피아노 간주가 포근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2] 2’57’’~4’30’’ 부분은 [1] 부분을 미세하게 고양한다. 괴테의 텍스트 7번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가사의 내용이 불꽃, 사랑, 희열, 정기로 상승하기 때문이다. 피아노의 물결이 점점 거세지다가, 마지막 행 ‘어디서나 환한 날(Überall Tag)’에서 소프라노의 간지러운 고음이 절정을 이룬다. 피아노가 합창의 희열을 받아 빛이 산란하듯 마무리한다.
[3] 4’40’’~6’20’’ 부분의 원문은 짧은 8행인데 리스트는 이를 다시 앞 6행과 뒤 2행으로 나눈다. 앞 6행은 남성 합창이 돌진하듯이 치고 나온다. 피아노도 포르테로 행진곡풍 리듬을 강타한다. 괴테 원문의 내용이 경고와 훈계이기 때문에 여기서 천사들은 하느님의 강인한 군대가 된다. 하지만 마지막 2행에서는 다시 부드러운 천사의 모습이 소프라노와 알토 음역으로 나타나 ‘사랑은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을 / 인도해 들이느니! (Liebe nur Liebende / Führet herein!)’를 지복의 선율로 봉헌한다. 리스트는 이 부분에 공을 많이 들였다. 이 두 행(11751, 11752행)은 비극 파우스트를 끝맺는 마지막 두 행(12110, 12111행) – 신비의 합창(Chorus Mysticus)이 부르는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 우리를 이끌어가네. (Das Ewig-Weibliche / Zieht uns hinan.)’와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리스트는 마지막 4마디 부분에 잠시 사라졌던 남성 파트인 테너와 베이스를 불러내 소프라노와 알토의 선율에 살포시 얹는 음악적 연출을 넣었다.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이 두 행을 세 번 반복한 후 피아노가 선율을 이어받아 아늑하게 마무리한다.
이후 약 1분 동안 합창 없이 피아노의 연주가 이어지는데, 당대 최고의 피아노 실력을 자랑하던 리스트가 이 부분을 그냥 간주로 남겨 둘 리 없다. 왼손 저음부는 계단을 오르듯 점차 음정과 음량이 점점 상승하고, 오른손 고음부는 태양에 가까워진 듯 광휘를 눈부시게 뿜어낸다.
[4] 7’18’’~8’19’’의 합창은 피아노 연주의 절정부에서 남녀 혼성으로 터져 나온다. 고양과 거룩으로 가득 찬 공간에 이제 메피스토펠레스가 설 자리는 없다. 이후 마지막 행 ‘복되도록(Selig zu sein)’에서 피아노까지 절정에 치닫고는 잠시 숨을 고르는 간주가 이어진다.
[5] 8’56’’~11’26’’는 파우스트 원문의 15번 부분으로 앞의 4행에서 점점 고조되는 음악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데리고 가는 천사들을 묘사한다. 뒤 4행 ‘모두가 하나 되어(Alle vereinigt)’에서 곡의 박자가 빨라지면서 영광과 환희의 분위기가 연출되는데,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4악장의 숭고함이 연상된다. 이어 마지막 행 ‘정신은 숨 쉬어라. (Atme der Geist.)’를 테너가 선창하고 이어서 베이스가 받은 다음 소프라노와 알토가 가세해 총주로 곡을 마무리한다.
비록 괴테는 파우스트 비극 2부가 무대에 올라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수많은 작가, 연출가, 화가, 작곡가에게 지대한 영감을 주었다. 그 중 프란츠 리스트는 유별났다.
평생 자신의 창작력을 파우스트에게 빗대고, 초절적인 피아노 연주 실력을 메피스토펠레스에 빙의했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 그의 남다른 괴테 사랑은 잘 알려지지 않은 ‘Chor der Engel(천사들의 합창) S.85’ 같은 곡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매장 장면에서 괴테가 의도한 무대 연출은 죽은 파우스트의 영혼을 데려가려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악마 부대의 ‘흑(黑)’을 천사들의 ‘백(白)’으로 씻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화의 벡터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영혼을 거둔 다음 다시 위로 올라가는 방향이다. 리스트는 이 장면의 색감과 정화의 벡터를 음악적 연출로 구현했다. 작곡가 리스트는 극작가 괴테가 남긴 텍스트를 이해한 차원이 아니라, 희곡인 파우스트의 무대 연출적인 면을 꿰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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