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충일(연극 평론가)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다는 지하철 중앙로역 6번 출구를 나온 관자(觀者). 사무실이 모여 있는 회색빛 칠을 한 빌딩을 지나,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은행동 음식거리 옆 골목에 자리 잡은 소극장 상상아트홀(04.27.PM:4)로 들어선다. ‘자기 자신이 곧 관객이자 감독이며 배우인 세상에서 내가 아는 나 자신이 나올 때까지 그래도 어떻게 되는지 끝까지 보고 싶다’는 관극의 심보를 달래고자 계단을 오른다. 그는 왼쪽 벽면에 붙어 있는 극단 이화의 <코뿔소>(이오네스코 원작/최석원 연출) 포스터를 바라본다. “뭐지, 웬, 코뿔소?” 물음표들이 발밑으로 쏟아진다.
지금까지 ‘사람들이 코뿔소로 변신’하는 이 작품을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부딪친 ‘광기의 이데올로그(나치즘·파시즘)의 폭력성’, ‘다수가 곧 진실이 되는 집단심리’ 그리고 ’동물과 인간사이의 경계(境界)론적 존재’에 대한 서사적 메타포로 접근 해 왔다. 그러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말처럼 어떤 절대적인 판단기준이 있기보다는 그때 그 때 관자의 개인적인 상황과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치는 바뀐다. 오늘은 코뿔소라는 난폭하고도 파괴적인 동물의 등장으로 인해 일어나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모두가 코뿔소로 변한 세상, 당신 홀로 인간으로 남은 것인가?’를 묻는 부조리한 연극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
줄거리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하늘이 맑은 화창한 여름, 일요일 정오 무렵 힘찬 발굽 소리와 거친 숨소리를 내는 코뿔소 한 마리가 광장에 출몰한다. 사람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코뿔소에 호기심이 발동해 진위여부, 생김새 등을 두고 실체 논쟁을 벌인다. 코뿔소의 등장을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던 이들은 어느새 이마에 혹이 나고 피부는 녹색가죽으로 변해 하나둘 코뿔소 무리에 합류하게 되고, 급기야 베랑제가 사랑하는 데이지마저 “그들이군요. 즐거운 모습이에요. 그들은 코뿔소 모양이 좋은가 봐요. 전혀 미친 자들처럼 보이지 않아요. 매우 자연스럽게 보여요. 그들이 옳았어요”라고 말하며 코뿔소로 변한다. 주인공 ‘베랑제’만이 인간으로 남길 다짐하며 막이 내린다.
이처럼 작품 속에서는 ‘코뿔소가 되는 병’이 무대를 강타한다. 다양한 인물들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각기 다른 이유를 대가며 코뿔소로 변한다. 인간적인 휴머니즘의 열렬한 옹호자인 ‘장’은 “누구나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있는 거야. 코뿔소도 우리와 똑같은 피조물이거든”, 지극히 이성적인 ‘뒤다르’는 “이해하는 것, 그건 곧 정당화하는 것이지.”, 객관적인 논리성을 중시하는 ‘보따르’는 “자기 시대를 따라야 해‘라고 자기합리화하며 코뿔소로 변한다. 그러나 코뿔소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끝가지 사람으로 산 베랑제는 ‘모두가 미친, 병든, 모두가 환자인’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맞서 나를 방어하겠어! 난 최후의 인간으로 남을 거야. 난 끝까지 남겠어! 항복하지 않을 거야!”라며 다짐한다. 세상과 자신에 대해 어떤 숙고도 하지 않고 바람 따라 날아다니는 삶, 즉 캐물음 없는 삶은 무가치하다. 하여 삶의 다양성은 ‘사람’이라는 지위를 포기하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더없이 허술해 보이고, 가장 사람 냄새나는 등장인물 ‘베랑제’ 를 통하여 생각하는 인간,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는 ‘최후의 인간’은 위대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누구나’이다. 최석원 연출은 무대 위의 현실로 펼쳐내는 다층적 극적 조형력을 통해 새로운 희곡문법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때 놓치고 싶지 않은 극적 아이디어는 얇은 금속성 재료로 제작된 듯싶은 ‘코뿔소 캐리커쳐’를 쓴 즉 ‘변신’한 등장인물들의 딱딱한 기계적 동작(acting)이다. 이 행위는 조용한 마을에 갑자기 코뿔소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이 하나둘 코뿔소로 변해가는 모습으로 전이된다. 여기에서의 변신은 탈피나 진화가 아니라 인간성에서 동물성으로, 혼돈으로, 문명의 상태에서 자연의 상태, 원초적 공격성의 상태로 가는 이미지로 변화한다. ‘인간-동물 되기’라는 괴상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숨겨진 욕망과 충동이 드러나고, 이 환영의 이미지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 가까이 존재하는가를 확인하게 해준다. 이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개성을 잃고 맹목적인 믿음으로 군중 속에 얼마나 빠르게 매몰되어 가는지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간단한 세팅 같으면서도 분위기는 암울하고 알 수 없는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 무대 공간. 1막의 ‘카페 테라스’라는 거리의 열린 공간에서 2막 ‘베랑제의 사무실’과 ‘장의 집’, 3막 ‘베랑제의 방’과 같이 좁은 수동적 공간으로 닫힌다. 이렇게 디자인 된 작품 속 무대는 단순히 세상의 재현이 아니라 인물의 외부에 놓여있는 하나의 심상이요,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며, 이데올로기의 전염으로 파괴된 그로테스크한 세계를 드러내면서 인간의 공간을 점점 축소시킨다. 동시에 공포에 사로잡힌 인물들이 강박과 불안과 악몽이 뒤섞인 내적 모험의 투사체로서 적절히 배치된다. 그 결과로 장소가 주는 분위기는 드라마에 집중도를 높여주고 극적인 시각효과를 두드러지게 해준다.
이번 연극은 소극장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2시간 30분(인터미션 포함)이 넘는 작품이기에 배우들은 시작부터 체력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 그럼에도 ‘상황의 본질은 보지 못한 채, 피상적인 언설(言舌)에만 집중하는 무게 중심 없이 부유하는 무기력한 현대인의 부조리한 모습’을 애써 드러낸다. 연기자들의 대사는 ‘횡설수설’, ‘말놀이’, 모순되는 말들의 조합‘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단순 소박한 의상이나 간단한 분장으로 코뿔소가 되어가는 과정을 열연하면서 보여준 배우들의 연기는 박수 받아 마땅하다. 선명한 발성과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 목소리와 몸짓의 변화만으로 관객에서 자연스럽게 코뿔소로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짧은 연습시간임에도 단정한 연기 방식을 긴장감 있게 펼친 앙상블은 지금도 기억하고 싶은 잔음으로 남아있다.
특히 1막 1장은 더 없이 나약해 보이는 ‘베랑제’, 의기양양한 ‘장’의 두 인물의 서사, 도심 속에 코뿔소가 나타난 사람들의 반응, 두 번째 코뿔소가 고양이를 밟아 죽였다는 것. 그리고 ‘논리학자’라는 인물이 논리가 없는 말을 논리적인 척 너무나도 자신 있게 해서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 이 카오스적인 상황을 동시다발적으로 말하는 ‘소리뭉치’ 화법을 통한 연출로 해결한다. 우리의 일상처럼…. 관객이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봐야 하는 것은 배우들의 모든 한 마디, 한 마디가 아니라 그 ‘상황’이란 지적이다. 보편적이지 않은 연극의 진행방식이기에 혼란스러울 수 있으나,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드리는 관객은 “어? 이거 우리 모습인가?” 하고 눈치를 채게 된다. 그렇게 학습되는 순간 ‘부조리극’은 더 이상 ‘부조리’가 아니라 ‘우리 삶’으로 변한다. 연극 <코뿔소>에서 ‘부조리’는 오로지 코뿔소로 변하는 사람 밖에 없다. ‘치열한 사유와 정열적인 감각을 담금질한 연극적 작업이 깨달음으로 다가온 극적 선물’이다. 함께 축하한다.
80쪽이 넘게 대사로 꾸며져야 하는 태생적 한계를 이겨내고, 무대 장치의 구조물을 최소화하여 무대 위에 4각의 ‘의미의 창고’를 유색 테이프로 동선을 만드는 무대 디자인, 관객의 정신을 흔들어줄 청각적 도구로 ‘일렉기타’를 선정해 정신의 혼란스러움과 센치함 그리고 생각의 잠김을 무대 위에 울린 음악. 대사 분량의 다과에 관계없이 꿈속에서도 대사를 외우며 ‘거울 속의 나와 무대 위의 너’로 변신한 열정적인 배우들의 목소리와 몸짓, 이들이 뿜어내는 ‘극적 생명력’을 ‘극적 아름다움’으로 조율한 ‘수렴과 확산의 연출’, 공연 내내 ‘외로운 섬의 마중물’로 극장을 찾아준 관객들의 박수. 이런 요소들의 ‘뫼비우스의 띠’ 같은 연결은 어렵고 낯설게 다가오던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코뿔소>를 ‘다시 보고 싶은 연극 리스트’에 자리매김하도록 이끌었다.
오늘도 “‘예술’이라는 것은 ‘내가 연극을 하는 행위와 내가 느끼는 것’에 ‘관객들이 느끼는 감정과 상대방이 느끼는 것’이 더해져 만들어진다는 다짐을 갈고 닦는다는 극단 이화의 단원들. 그러하기에 그들은 ‘지금, 여기’서 ‘포기할 것들은 계속해서 포기해가며, 절대 포기 못하는 것들은 어떻게든 표현하기 위해 애쓰며’ 괴롭지만 즐겁게 무대를 지키고 있다. 덧셈과 뺄셈의 문제에서 배운 적 없는 이차방정식 문제를 풀어내듯 사유하면서 연극 마당에서 신명나게 춤추는 광대들과 관객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덧붙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