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6)

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클래식 연주회 기획

 

 

부록 여섯 번째로 2022년 10월 ‘100~200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괴테 파우스트의 정경(Szenen aus Goethes Faust)’로 소개한 바 있는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다른 작품을 알아보자.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던 슈만은 조증 시기였던 1849년에 실러, 팔러스레벤, 헵벨, 뫼리케 등 다양한 시인의 작품에 짧은 음악을 붙이는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 달 반 만에 29곡을 완성하여 어린이를 위한 노래 앨범 (Liederalbum für die Jugend)’ Op. 79를 출판한다. 그가 선택한 시 중 팔러스레벤이 작품이 총 10편으로 가장 많고, 괴테의 작품은 세 편 포함되어 있다. 이 중 파우스트를 텍스트로 작곡한 작품은 제28곡 탑지기 린케우스의 노래 (Lied Lynceus des Türmers)’다. 

 

탑지기 린케우스의 이미지. 우측 사진은 Peter Stein 연출의 파우스트 비극 2부. (2000, 하노버)

 

린케우스는 천리안(千里眼)의 파수꾼으로 그리스 신화 아르고호 원정대에서도 망을 보았다. 괴테 파우스트 비극 2부의 매우 중요한 조연으로 2막에서 이름이 언급되고, 3막과 5막에 등장한다. 3막에서는 아주 멀리 있는 헬레나의 아름다운 자태에 눈이 멀 뻔하고, 마지막 5막에서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을 아름답게 추억하며 곧 어두워질 미래를 노래한다. 

 

(위 텍스트는 ‘도서출판 길’에서 2019년에 펴낸 ‘파우스트 2’ (옮긴이 전영애)를 참고했다.)

 

비극 2부 5막 3장 깊은 밤의 도입부에서 린케우스가 부르는 노래는 11,288행부터 11,337행까지 총 50행으로 두 번의 휴지를 갖는 긴 운문이다. 위에 인용한 텍스트는 이 중 처음부터 첫 번째 휴지까지 총 16행(11,288행~11,303행)이다. 인용하지 않은 노래의 마지막 부분은 긴 휴지 후 두 행(11,336행~11,337행)인데 예전에 볼 만하다 했던 것수백 년 세월과 더불어 사라졌구나로 끝난다. 

 이 노래 다음 4장에서 파우스트는 근심에 의해 눈이 멀고, 5장에서 마지막 대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를 말하고 죽는다. 그리고 마지막 7장 심산유곡에서 파우스트는 구원받고, 거대한 비극이 끝난다. 

 즉, 린케우스의 노래에는 이후에 벌어질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극작가 괴테는 먼 곳이라는 공간과 미래라는 시간까지 볼 수 있었던 그의 눈을 통해 결말을 암시한다. 린케우스의 눈은 시공간을 초월해 만물을 보았던 파우스트의 눈이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 눈이 곧 감기려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KmDvAs8J_G8

 

슈만은 괴테 원문의 앞부분에만 음악을 붙여 3분 남짓한 가곡을 만들었다. 괴테가 원문에 노래한다.라는 지시어를 써놓았고, 대사 자체가 각운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운문이기 때문에 슈만이 텍스트에 음을 붙이는 것은 무척 수월했을 것이다. 성악이 잠시 쉬는 부분에서 피아노가 린케우스의 뿔피리 또는 종탑 소리를 흉내 내는 부분이 재미있다. 그리고 파우스트의 마지막 대사 멈추어라, 너 참 아름답구나! (Verweile doch, du bist so schön!)’를 강력하게 암시하는 그건 무엇이었든 다 참 아름다웠어! (Es sey wie es wolle Es war doch so schön!)를 곡의 마지막에 두 번 더 강조한다. 

 그런데 이게 전부다. 슈만은 이 중요한 텍스트에 딱 만 보탰다. 아무리 어린이를 위한 곡이라지만 22마디 정도의 악보는 단순하기 짝이 없고, 편평한 선율이 한 마디 또는 두 마디씩 반복된다. 피아노 반주는 성악의 음정과 박자를 동시에 복사할 뿐이어서, Lied(예술가곡)라 칭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결정적으로 도돌이표를 사용해 지루한 전체 19마디를 한 번 더 노래한다. 

 

 슈만은 괴테의 연출 의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린케우스의 노래는 파우스트가 시력을 잃는 4장과 최후를 맞이하는 5장의 비극적 서곡이다. 그런데 슈만의 음악은 너무 힘차고 희망적이어서 음악과 가사가 어우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괴테의 원문에서 보다 (Sehen, seh’, gesehn)’, ‘눈 (Augen)’이 주요 시어인데 슈만의 노래에서는 전혀 강조되지 않는다.

 

 

슈만의 가곡 탑지기 린케우스의 노래 (Lied Lynceus des Türmers)’는 괴테의 깊은 의도를 담아낼 시도조차 없고, 음악적으로도 성의가 없는 졸작이다. 아무리 어린이를 위한 평이한 곡이라지만 원작자인 괴테와 극의 흐름을 무시한 처사다. 덧붙여 어린이조차 이 음악을 재미없어할 듯하다. 신중한 성격에 문학적 조예도 깊었던 슈만이 왜 이런 형편없는 작품을 썼을까? 아마도 평생 그를 괴롭힌 양극성 장애의 병세가 조증으로 악화했을 때 너무 조급하게 곡을 완성했기 때문이 아닐지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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