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의 특성

글_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순천향대 명예교수)

 

‘연극’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배우가 각본에 따라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말과 동작으로 관객에게 보여 주는 무대 예술”이라고 나옵니다. 또 조금 더 자세히 “일정한 공간에서, 제한된 인물들의 대사와 동작을 주된 수단으로, 일정한 사람들에게,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한정된 시간 내에, 직접, 단번에 표현 ․ 전달함을 성립 요건으로 하는 예술 형태”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이런 설명을 보면 연극의 구성 요소가 모두 들어 있습니다. 과거 연극의 3대 요소니 4대 요소니 하는 표현을 많이들 썼지만 너무 지식 중심으로 접근한다는 반성과 함께 되도록 구성 요소나 필수 구성 요소 정도의 표현을 쓰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요소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는 남습니다. 참고로 현행 고등학교 연극 분야 교육과정이나 교과서에서는 배우, 관객, 무대, 희곡을 연극의 구성 요소로 들고 있습니다. 이때 배우, 관객, 무대는 순서를 따지지 않지만 희곡만은 꼭 뒤에 놓도록 하고 있습니다. 배우는 뭔가 보여 주고 들려주는 사람이고, 관객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고, 무대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가 만나면 일단 연극은 이루어진다고 봐도 됩니다. 그러니까 어디선가 누군가가 누구에겐가 뭔가를 보여 주고 들려주는 게 연극이라는 얘기입니다.

물론 희곡도 연극의 필수 구성 요소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위의 정의에서 “각본”이나 “어떤 사건이나 인물”이 바로 희곡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인데, 희곡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 말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전의 설명대로 “공연을 목적으로 하는 연극의 대본”이라면 상당히 폭이 넓은 것이지만, 문학의 한 갈래로서 일정 수준 이상의 짜임새를 필요로 한다면 그만큼 까다로워지는 것이겠죠.

어쨌든 희곡은 연극을 잘 만들기 위한 일종의 계획서입니다. 앞의 정의에서 “무대 예술”이나 “예술 형태”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바로 “예술”이 되도록 하기 위해 치밀하게 짜놓은 계획서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렇게 눈에 보이게 글로 쓴 계획서가 없어도 연극에는 항상 계획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시 말해서 희곡 없이 머릿속 계획만으로도 연극은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아이들의 놀이야말로 가장 초보적인 형태의 연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객이 없으니까 완전한 연극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내용물만은 상당히 연극적인데, 거기에도 각본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소꿉놀이를 한다 할 때 네가 아버지고 나는 엄마다. 여기는 어디고 이건 무엇이고 지금 우린 무엇을 하고 있다 등등. 이런 약속이 바로 각본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희곡이라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요소로 구성되는 연극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역시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발을 계기로 4가지로 정리하였습니다. 우선 연극은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협업하여 만들어내는 협동예술이자 종합예술이라는 의미의 종합성이 있고, 다음으로 중첩성, 계획성, 현장성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1. 중첩성: 강의와 연극

현재 저는 여러분에게 뭔가를 들려주고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는 그런 일이 벌어지는 장소고요. 그렇다면 이것은 연극입니까, 아닙니까? 아니라고요? 왜요? 연극의 기본 요소가 다 충족됐잖습니까? 네, 맞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연극이 아닙니다. 뭣보다 연극은 허구이기 때문입니다. 허구는 한 마디로 거짓말이란 뜻이죠. 진짜가 아니라 이겁니다. 거짓인줄 알면서 믿어 주기로 약속을 하고 보는 게 연극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 자리는 그렇게 거짓말을 하기 위해 마련한 게 아닙니다. 물론 저처럼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런 강의를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전 거짓말을 하기 위해 여기 서진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진실을 말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짓인줄 알면서 믿어주는 것, 이것을 달리 말하면 허구와 실제가 공존하는 중첩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중첩성은 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해당되는데 이것은 연극을 유지하는 중요한 특성으로 이게 깨지면 연극도 함께 파괴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배우는 사실적으로 연기를 하는 순간에도 이것이 허구란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관객 또한 무대 위 사건에 가슴 졸이고 울고 웃기도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란 것을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만약 그걸 망각한다면 결투 장면에서 상대 배우를 정말로 다치게 할 수도 있고, 관객이 무대 위로 난입해 상황을 중단시키는 사고도 벌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아동극에서 그러한 상황이 많이 벌어집니다. 물론 그런 연극에서 배우들은 미리 그런 상황까지 예측하고 대비할 줄 알야겠지만요.

 

  1. 계획성: 관중이 있는 운동경기와 연극

운동경기도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이 있고 그것을 보는 관중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운동경기를 연극으로 생각하는 분은 안 계실 겁니다. 관중이 있는 운동경기와 연극은 어떻게 다를까요? 한 마디로 각본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연극에는 각본이 있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확히 아는 상태에서 연기를 하지만, 운동경기에는 각본이 없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정확히 모릅니다. 물론 예상은 하지만 항상 의외가 있습니다.

사실 각본이 있으면 큰일 나죠. 승부 조작이니 뭐니가 그런 거 아닙니까. 1960년대 텔레비전 처음 나오고 프로레슬링이 전국적으로 굉장한 인기를 끌었죠. 매일 밤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텔레비전 있는 집에 모여 프로레슬링 시합을 보면서 환호했습니다. 덩치가 작은 우리 선수가 커다란 서양 선수한테 거의 질 뻔하다가 극적으로 승리하는 장면은 정말 감격적이었죠. 그런데 이 프로레슬링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동안의 경기가 모두 각본에 의한 거라는 사실이 폭로됐던 겁니다. 국민들의 분노는 대단했어요. 어쨌든 그걸로 프로레슬링의 영광은 끝났고요.

이에 비해 연극은 미리 계획하고 연습한 대로 해야 합니다. 물론 즉석에서 해내는 즉흥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것도 흔히 생각하듯 아무렇게나 하는 건 아닙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되고요. 우리나라 판소리의 대가들이 즉흥을 하는데 그게 가능하려면 엄청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이더라도 자기가 생각한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즉흥도 그것을 감싸는 더 커다란 계획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걸 모르고 초보자들이 섣불리 즉흥을 하려 했다가는 관객들의 엉뚱한 대답에 말문이 막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는 웃지 못할 촌극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1. 현장성: 영화와 연극

무엇보다 연극은 살아있는 배우가 살아있는 관객들에게 직접 단번에 전달해야 하는 예술입니다. 다시 말해 연극은 현장성의 예술이라고 하는데, 이 현장성 안에는 직접성, 시간성과 함께 일회성이 포함됩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데 연극도 그렇습니다. 영화의 경우 한 번 제작된 필름은 언제 돌려도 같은 작품이고, 또 한 번에 이해가 안 되면 되돌려 다시 보거나 전체를 반복해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연극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공연이라 하더라도, 각각의 공연은 모두 다른 작품으로 간주되며, 다만 거기에 사용된 희곡만이 같을 뿐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희곡은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동일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연극은 대표적인 공연 예술로서 연희 장소(무대)와 연희자(배우)와 수용자(관객)라는 요소가 만날 때 비로소 작품이 형성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희곡을 사용했다고 해도 그 요소들 중 하나만 다른 상태가 되면 다른 작품으로 봐야 하고, 따라서 매 공연이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연극의 경우 통상 일정한 기간 동안 같은 배우들이 같은 희곡을 가지고 같은 무대에 오르지만, 관객만은 공연마다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시간의 경과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는 자연의 철칙을 감안하면, 어제의 배우와 오늘의 배우는 다르며, 어제의 무대 공간과 오늘의 무대 공간 또한 같지 않다고 봐야 하고, 설령 억지를 부려 어제와 완전히 동일한 관객들을 초청했다 해도 그들의 상태가 어제와 같을 수 없으니 연극 공연의 조건은 매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론상으로는 물론 실제적으로도 연극에 있어서 같은 작품의 재공연은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한 번 끝나면 영원히 사라지는 것. 그게 공연 예술의 특징이죠. 물론 비디오에 담아 놓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연극 작품과는 다른 겁니다. 일종의 기록물이거나 다른 종류의 예술로 보아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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