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채승훈(연극연출가)
얼마 전에 한국연극협회(이하 ‘한협’) 정기총회에 대의원자격으로 참석했다. 내가 왜 대의원으로 지명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싶었고 앞으로 단체활동에는 관여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불참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전날 한협 이사장 명의의 문자가 왔다. 내용인즉슨 총회에서 한협 임원 선거를 ‘대의원 간선제’에서 ‘전체회원 직선제’로 바꾸는 정관개정 절차가 있으니 참석하여 협조해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이라면 협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총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날 직선제 정관개정은 대의원 참석률이 저조하여 채택되지 못하였다. 현재의 정관 규정에는 ‘정관개정을 위해서는 재적 대의원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라는 조항이 못 박혀 있었는데 총회 참석 숫자는 그에 훨씬 못 미쳤다.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결국 직선제로의 개정은 그냥 물 건너가 버렸다. 그리고 대의원 참석률이 높은 차기 임원선출 총회에서 논의 의결하자는 의견이 대신 제시 되었다.
만일 차기 임원선출 총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대단히 박수받을 일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난 어렵다고 본다. 대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의원들이 그들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는, 전체 회원 직선제를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앞으로 한협의 미래는 매우 밝을 것이다.
한협이 출범한 1960년대로부터 지금까지 약 60년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연극인들의 의식도 많이 달라졌다. 또 국민의 문화에 대한 인식도 매우 달라졌고 문화 향유에 대한 욕구 또한 그때와는 천지 차이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한협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수년 전에 블랙리스트 참사가 터졌었다. 권력이 예술인들의 입에다가 자갈을 물리기 위해서 자행한 심각한 폭력이었다. 동료들이 큰 탄압을 당하고 재야의 연극인들이 나서서 그에 저항을 해도 한협의 태도는 미온적이거나 애매모호함으로 일관하였다. 심지어는 한협의 임원이 정권의 탄압행위에 부역한 정황까지도 나중에 드러났다. 회원들의 권익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하는 협회가 도리어 그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한 것이다.
작년 말경에는 예술인 교강사 사업에 대한 정부지원금이 절반이나 삭감되었다. 예술인 교강사 사업은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며, 관객 저변 인구 확충이라는 중차대한 목표를 지니고 있다. 강사 중에는 연극만을 업으로 하는 전업 연극인들이 꽤 많이 있다. 정부지원금이 삭감되어 수업일수가 줄어들게 되면 그들의 경제적인 수익도 줄어든다. 그들은 생존권이 걸린 사업지원금의 회복을 위해서 국회 앞에서 시위를 진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런 중대한 일에 한협이 나서서 뭔가 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한협이 이렇게 사사건건 소극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태생적 한계? 그럴 수도 있다. 한협은 60여 년 전 당시 정권에 의해서 예총과 더불어 인위적으로 설립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과 더불어, 현재 한협이 정부지원금으로 지탱하고 있다는 것이 또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부 측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여기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무엇을 택할 것인가. 정부에 할 말은 하는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내부 지원을 위해서 입을 닫는 것일까.
가장 좋은 방안은 이런 햄릿의 고민과도 같은 경우를 정부 측에서 예술계에 아예 주지 않는 것이겠다. 즉,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부 측에서 철저하게 지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정치인들은 매번 선거 때가 되면 예산 증액을 약속하고 장밋빛 공약 들을 내세운다. 하지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입을 닫는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 한마디로 예술인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지원금도 국민의 세금으로 주는 게 아니라 그들의 개인 돈으로 준다는 착각을 하는 것 같다. 그들이 예술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앞으로도 변할 리 없으며 스스로 변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길은 하나다. 그들의 인식을 우리가 바꿔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협은 거느리고 있는 정부지원 사업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하며 명실상부하게 회원들 다수의 권익을 위해서 일하는 단체가 되어야 한다. 그들이 시혜라고 생각하고 주는 지원금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족쇄를 풀어서 던져버려야 한다.
그리고 정부나 지자체의 정책이나 법안들에 적극적으로 의견 제시를 해야 한다. 지원사업들도 정부의 시혜가 아니라 당연히 우리의 권리임을 주지 시켜야 한다.
만일 협회가 지원으로부터 독립하고 회원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단체로 다시금 난다면 그들의 태도도 도리어 달라질 것이다. 절대로 특별한 이유 없이 지원금을 함부로 삭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정치인들도 앞뒤 다른 말들로 우리를 무시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물론, 이에 우려를 표하는 연극인들도 있을 것이다. 가난한 연극계에 그나마 협회를 통해서 사업들이 진행되는데 정부 측에 사사건건 비판하거나 요구를 하면 협회 사업들의 예산이 당장 중단되거나 삭감될 텐데 어떻게 하느냐.
그들 입장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연극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사업들을 유치했을 것이고 지원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라고 해서 예술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정부나 지자체에 머리를 숙이고 찾아다니면서 부탁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헌신을 폄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략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우리는 이제 그런 작은 사업이나 이익들에 집착해야 할 시기는 지났다고 본다. 더 큰 권익을 위해서 움직여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만일 우리의 숙원대로, 국가 문화 예산 2%를 성취하기만 한다면 현재 협회들이 받는 사업지원금 총액의 수십 배가 되는 지원을 전체 회원들이 받게 되는 것이다. 창작지원, 복지혜택 등이 지금과는 차원이 다르게 증대될 것이다. 또 예술인들의 권익을 지키는 법령들이 통과되면 연극인들의 삶도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안정되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예산 증액이나 법령제정 등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떠들고 대들어야 한다. 요새 세상에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누가 지원을 하겠는가. 의사들을 봐라. 그들은 사회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이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상층부다. 그런데도 자기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자사자 덤빈다. 그런데 가장 빈곤하고 어려운 분야인 연극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하다.
이유는 오직 구심점이 없기 때문이다.
정부에 요구안을 강력하게 건의하고 관철하기 위해서는 연극인들이 힘을 가져야 하고, 힘을 갖기 위해서는 한협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전체 회원들이 알고 응원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단합된 힘을 가지고 정부나 지자체에 우리의 요구사항을 당당하게 제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직선제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직선제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 외에도 여러 불합리한 제도, 관행들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선제는 전체 회원들의 단합된 힘을 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 출발점이 된다. 한협은 전국의 만여 명이나 되는 전체 회원들의 힘을 이용할 능력이 있는 단체이다. 만일 전체 회원들의 힘을 합쳐서 목소리를 낸다면 정부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또 그렇게만 된다면 역설적으로 사업들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처럼 직선제가 불가능하던 시기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얼마든지 온라인으로 선거가 가능한 시대이다. 그런데도 과거의 방식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고방식이거나 혹은 소수가 독점하는 작은 이익에 의식이 매몰된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할 것이다.
들어보니 협회 이사장 선거에 드는 돈이 약 일억 원을 훌쩍 넘긴다고 한다. 놀랄 일이다. 돈 없는 사람은 선거에 나가지도 못한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의원들과 함께 하는 회식비만 해도 엄청나다고 한다. 도대체 연극계는 가난한데 선거비는 마치 의사협회 같은 부자단체에 버금간다.
한협은 한협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회비나 내면서 맨 밑바닥에서 고생하는 대다수 연극인의 입장을 되새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