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조훈성 (연극평론가)
제45회 서울연극제 공식참가작 연극 <누에>는 ‘극단 김장하는날’의 신작 작품으로 2003년 제5회 옥랑희곡상 수상작 <관능>과 2020년 국립극단 ‘희곡우체통’에 선정, 낭독회를 거친 <누에>를 한데로 묶은 작품이라 들어서 이번 초연 공연에 대한 관심이 컸다. 특히 조선 성종 대의 폐비 윤씨, 어을우동 등 역사 속 실존인물의 등장은 이전 사극에서도 많이 다루어진 부분이었기에 이번 작품이 새로운 연극적 환경에서 어떻게 다원적이고 다층적인 드라마적 상상을 보여줄 수 있을지 자못 기대가 컸다. 기존 사극에서 다루어진 역사 속의 여성은 보조적이고 매개적인 역할에 국한된 반면에 <누에>의 경우는 오히려 이러한 남성 중심의 구도를 전환시키면서 그 권력에 가려졌던 여성인물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극중 ‘윤’과 ‘동’은 편지로 속마음을 전하며 연중에 단오에만 만날 수 있는 동무 사이라는 설정은 흥미로웠다. 그 ‘인물’의 만남이야말로 플롯의 전개, 사건을 순차적으로 재구성하고, 인과적 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또 두 여성인물 중심의 서사가 궁궐 안팎으로 분배 전개되면서 이들이 비극적으로 조우할 수밖에 없는 사건의 교차점을 마련해야 한다는 점에서 ‘허구의 부담’을 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이 결국 권력의 이산 효과를 왕가의 여성인물들의 주체적인 권력 욕망의 부각을 통해 드러내 보이거나 이에 대비하여 ‘윤’과 ‘동’의 감각적인 사랑의 욕망을 과감하게 선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이 작품의 의도는 뚜렷해진다. 역사극에서의 순응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에 대한 기성 인식을 비틀면서 이들의 권력 투쟁의 시선을 새롭게 읽어내고자 하는 시도와 함께 역사 이면에서 주변화된 여성을 발견하고, 역사의 흔적을 통해 누락된 여성의 목소리를 의미화하고자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연극은 ‘윤’과 ‘동’의 비극적인 삶을 재구성하는데 주력한다. ‘윤’은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궁으로 들어가고 아들을 낳아 중전의 자리에 올랐지만 성종의 냉대로 점점 설자리를 잃어 가는데, 밤마다 들리는 여자의 흐느낌과 비명소리를 찾다가 궁궐 속 친잠실에서 성종과 쌍둥이로 태어난 누이가 갇혀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사실을 안 성종이 ‘윤’을 겁박하면서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 일로 폐비가 되어 사사(賜死)를 받게 된다. ‘동’ 역시, 남편으로 인해 후사를 잇지 못하자 가문에서 씨내리를 강요받고 가출하나 친정에서도 박대를 당하여 갈 곳 없이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한다. 하지만 그녀를 연모하던 월산대군이 동과 성종의 사이를 오해하고 밀고하여 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교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연극은 두 여성의 시·공간을 중심축으로 교차 전개하면서도 보다 비중을 둔 부분은 궁궐 안의 왕가 가족의 암투이다. 성종을 두고, 할머니 정희대비, 어머니 인수대비, 큰어머니 인혜대비의 권력에 대한 욕망을 극화하면서 한편으로 ‘윤’과 ‘동’을 그 이야기에 얽어매어 ‘성종’의 강력한 유교 이념에 입각한 통치질서의 확립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누에’라는 제목은 작품의 심도 있고 치밀한 역사기사의 취재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조선 최초로 시행된 ‘친잠례’(성종8년)의 역사적 의미까지 이 작품에서는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친잠례’가 왕비가 친히 백성들에게 양잠을 권하는 모범을 보인다는 위민관의 반영이 왕실의 권위 상향과 왕권 강화를 의미하고 있으면서, 조선 초기 유교제 기틀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엇보다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남성이 아닌 여성, ‘왕실 여성’이 주관자가 되어 견고한 봉건질서 구축에 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이 작품의 ‘윤씨’의 폐비사건과 같은 비극과 결부된 작가적 상상은 작품의 공감대를 갖게 하는 지점이 될 수 있다. 작품은 이러한 다양한 당대의 인물과 사건의 역사 기사들을 절묘하게 묶어 사실 이면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 존재를 나비가 되지 못한 ‘누에’로 대비시킨다. 마치 빛나는 ‘비단’의 영광을 위해 당대의 권력과 도덕에 의해 죽임을 당해야 하는 한 ‘씨알’의 상징으로 볼 수 있게 말이다. 극중 ‘윤’과 ‘동’이 비단 한복을 입고 ‘그네’를 타는 장면은 누에가 결국 ‘죄의 몸’이란 허물을 벗고 끝내 나비로 날아오르는 것을 상징화한 이미지로 보여질 수 있는 부분으로 작품의 무대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 작품의 작가와 연출은 이러한 ‘누에’의 철학을 작품 전면에 의도적으로 씨줄과 날줄로 짜고 있는지 모른다. 연약한 ‘누에’를 통해 자신의 살을 뱉어내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죽고 또다시 살아나는 깨침의 과정을 이 연극은 ‘침잠실’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윤’과 ‘동’을 통해 여성 주체의 인식은 존속을 위한 연명이 아니라 변화, 변신를 위한 죽음이라는 성찰의 공간을 무대화한다. 결국 비극은 단지 한 나약한 ‘누에’의 죽음이 아니라 약자를 통해 사회적 억압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새로운 세계로의 비약을 위한 고난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 연극이 “빛과 어둠이 공존하듯 현실과 환상, 역사와 허구, 희극과 비극이 실타래처럼 엮여”라는 연출의 말처럼 질서 있고 긴밀한 극적 세계를 창조해내는 데는 다소 그 호흡이 길고, 각 인물의 강렬한 연기가 오히려 ‘윤’과 ‘동’의 존재를 희석해버리는 점이 걸린다. 또 맥베스의 망령들처럼 극중 괴기한 망령이 중복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군더더기처럼 보였다. 작품의 전개에서도 ‘윤’과 ‘동’의 관계보다는 폐비가 된 ‘윤’을 중심으로 ‘친잠실’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면서 극적 서사성에 보다 치중했다면 대단원의 ‘내훈’과 ‘친잠실’에 대한 작의가 보다 잘 전달되지 않았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연극 <누에>는 성종과 폐비 윤씨, 어을우동 등과 익숙한 역사 속 인물을 다루면서 기존의 전형적인 사극과는 다른 연극적 상상력을 뽐내고 있다. 그리고 극중 인물의 시적 언어들은 그 인물의 감정선을 전달하는데 효과적이었다. 극적인 서사성과 함께 사이마다 유희성이 두드러지는 장치도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 덕분에 여성인물을 통해 비극이 갖는 드라마성을 효과적으로 연출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극중 인물의 섬세한 내면의 투사, 그리고 권력에 대한 욕망과 그 비극을 드러내면서 작품은 최종에는 ‘내훈’이라는 금기시된 것들로부터의 해방을 질문하면서 시의성 있는 진정한 의미의 여성 주체의 담론까지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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