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이주영(연극평론가)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 제목으로 우선 들이박는다. <통속소설이 머 어때서?!>(원작 김말봉, 재창작·연출 정안나, 이하 <통속소설>)라는 제목에서부터 통속소설, 더 나아가 그간 폄하의 의미로 사용되었던 통속성에 대한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말끔하기만 한 ‘뭐’로는 약하다. 부호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하여 뭐’를 “머”로 바꾸고, 부호 또한 ‘?’, ‘!’처럼 단독이 아닌 “?!”로 합쳐 사용한다. 제목은 일종의 선언이자 선포이다.
김말봉이 통속의 바로보기에 대해 선언하였다면, 본 연극의 창작주체는 그의 공표를 연극으로 행동화한다. 통속소설 및 통속에 대한 김말봉의 언설들, 그리고 그의 작품 <고행> <찔레꽃> <화려한 지옥> 등이 각색을 거쳐 무대화되면서 폄하의 통속은 빠르게 휘발되고, 지금/여기에 유효한 가치(이미 유효한 가치겠지만)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간다. 이 자리매김에 순수문학이 등장한다. ‘순수문학->죽은 문학->순수귀신’, 이라는 순수문학에서 펼쳤던 동일한 논리 구조(흑백의 구조)를 끌고 와 통속의 가치를 증명해 보이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간 제대로 된 저항 한번 못해보고 순수문학 측으로부터 수많은 공격을 받은 데에서 오는 억눌림의 폭발이라고 이해하기로 한다.
바람 난 남편의 희화화(<고행>), 자본에 대한 욕망과 남녀의 엇갈린 운명(<찔레꽃>), 기생의 기구한 인생과 살인(<화려한 지옥>) 등 무대에 극화한 작품들은 익숙하면서도 흥미본위의 내용들로 가득하다. 이러한 기본틀에 탄탄한 짜임새의 극 전개와 이를 도와주는 군더더기 없는 무대 및 영상처리, 그리고 누구 한 명 연기력 측면에서 누수 없는 배우들의 호연 등이 조화를 이루면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무대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미 세 차례나 공연이 되었음에도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 찼으며, 그곳에서 터져 나오는 연극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매우 폭발적이었다.
<통속소설>이 공연물로서 하나의 브랜드적 가치를 가질 수 있는 데에는 비단 위의 특장만으로 해석하기에는 부족하다. 근대 시기 대중문화적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그리고 이 요소들이 관객들과 함께 호흡함으로써 <통속소설>은 무대와 객석의 견고한 결탁과 작품 완성도를 구축해 나간다.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여 작품의 활력 및 웃음의 강도를 상승시키는 두 해설자의 재치 넘치는 만담, 더 튠의 라이브 무대로 선보이는 근대 시기의 대중음악 등은 근대문화를 과거의 것이 아닌 동시대에도 유효한 문화 콘텐츠가 될 수 있음을 입증해 보인다.
<통속소설>을 다 보고 나면, 후련함이 앞선다. 이미 극 초반부 김말봉의 당당하고 속 시원한 언설에서부터 이를 예견했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통속이라는 가치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건강한 에너지를 제공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이 건강함은 어찌 보면 <통속소설>이라는 연극의 몫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김말봉의 통속소설은 대중들이 요구하는 통속적 요소와 함께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고 요구한다. 그의 작품에는 부끄러움과 반성, 고난에도 꺾이지 않는 인간의 의지, 사회악에 대한 철저한 응징과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개혁 등으로 가득하다. <통속소설>이 연극으로서 통속에 대한 가치를 발견하고 건강한 삶의 에너지를 제공해주었다면, 극의 내용이자 김말봉의 작품은 통속의 프레임을 통해 대중들이 함께하고 나아갈 수 있는 건강한 사회를 강력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두 가치를 하나의 공연물로 완벽하게 완성한 <통속소설>은 그래서 지속적으로 공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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