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 위기에서 탈출하는 방법?

글_채승훈(연극연출가)

 

연극이 우리나라에서 잘 되던 때도 있었다. 1920, 30년대 신파극이나 신극이 유행하던 시대, 1960년대 말이나, 70년대 초 소극장이 활성화되던 시기를 우리나라 연극의 황금기라고들 부르기도 한다.

1980년대는 특별한 시기이다. 군사독재 시대의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대중들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객들은 소극장을 많이 찾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연극을 통해서 서로의 연대감 같은 것을 느끼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작품들도 대체로 그런 관객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들로 채워지곤 했다.

또 그리고 보면,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 석간신문들에는 연극 소개 코너나 특집 기사, 인터뷰 기사들이 큰 사진과 함께 큼직큼직하게 나왔다. 또 공중파 방송에서도 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정규프로그램들이 있었고, 거기에 연극은 주요 소개 프로그램 중의 하나였다. 아침 뉴스 한 코너에서도 일주일에 한번 쯤은 예술인 인터뷰가 있었다.

그즈음 이후, 차츰 관객들은 연극에서 멀어져 갔다. 연극인들은 그런 이유를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소극장을 찾지 않게 된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또, 일부 연극인들은 그 이유를 연극인 스스로에게 있다고 하기도 한다. 연극의 상업화, 질적 저하라는 언급도 하고 과거 연극들의 지적이며 고상한 무대, 연기 등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탄하기도 한다.

근래에 들어서는 점차 불황, 무관심의 도를 더해간다. OTT, 버라이어티쑈, 유튜브, 케이 팝을 비롯한 새로운 문화 주류의 등장, 거리의 수많은 이벤트, 각종 테마파크 등등의 환경은 연극을 더욱 골방에 처박고 있다. 지금 시대는 연극의 위기라는 흔한 말보다는 그냥 암흑기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다. 관객들은 물론이고 언론, 방송의 관심에서도 완전히 밀려났다.

하지만 그런 위기의 이유를 일시적인 시대 상황이나, 연극계 내부상황으로만 볼 수 있을까? 아니라고 본다. 과거 역사의 흐름을 보면 오늘날의 막다른 위기는 이미 예정되어있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연극이 유일한 대중의 해방구였다. 모든 시민이 디오니소스 극장에 모여서 며칠씩 연극을 보았다. 연극만이 대중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역사는 적어도 매체가 발명되고 보편화 되기 전인 20세기 중엽까지 이어져 왔다.

매체가 발달하고 새로운 즐길 거리가 여러 개 생긴 다음부터는 확 달라지기 시작했고 연극은 급속도로 관심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티브이 드라마나 영화를 비롯한 여러 대중문화나 인기스포츠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많이 빼앗아갔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점차 사람들의 기호는 연극 같은 과거 예술에서 멀어져갔다. 이런 흐름은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어느 나라든지 연극은 이제 뒷방늙은이 대접을 받는다.

그런데 위기에서 약간 비켜 난 경우도 있다. 국립, 시립의 공공극장들, 기업체에서 운영하는 극장 같은 경우엔 그런대로 객석을 채운다. 또 민간극단이라고 해도 상업적 공연물들, 스타시스템으로 제작비를 크게 들이는 작품들, 뮤지컬 등도 위기라고는 하지 못하겠다.

뭐니뭐니해도 오늘날 가장 막다른 위기에 몰린 것은 영세한 자본으로 제작하는 순수 민간단체들일 것이다. 사실 그 단체들이 한국연극의 영욕을 함께 하면서 잡초처럼 연극의 본질을 지켜온 극단들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관객들의 관심에서 매우 멀어진- 비포장도로 옆에 먼지만 잔뜩 쓰고 눌러앉은 옛날식 구멍가게의 모습으로 전락하였다. 그들의 연극은 얼마 안 남은 매니아들에게만 호소하는 작은 예술이며 그에 종사하는 연극인은 아날로그 시대에 사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나마도 극장엘 가보면 교양과목 레포트 쓰는 대학생들, 연극과 학생들, 연극인 동료들이 객석을 거의 다 채운다. 집안 잔치인 것이다.

연극인들도 스스로를 낮춘다. 티브이에 나와서 연극인 출신 배우들은 한결같이 연극 하던 시절을 무명시절이라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조금은 낯이 뜨겁다.

어쩌면 요즘의 젊은 연극인들에게 연극은 tv 탤런트나 영화배우가 되기 위한 연기학원으로 전락해버린 것 같기도 하다. 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도 연극 현장으로 오는 것은 실패한 경우이고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은 성공이라고 여기는 게 현실이다. 대학 연극과도 그냥 연기학원일 뿐이다.

극단을 운영하는 연극인들도 주체성이 저만큼 사라졌다. 거의 모든 극단이 지원금에 목을 맨다. 연말 연초가 되면 지원심사에 신경을 집중한다. 통과되면 기뻐하고 떨어지면 낙담하고 공연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제작비가 무척 늘어나서 지원금 없이 공연하기란 무척 힘들어졌다. 혹 지원금을 받아서 공연을 하게 되면 모든 자본과 정성을 쏟는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앞으로는 그 위기가 더할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더 자극적인 것들이 개발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봇이나, 에이아이, 홀로그램, 가상현실 등등 이제는 기존의 것보다 훨씬 더 대중의 관심을 받는, 차원을 뛰어넘는 대중 친화적인 요소들이 나타날 것이다. 아마도 대중이 연극을 찾는다면 그것은 얼마 안 남은 매니아들이 전부 다일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민간단체들의 연극이 존속될 수 있을까? 제작비는 늘어가고 부담은 가중 되는데 민간극단들이 이런 만성적 위기를 탈출하는 방법은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자.

공공 지원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공공 지원은 위기 탈출을 위해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방법이다. 창작지원금 확대. 복지혜택 확대, 소극장 지원 확대 등등의 지원 정책은 위기를 완화 시키거나 늦출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한없이 지원금을 늘려나가는 것은 국가 예산의 문제도 있고 다른 분야와의 형평성 문제도 있다. 이 시대에 연극만 어려운 게 아니다. 또 만일 지원 정책이 크게 확충되어서 창작이나 복지가 잘된다면 연극계로 유입되는 인구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럼 결국 모자람의 문제는 또 발생한다. 지원금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해결이 안된다.

그럼에도 탈출구는 있을 것 같다.

뜬금없는 소리 같지만, 현재로서의 유일한 방법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을 비운다. 무슨 뜻인가. 위기를 인정하는 것이다. 위기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민간극단의 관객 감소 현상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이 분산되는 것, 또 복잡한 현대에 극장에 모여서 연극을 본다는 것이 이제는 과거처럼 흥미로운 행위가 아니라는 것과 이 시대에 걸맞는 연극의 위치나 관객수효 등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민간극단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별화된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예술적인 부분이어도 좋고 관객과 만나는 방법이어도 좋다. tv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흥미롭고 자극적이며 재미있다. 대중들은 막장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잘들 본다. 연극이 눈앞에서 배우들과 직접 만나 호흡한다는 장점만 내세우기엔 부족한 시대이다. 자본력을 앞세운 영화, tv, 뮤지컬, 스타시스템의 연극, 공공극단의 연극들을 유사한 방법으로 당해낼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초저예산 제작방식으로 자본종속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또 강력한 동인제 방식을 되살려야 한다. 이건 과거부터 위기 탈출의 방법으로 간혹 언급되던 것이다. 초저예산으로 제작하면 자본에 휘둘리지 않는다. 비인 무대, 가난한 연극으로도 충분한 연극을 만들어야 한다. 관객이 민간극단의 이러한 제작방식을 처음부터 알고 들어오는 연극을 지향해야 한다. 입장료도 대폭 낮춰야 한다.

부족하나마 위의 방법들을 택할 때 민간극단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나마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배우들도 자부심을 지니고 나중에 어디 가서 연극하던 때를 무명시절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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