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홍혜련
공연은 피투성이가 된 로즈(조어진 분)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수십 년 만에 만난 탓에 그를 알아보지 못한 헤이즐(윤미경 분)의 실수로 코피가 났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셔츠까지 흠뻑 적신 피의 양이 적지 않다. 무려 38년 만에 옛 동료 부부의 집에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선 로즈. 그녀는 왜 그들 앞에 지금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까.
일종의 미스터리극 같이 전개되는 이 공연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60대의 은퇴한 핵물리학자들이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나 다소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 보이는 로즈와 헤이즐이 겨우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로빈(권정훈 분)이 외출에서 돌아온다. 이윽고 셋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피어난다.
핵물리학자였던 헤이즐과 로빈, 로즈가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핵발전소가 있다. 바로 이들이 그 핵발전소의 건설에 직접 참여했다. 그런데 이 핵발전소가 얼마 전 터져 버렸고, 은퇴 후에도 핵발전소 바로 근처에 살고 있던 헤이즐과 로빈은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이와 관련이 있는 듯 없는 듯, 셋의 대화가 이어지면서 그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과거 애정사가 드러난다. 헤이즐은 과거, 로빈과 결혼하기 전 그가 로즈와 연인 관계임을 알았지만 결국 그와 결혼했다. 헤이즐은 단정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다. 나이가 든 지금도 건강을 위해 매일 요가를 하고 샐러드를 챙겨 먹는다. 핵폭발 사고로 집을 떠나기 전 집을 단장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런데 핵폭발의 여파로 집이 엉망이 되어 버리자 헤이즐은 그제야 더 이상 이 집을 쓸고 닦고 치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로즈에게 고백한다. 언뜻 노년이 된 이들이 해묵은 과거를 되짚는 이야기로 보이던 공연은, 마침내 로즈가 이들을 찾은 진짜 이유가 밝혀지며 충격적인 선회를 한다.
이 연극은 곳곳에 엉망진창의 이미지를 배치한다. 이 상징은 ‘똥’을 통해 극대화된다. 로빈과헤이즐 사이에서 어색해하던 로즈가 이를 피하려는 듯 화장실로 가자, 화장실에 들어간 로즈에게 헤이즐이 느닷없이 똥을 싸면 안 된다고, 그러면 하수구가 막혀서 집에 똥이 넘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헤이즐은 로즈가 화장실에서 돌아온 후에도 혹시 똥을 싼 건 아니냐고 집요하게 따져 묻는다. 그런데 똥을 싸지 않았다고 한 대답이 무색하게도, 로즈가 똥을 쌌음이 후에 드러나고 집 앞마당에는 오물이 넘친다.
최근 기후 변화로 인한 우울증이 전 세계적으로 젊은이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지금 무엇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돈도, 정치도 그 무엇도 아닌 기후라고 호소하는 다음 세대의 외침에 이 사태의 주범인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눈을 돌리고 있다. 내가 싼 똥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어 온통 난리가 났는데 그 똥을 결국 우리의 아이들이 치워야 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 공연은 관객들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이다.
로즈는 질문하고, 설득한다. 우리가 일으킨 일의 뒤처리는 우리가 직접 해야 하지 않느냐고. 우리 손으로 만든 핵발전소가 폭발했고 그 핵폐기물들을 20~30대 젊은이들이 치우고 있다. 그 젊은이들을 그곳에서 내보내고 우리가 직접 그 일을 하는 것이 맞지 않느냐고. 그렇게 과거 핵발전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설득하러 다니고 있는 것이다. 수십 년 만에 헤이즐과 로빈을 찾은 것도 이 때문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건강한 데다 자기에게 의지하는 자기 자식이 있는 헤이즐에게 병에 걸려 죽어 가는 로즈의 이 제안은 위선적이고 독선적이다. 로즈와 로빈의 일도 그녀는 용서할 수 없다. 헤이즐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차이메리카>, <웰킨> 등으로 국내 연극계에도 잘 알려진 루시 커크우드가 2016년에 쓴 이 작품은 8년이 지난 지금도 바래지 않은 메시지를, 아니 시간이 갈수록 더욱 강렬해질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던진다. 본 프러덕션의 드라마터그 전강희의 말에 따르면, 이 공연은 올해만도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연되고 있다고 한다. 한국 공연이 올라간 8월에는 호주에서만 두 개의 공연이 올라갔고, 이미 내년 라인업에 올라간 극장도 있다고 한다. 이는 이 공연의 메시지에 전 세계가 공감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번 공연만의 특색이라고 한다면, 해외 리뷰를 통해 살펴본 바로는 해외 공연에서는 세 인물을 대부분 그 나이대의 배우가 맡아 한 데 비해 우리나라, 돌파구의 공연에서는 젊은 배우들이 맡아 연기했다. 특히 로즈와 헤이즐의 역할을 맡은 조어진, 윤미경이 눈에 띄었다. 역할과 거리가 먼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공연 초반에는 극으로의 몰입을 방해받는 듯 느끼기도 했으나 공연이 진행되면서 배우들의 호연 덕에 극의 메시지는 더욱 도드라졌다. 연출 전인철은 이 공연을 포함한 돌파구의 최근 공연들에서 ‘재현하기와 재현하지 않기’를 탐구 중이라 한다. 과연 연극은 거리 두기의 미학이다. 그럼에도 다음 번 이 공연이 다시 올라간다면 역할과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의 연기도 보고 싶다. 스스로도 책임이 있는 이 연령대만이 느끼고 표현할 수 있는 책임감의 범위와 깊이는 어느 정도일지 자못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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