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움직이는 그림자 여행단 <와그르르 수궁가>

 

글_오판진(연극평론가)

 

극단 학전은 1991년 3월 개관하여 33년 동안 대학로를 대표하는 공간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나 아동극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진구는 게임중> 등 좋은 작품들을 많이 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연기와 노래 분야에서 수많은 스타가 자라났다. 그렇지만, 김민기 대표의 건강 문제와 재정난이 겹치면서 2024년 3월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학전의 맥을 이어야 한다는 각계 목소리가 모이면서, 문체부 산하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을 맡고, (사)아시테지가 관리하기로 하면서, 어린이와 청소년, 영유아를 위한 공연장으로 거듭났다.

<와그르르 수궁가>는 극단 학전이 아르코꿈밭극장으로 개관하는 것을 기념하여 공연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갖는 의미가 남다르다. 김민기 선생님이 만든 극단 학전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공공의 장에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판소리 그림자 인형극 <와그르르 수궁가>를 언어, 연희, 공연, 문화적 컨텍스트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사진출처 : ⓒ아시테지코리아_Fotobee

 

동시대와 소통하는 언어 텍스트

<와그르르 수궁가>는 2024년 7월 17일 오후 3시 아르코꿈밭극장 개관 기념 공연으로 성황리에 막을 올렸다. 공연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판소리 수궁가이다. 줄거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다에 사는 용왕은 나이가 들어서도 흥청망청 잔치를 많이 열었고, 부어라 마셔라 과음하다 보니 병이 들었다. 그런데 용왕의 병을 고칠 약이 바다에서는 구할 수 없었고, 육지에 사는 토끼의 간이 명약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래서 토끼의 간을 구해서 자신의 병을 고치려고 한다.

다른 동물의 생명을 빼앗아 자신의 생명을 연장하려는 용왕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자라에게 속아 죽을 뻔했던 토끼를 보면서 어떤 어려운 순간에도 정신을 차리고 대처하면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재치의 중요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용왕의 명을 받아 토끼의 간을 구하려고 고생한 자라에게는 성실함과 책임감이라는 긍정적인 마음도 생각나고, 자기 이익을 위해 토기를 속이는 그의 모습에서는 고약하다는 생각을 떠올릴 수도 있다. 창작진은 유치원 어린이부터 어른들까지 함께 보는 이 공연의 특성을 고려하여 등장인물에 관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배우의 대사를 쉽게 수정하였다. 내용은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어휘나 문장의 길이 등을 아주 쉽게 고쳤다. 물론 ‘범피중류’와 같은 판소리에서 들을 수 있는 어려운 어휘가 없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물고기의 이름 등은 살짝 모를 수 있어서 거리감이 느껴지겠지만, 맥락을 통해 대강 짐작하고 넘어갈 수 있다. 아마도 공연 후 어른에게 물어보거나 휴대전화로 검색해 보면 알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용궁에서 살아온 토기가 용왕에게 한 대사도 인상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시대를 반영하여 풍자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이 공연을 보면서 스스로 뜨끔할 것이다. 그리고 현실이나 이야기 속에서 악당들은 술을 좋아하여 잔치를 많이 했다. 용왕처럼 술병으로 고생하기 전에 정신을 번쩍 차리고 개과천선을 하면 좋겠다.

 

“이젠 술 좀 그만 마시고, 잘 땐 자고, 일할 때 일하고, 욕심 좀 그만 부리고.”

 

사진출처 : ⓒ아시테지코리아_Fotobee

 

어린이의 미감과 전통을 반영한 연희 텍스트

연희 텍스트 층위에서 <와그르르 수궁가>는 판소리와 그림자극, 인형이 절묘하게 융합된 훌륭한 공연이었다. 창작진이 인형과 그림자로 공연의 캐릭터를 형상화할 때 어린이의 미감을 반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어린이들이 직접 참여하여 만든 캐릭터 디자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전문가들이 이를 바탕으로 등장인물을 완성했다는 것이 표나게 드러난다. 그래서 어찌 보면 인형이나 그림자로 표현된 인물들의 형상이 불명확하거나, 예술적이지 못하다고 보이거나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한번 가만히 더 살펴보면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전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다. 실제로 그림을 그릴 때 어린이처럼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와그르르 수궁가>에는 어린이의 눈에 비치는 용왕이나 물고기, 토기, 호랑이의 모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가 만든 멋지고 확실한 인물 형상이 아니라 크기나 모양, 색깔 등 모든 면에서 미흡한 듯 보이는 공연의 인물 형상을 보면, 거기에서 어린이가 생각하고 느끼는 인물에 대한 이미지가 보인다. 우리 전통 회화의 범주에 속하는 민화나 도자기 등에서 볼 수 있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전통적인 동물들의 형상도 보이는데, 폐품을 재활용한 인형으로 만들 때, 이런 형상을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미감과 철학을 보여주었다.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면, 관객들은 ‘아하 그렇구나!’ 하면서 자기 무릎을 ‘탁’ 치게 된다.

 

사진출처 : ⓒ아시테지코리아_Fotobee

 

관객과 배우가 하나 되어 후끈 달아오른 공연장

관객이 적극 참여하면, 공연의 분위기가 한층 뜨거워지는 것이 분명하다. 배우는 이런 멋진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공연 전에 깊이 고민하고, 공연을 시작할 때 관객에게 적극 호응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참여한 관객에게 상품을 준다고 힌트를 주거나, 특정 장면에서 이렇게 말하거나 행동해 달라고 알려주고 그것을 연습하기도 한다. <와그르르 수궁가> 배우도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추임새를 언급했으며, 악사의 장단에 맞춰 연습까지 해 보았다. 결국 어린이 관객의 추임새 참여와 함께, 공연장을 찾은 수준 높은 어른 관객이 보여주신 추임새 는 참으로 근사했다. 추임새를 잘하는 어른 관객들은 판소리 공연 관람을 상당히 하신 분 같았다. 창자의 창이나 아니라 사이에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가 추임새를 하시는 것이 배우처럼 훌륭했기 때문이다. 창을 하는 배우와 인형을 조종하는 배우는 관객의 뛰어난 추임새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서 더 신나고 구성진 공연을 만들어 나갔다.

어린이 관객이 적극 참여하여 장면에 생기를 더한 대목도 있었다. 공연장을 찾아온 어린이 관객 가운데 방법을 알고 있으면 손을 들도록 했다. 즉, 위기에 빠진 토끼를 구할 방법을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 어린이가 스스로 손을 들고 무대 위로 올라가서 토끼를 살리기 위해 용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토끼가 육지에 있는 숲속에 간을 두고 왔으니, 용궁을 나가 숲으로 가서 그 간을 가져와야 합니다.”

어린이 관객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관객들이 손뼉을 크게 쳤다. 용왕은 관객의 이런 반응을 보고 곧바로 자라에게 명령을 내린다.

“당장 토끼를 따라 육지에 가서 빨리 간을 받아 오너라.”

이렇듯이 이번 아르코꿈밭극장 개관 공연은 객석을 찾은 어린이와 어른 관객의 추임새와 어린이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로 그림자극과 인형극으로 꾸며진 무대의 미장센(화면 구성)이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배우와 관객이 하나가 된 이런 공연장은 쉽게 경험할 수 없다. 김민기 선생님께서 무대 뒤쪽 구석에 앉아계셨다면, 흐뭇하게 웃으셨을 것 같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연에 투자하는 국가의 노력

2024년 7월 21일 김민기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와그르르 수궁가>의 용왕과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사시다가 가진 것 모두 탈탈 털어서 아동극 만드는 데 쓰시고, 마침내 빚까지 지셨다고 한다. 돈 안 되는 아동극 만드는 일이면 자신이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하시고 실천하신 분. 속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대부분의 아동극 창작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실정이다. <와그르르 수궁가> 창작진 역시 이 공연으로 돈 벌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렇게 경제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공연을 계속하는 이유는 어린이들에게 아동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명감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밥만 먹고, 게임하며, TV에 중독되어 살아간다면 그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감수성과 미감을 갖게 될까?

한류, K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는 대한민국, 현재 세계적으로 문화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김민기 선생님과 같이 우리 아동극이나 어린이 문화를 풍요롭게 해 주신 분들의 숨은 노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극단 학전은 아르코꿈밭극장으로 거듭나 명맥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동극 창작진의 터전과 앞날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앞으로 <와그르르 수궁가> 창작진과 우리나라 여러 아동극 관계자가 어린이 사랑을 가슴에 안고, 밤하늘의 북극성 삼아 계속 걸어가려면 지원이 필요하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지원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여, 안정적이고 자부심 넘치게 예술가의 길을 힘차게 걸어가도록 응원하여야 한다. 김민기 선생님을 제대로 추모하는 길은 여기로 이어져야 한다.

 

극단 학전에서 김민기 대표가 추구한 꿈은 무엇이었을까? 아침이슬 등 전설적인 대중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김민기 대표가 평생 피땀과 눈물을 쏟은 곳은 대중음악계도 아니고 성인을 위한 뮤지컬계도 아닌 아동극계였다. 독일 그립스 극단의 수준 높은 아동극을 번안한 작품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어린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아동극을 만드는 데 일생을 바쳤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이 행복하게 볼 수 있는 10여 편의 멋진 아동극 레파토리를 완성하였다. 그렇게 아동극 한 작품을 극단 학전의 레퍼토리로 만들 때마다 수천만 원의 적자와 건강 악화를 감수하였지만, 30여 년이 지나자, 그 기관차의 행진도 이젠 종착역에 다다른 것이다. 김민기 대표가 자기 영혼까지 갈아 넣어서 아동극을 만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어린이들이 우리의 미래이며, 그들을 위한 연극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돈과 건강, 명예 대신 김민기 대표가 추구했던 것, 그가 바랐던 것, 그의 정체성을 탐구해야 한다. 이 공연을 본 후 나는 그가 추구했던 소명을 이어받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더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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