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공연창작소 숨 <축복>

글_오판진(연극평론가)

 

공연창작소 숨이 제작한 공연 <축복>이 2025년 7월 2일부터 7월 6일까지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루 쉰이 쓴 원작 소설을 이주영이 각색하고, 정욱현이 연출하였으며, 남유리 전신영 윤지홍 민일홍 이보영 유은주 박민정 배우가 출연하였다.

 

사진 제공: 공연창작소 숨

 

이 연극의 배경은 백여 년 전 중국이다. 주인공은 샹린댁이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돈에 팔려 샹린과 결혼하였는데, 남편 샹린이 사고로 일찍 죽는다. 남편이 떠난 후 그녀는 샹린의 집에서 살면서 샹린의 시어머니와 샹린의 남동생을 위해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한다. 그렇지만, 샹린의 시어머니와 샹린의 남동생은 샹린댁에게 무례하기 짝이 없는 요구를 하며 사람대접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샹린댁이 일하는 곳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도 샹린댁에게 부도덕한 언행을 하여 샹린댁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루 쉰이 소설을 발표된 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2025년이 된 지금도 이 작품에서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어려움이나 불행을 안타까워하거나 공감하지 않고, 반대로 비난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에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축복받을 일은 하지 않으면서 종교 시설에서나 입으로만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들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이런 말을 했다. “염치가 없네. 파렴치(破廉恥)하구만.” 연극 <축복>에 등장하는 샹린댁이 사는 마을 사람들이나 샹린댁의 시댁 사람들의 말이나 행동을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주변인물들이 너무 뻔뻔하고 어떻게 이렇게까지 부끄러움을 모를 수 있나 싶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에 공감하지 않는 자들에게 축복을 내릴 수 있을까?

 

“불경해. 부정 타지. 재수 없지. 불길하니깐! 남편 잡아먹은 년이.. 어딜?!!”

“열 살이나 어린 남편 잡아먹고 저리 천연덕스럽게 산다는 게야?”

 

샹린댁은 양반 나리 집에 일하러 다니는데,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하인)들이 샹린댁에게 하는 말들이다. 같은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관객인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닐지라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심한 말을 하는 그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모두 돈 벌려고 나리 집에 일하러 온 사람들이다. 이처럼 자신과 같은 처지에서, 나리 집에 일하러 다니는 과부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 관객들은 객석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럼, 죽은 남편을 따라서 죽어야 옳다는 말인가? 남편이 죽으면 부인은 따라서 죽어야 한다는 얘기인지, 뭐가 그리 불만이세요? 당신이나 당신 딸이 그런 처지라면, 따라 죽으라고 말하시겠어요?’ 라고 말하면서 대신 따져주고 싶어진다.

아마도 100여 전 작가 루 쉰은 고통의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지는 않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타자를 깎아내리면서 욕하는 버릇이 있었던 당대 중국인들의 잘못된 습성을 지적하면서, 이제는 노예근성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의미로 이런 대사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의 사고와 정서를 개조하여 긍정적이면서 따뜻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품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았다. 이런 주장은 시간이 많이 흐른 21세기이지만, 한국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 사람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이 온라인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남의 나라 일에까지 쉽게 간섭하면서, 24시간 내내 심한 말이나 표현을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전쟁이나 재난, 질병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을 보면, 위로하거나 도울 생각을 해야 할 텐데, 오히려 피해자들을 저주하거나, 혐오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여전히 적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공연창작소 숨

 

샹린댁을 구원하고 축복할 자는 누구인가?

 

샹린댁의 첫 번째 남편의 이름은 샹린이다. 주인공인 여성 인물의 이름은 없었고, 남편 이름에서 힌트를 얻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는 이름도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았을 텐데, 결혼 후 사는 모습만 연극에서 보여주고 있어서 그것을 살펴보면, 그녀는 사람대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다. 나무꾼이었던 첫 번째 남편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하수오를 채취하러 산에 갔다가 사고로 죽었다. 그 후 샹린댁은 남편을 대신하여 시어머니와 시동생 등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였다. 그러나 샹린댁의 시어머니와 시동생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한 번에 큰돈을 원해서 결혼을 원하는 남자에게 돈을 받고 샹린댁을 팔아넘긴다. 강제로 돈에 팔려 가기 싫었던 샹린댁은 평생 품팔이를 하여 돈을 벌면 그 모든 돈을 샹린의 어머니와 남동생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샹린댁을 때리면서 강제로 끌고 가서 억지로 두 번째 결혼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만난 두 번째 남편의 이름은 허라오류이다. 그는 눈에 장애가 있어 애꾸눈이라고도 불렸다. 허라오류는 샹린댁의 시어머니에게 8만 문이란 큰돈을 주고 샹린댁과 강제로 재혼하였다. 그는 첫날밤에 거부하는 샹린댁을 겁탈한 후 아이를 낳게 했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들 아마오였다. 그런데,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허라오류는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아들 아마오도 두 살이었을 때 늑대의 습격을 받아 죽임을 당한다.

이렇게 고난에 처했을 때 마을 사람 가운데는 샹린댁을 위로하며 따뜻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가 사는 마을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역경에 처한 사람에겐 가시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들이 축복을 받기 위해 준비하는 제사는 끔찍하게도 중시했다. 심지어, 제사에 사용할 음식을 만들 때는 부정 타니깐 자기 집에 가까이 오지 말라고 샹린댁에게 말하기도 한다. 샹린댁에게서 부정하고 불경한 기운이 옮겨와서 자신들이 받을 축복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샹린댁은 절에 시주하여 자신의 불행한 운명을 깨끗하게 씻고, 바꿔보려고 한다. 그녀는 5년 이상 번 품삯을 들여서 토지묘 문턱을 사서 절에 바치고,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샹린댁은 자신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저승에 간 남편들과 아들의 명복도 빌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나 천지신명은 샹린댁에게 축복을 내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의 냉대와 멸시는 계속되었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샹린댁은 자기 정성이 부족했다면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돈을 더 벌어서 절의 문고리와 문패까지 사서 시주하겠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말에도 효과는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불경하다’ ‘부정 탄다’ ‘재수 없다’라고 말하면서 샹린댁을 밀어냈다. 천지신명도 마을사람들도 샹린댁을 구원하거나 축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샹린댁을 구원하고 축복할 수 있을까?

 

사진 제공: 공연창작소 숨

 

소품을 활용한 무대 미장센의 창조

 

정욱현 연출은 이 작품을 만들면서 장면을 시각화하기 위해 문틀을 활용하였다. 소품으로 사용하는 문틀 6개를 나란히 놓거나 겹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배치하였다. 이렇게 놀이적인 연출을 전개함으로써 연극성을 확장하였는데, 매우 인상적이었다. 2025년 3월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공연된 <없는 잘못>(장진웅 연출)에서도 육면체 큐브를 이처럼 사용하여 다양한 이미지를 만들어 호평을 받았고, 5월 같은 공연장에서 막이 오른 <산재일기>(이철 연출)에서도 나무 의자가 다양한 형태로 배치되어 공연의 메시지를 감각하게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 작품에서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소품으로 사용된 문틀은 공간을 나누는 역할 이외에도 말뚝이나 대련(중국풍)의 테두리, 몽둥이, 감옥 창살, 주리 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하여 사용되었다. 이렇듯 최근 한국 연극의 무대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새로운 무대 언어로 소품 활용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런 연출 방법론은 의미 있고 효과적인 것으로 보인다.

 

사진 제공: 공연창작소 숨

 

하이브리드 인형 활용의 성격과 효과

남유리 배우는 공연 초반부터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샹린댁이란 인물을 하이브리드 인형으로 표현하면서 연기하였다. 배우의 상체 앞부분에 인형 몸통을 결합하고, 인형의 왼손은 배우의 손으로 표현하면서 배우는 오른손으로 인형의 뒤통수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서 인형 얼굴의 시선을 표현하였다. 공연 마지막 대목에서 배우는 인형과 분리되었고, 죽은 샹린댁으로 설정된 인형을 바라보며, 샹린댁의 영혼을 표현하였다. 샹린댁이 살았던 당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한 마디 남기면서 공연은 마무리된다. 이 대사는 지금의 관객들에게 자신도 지금 보고만 있지는 않는지 성찰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다들 왜 보고만 계셨나요?”

 

하이브리드 인형을 사용하여 고통 받는 인물의 분열적인 성격이나 모습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샹린댁이란 인물의 고난과 고민, 본질을 보여주는 데 이 인형을 사용한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선택으로 여겨진다. 처음엔 이 인형을 보면서, 이 공연에 참여한 다른 사람 배우들과 다른 톤의 인물 형상화가 아닌가 싶어 다소 걱정하였다. 그렇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샹린댁이란 인물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 더 잘 표현되었고, 이 작품의 깊이도 더 깊어지는 효과를 감각할 수 있었다.

원작 소설을 희곡으로 각색하고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렇지만, 이 공연에서는 둘 다 잘 완성하였다고 느끼고 생각했다. <축복>처럼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대사가 날카롭고, 갈등과 결말이 차갑고 안타까운 작품은 관객을 깨어있게 만들고, 성찰과 연대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앞으로 루 쉰의 다른 작품 <광인일기>와 <아Q정전>이란 공연이 이어질 것이라고 하니 기대하고 응원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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