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신윤아
극단 58번국도의 연극 <타인>(다케다 모모코 작/ 임예성 역/ 나옥희 연출/ 배선애 드라마터그)의 시작은 다소 ‘황당’하다. 나츠(정예지 분), 그의 전 애인 유우미(박지원 분), 현 연인의 어머니 하츠에(장연익 분).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또는 없어야 마땅할) 그야말로 ‘남남’인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다. 이들의 관계 도식에 애써 곧은 선을 그어보려 해봐도 어긋나는 것이 더 나아 보이는 이 어색한 조합이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고스란히 마주하게 한다.
이들의 첫 만남에서 하츠에는 나츠를 딸과 함께 사는 친구 정도로 인지하고 있으며, 유우미는 하츠에를 나츠의 새로운 연상 연인이라 오해한다. 전 연인과 현 연인의 어머니가 동시에 마주한 이 기묘한 상황에 저마다의 오해가 빚어낸 인식들은 이들이 서로 관련이 없는 것도, 완전히 연결된 것도 아닌 절묘한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이 어정쩡하고 기묘한 거리감이 <타인>이 관계의 세계관을 구성하는 핵심이다. 이 극이 다른 생의 결을 지닌 타인들이 서로의 삶에 불쑥 들어서게 될 때 발생하는 미묘한 긴장과 소동들을 연속적으로 펼쳐낸다는 점에서 이 서사의 동력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라기보다 감정의 흐름, 또 그것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변화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그 공간에 흐르는 미묘한 공기와 인물들의 표정, 흐르는 침묵, 가득 찬 대화, 변화하는 관계의 거리들이 전통적 의미의 ‘극적 사건’을 대체한다.

극은 타인에 대한 수용과 제한의 정도를 기준으로 이들 관계의 거리와 밀착도를 시각화하며, 극이 진행될수록 관객은 그 간극의 좁혀짐을 감지하게 된다. 서로의 이름을 묻고, 서로의 방식을 관찰하며, 냉장고의 맥주는 꺼내도 침실의 문은 열지 않는, 이 정도의 ‘적당한’ 관계가 온당했을 이들에게 예기치 않게 함께하는 기간이 연장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전환점을 맞는다. 함께 음식을 나누고, 공간을 넓히고, 심지어 목욕을 위한 욕조까지 공유하게 되는 모습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의 근접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적 감각을 공유했다는 정서적 친밀함을 내포한다. 실제로 이들은 가족에게조차 편히 꺼내놓을 수 없었던 습관, 취미, 내밀한 비밀들을 나누며 성별, 나이, 정체성을 초월해 서로에게 나의 존재를 온전하게 드러낸다. 나아가 그것이 이해되고, 큰 저항 없이 수용되는 이상적인 관계로 향해간다. 그러나 무언가를 강요하지 않고, 설명하려 들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허용한다는 다소 이상적인 이들의 관계는 곧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이 세계에서 도드라지지 않는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신을 숨겨야 하는, 그래야만 내 존재가 받아들여지는 다소 모순적인 현실이 ‘진짜 세상’이기에 나츠는 이 관계에 비밀을 남겨둘 것을 제안한다. 이렇게 연극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는 이상화된 세계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한 이해의 불가능성 속에서 타인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태도, 그것을 통해 생겨나는 느슨하지만 진실한 연결을 조명한다. 말하자면 <타인>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삶’에 대한 드라마다.

이 작품의 기묘한 관계성과 상상력은 일본 희곡 특유의 정서적 거리감과 키치한 무드, 엉뚱함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 동양적 정중함과 사적인 공간에 대한 예민한 감각, 오해가 빚어내는 코믹한 상황들, 결코 가볍지 않은 대화 속에서 발생되는 희극적 반응들은 한국 무대와는 분명 다른 낯선 감각이었지만 이 연극이 그려내는 기이한 공존을 ‘말도 안 되지만 이상하게 이해되는’ 상태로 포착하게 한다. 이것은 현실과 허구, 낯섦과 친숙함 사이의 균형 위에 서 있는 독특한 감각이다. 희곡 안에 감도는 유쾌함과 진지함 사이의 미묘한 균형감각을 실제 무대 위에 탁월하게 구현해 낸 것이 이 연극의 가장 큰 성취일 것인데 여기에는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세 배우는 각각의 캐릭터를 분명하고 섬세하게 무대 위에 구체화해냈고, 조화로운 앙상블을 통해 인물들 간의 거리감과 화합을 입체적으로 구현해냈다. 특히 박지원 배우는 ‘바다를 잇는 다리’라는 유우미 이름의 뜻처럼 다른 두 인물을 유쾌하고 엉뚱한 기운으로 연결하는 핵심 역할로 무대 위에서 빛났다. 극적인 서사보다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기류, 연기의 합, 동선의 교차, 템포 등이 중요한 이 극에서 나옥희 연출의 배우적 감각이 재치 있는 방식으로 곳곳에 녹아 있었음도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의 조화는 관객을 극 속 세계에 즐겁게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이 극은 ‘다 같이 게를 먹고싶다’는 바람 아래 해피엔딩의 윤곽을 빌려오지만, 현실의 관계성과 그것의 불완전함을 알기에 씁쓸한 여운이 진득하게 따라붙는다. ‘타인’이라는 제목은 그러한 ‘어쩔 수 없는 거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존재해야 하는 공존의 관계를 여실히 담아내고 있다. 유쾌한 소란 뒤에 매어둔 질문이 묵직하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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