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뉴욕 벨라스코 극장

글_권서의

 

사랑이란 특정 종(種)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일까? 저장한 기억을 기반으로 감정을 생성하는 존재가 사랑을 겪게 된다면,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사랑에서 피어나는 숭고함의 범위는 달라질까? 뮤지컬 <Maybe HappyEnding>(박천휴 작, 마이클 아덴 연출, Belasco Theatre, 2024.10.16~)은 꽤나 익숙한 질문에 대한 답을 무대언어로 말한다. 시대는 근미래, 낡은 헬퍼봇 두 대가 서울과 제주도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 속에는 인간적이지 않아서 오히려 순수하게 다가오는 감정의 결이 만들어진다. 대한민국 소극장에서 초연된 <Maybe HappyEnding>. 뉴욕 브로드웨이의 대극장에 맞게 재구성된 무대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마이클 아든(Michael Arden)은 ‘헬퍼봇’이라는 단어가 주는 인상과 동시에 그들 안에서 정교하게 설계된 감정과 감성 체계를 유지했다. 덕분에 대극장에서도 소극장만이 가지는 섬세함과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APPROVED Final Additional Production Photos by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기억의 축적으로 만들어진 감정, 그리고 마주친 유한함

‘첫눈에 반했다.’ 우리가 사랑 이야기를 할 때 흔히 접하는 말이다. 그러나 헬퍼봇에세 ‘첫눈에 반했다.’는 개념이 존재할까?

지금 당장 충전하지 않으면 곧 꺼질 위기인 클레어는 옆집에 사는 헬퍼봇 올리버에게 다급히 충전기를 빌려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이 이들의 첫 만남이다. 자신만의 루틴과 공간이 확실한 올리버는 예기치 못한 클레어의 방문과 요청이 불쾌하다. 하지만 ‘이웃’이기에 올리버와 클레어는 반복적으로 마주친다. 클레어는 올리버의 ‘메모리’에 데이터로 축적되어 이내 익숙한 존재가 된다. 이들은 대화를 통해 경험, 그들에게는 ‘메모리’ 혹은 ‘데이터’를 공유한다. 특히 다시 마주하고 싶은, 그리운 존재들에 대해 대화를 하며 두 로봇 사이에는 어떠한 정서의 결이 형성되고 축적된 메모리는 ‘사랑’과 닮은 형태로 발현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주도는 클레어에게도 올리버에게도 특별한 공간이다. 클레어에게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공간이며 올리버에게는 ‘헬퍼봇’으로 섬겼던 제임스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워하는 존재를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고 간 제주도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시간에 의한 유한함’이다. 제임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헬퍼봇은 낡아 그 수명이 다해간다. 저장된 메모리로 만들어진 감정은 찬란하지만 어쩔도리가 없는 유한함 안에 갇혀 더 처절해진다.

 

APPROVED Final Production Photos – Press Selects. Photo Credit_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벨라스코 극장에 구현된 소극장과 대극장의 공존

소극장에서 태어났지만 천 석이 넘는 대극장도 잘 어울렸던 <Maybe Happy Ending>. 대극장에 소극장을 넣은 형태라기보다 소극장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집중력과 온기를 큰 무대 위에 고스란히 구현하면서도 대극장의 스케일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압도감을 놓치지 않았기에 공존으로 이어졌다.

무대에서 구현된 올리버와 클레어의 공간은 확장된 다리막과 머리막을 통해 오롯이 그들의 공간만 보인다. 큰 무대에 소박하게 담긴 그들의 이야기. 오롯이 그들만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인물의 공간만을 명확히 드러내어 문장 속 주어가 바뀌듯 시점과 중심의 전환이 자연스러웠다. 올리버와 클레어의 공간이 같이 병치하는 장면은 서로 다른 개체가 ‘함께’ 있다는 포근함으로 이어졌다. 인물의 내면과 관계를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공간으로 풀어낸 무대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들과 함께 차근히 감정을 쌓아가게 만들었고 밀도 있는 공감으로 이어졌다.

반면 올리버와 클레어에 저장된 메모리가 재생되는 장면은 기술력과 스케일을 통해 ‘대극장’임을 체감하게 된다. 무대 가운데 위치한 투명한 스크린에 재생된 그들의 기억은 입체감을 만들었으며 무대 전환에 있어서 정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억을 마주하고 있는 기억의 주인. 무대는 조명과 영상, 배우의 유기적 결합을 통해 ‘상실의 기억’을 시각화한다. 더 넘어서 현재와 과거의 공존을 구현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인물의 현재와 과거의 기억이 중첩되어 그 층위의 이미지가 논리적으로 병치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큰 무대와 기술을 활용해 이런 장면을 만들어야 했을까? 기억이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 기억이 지금을 압도한다. 기억은 가장 작은 조각처럼 보이지만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할 때도 있다. <Maybe Happy Ending>은 바로 기억이 가진 이 힘을 대극장이라는 공간과 기술을 통해 무대언어로 구현한다. 지금을 살아가는 인물과 과거의 기억. 그리고 과거에 압도된 현재. 미래는 현재를 통과한 과거의 기억에 의해 선택된다.

 

APPROVED Final Production Photos – Press Selects. Photo Credit_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기억은 그대로, 그래서 Maybe

올리버와 클레어는 인간의 선택으로 유한한 존재가 된다. 인간들은 그들의 부품을 더 이상 생산하지도 않고 시스템을 업데이트 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존재도 기억도 나눴던 추억과 감정도 더 이어지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그리워하는 존재들 역시 유한하다. 올리버가 그리워하던 제임스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클레어를 설레게 했던 반딧불이 역시 짧은 생을 살다 사라진다. 끝없이 펼쳐진 시간에 유한한 존재들이 남긴 잠깐의 흔적으로 보여, 그것들은 더욱 선명하고 아련하게 남는다.

헬퍼봇, 다시 말해 심장이 없는 존재들이 나눈 감정임에도 이토록 절절하게 진실로 느껴지는 이유는 대런 크리스(Darren Criss)의 연기 덕분이다. 그는 로봇으로서의 신체를 정교하게 구축했다. 팔과 몸통 사이의 공간과 각도, 움직임. 고개가 돌아가는 타이밍, 심지어 눈을 깜빡이는 순간까지 매우 세밀했다. 대런 크리스의 절제된 표현은 감정의 과잉을 방지하여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인간과는 다른 결로 움직이지만 감정의 프로세스는 인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절절하면서도 밝게 알려준다. 그의 연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을 따뜻함은 유지한 채 낯설게 다시금 바라보게 한다. 그 중심엔 ‘기억’이 있다.

‘주체가 사라진다고 해서 그들의 사랑이 끝났다고 할 수 있는가?’ <Maybe HappyEnding>은 어쩌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메모리를 지워도 올리버와 클레어가 사랑을 나눴다는 사실은 분명히 남아있다. 그들은 감정이 끝나서가 아니라, 다만 기억을 지운 것 뿐이다. 그렇기에 그 사실은 기억 너머 어딘가에 남겨질 위기에 처한다. ‘그들이 사랑은 끝난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떠오를 때, 올리버는 화분에게 조용히 말한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게 말하지 말라고. 켜켜이 쌓인 사랑은 올리버의 기억을 통해 여전히 남아있었고 그래서 끝나지 않고 간직된다. 그래서 그것은 끝나지 않았기에 Maybe인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시간과 기억, 유한한 스스로의 존재의 관계가 얽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분명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깊은 여운이 남는다. 그래서 그것은 maybe endless, 끝나지 않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APPROVED Final Additional Production Photos by Matthew Murphy and Evan Zimmerman

 

‘헬퍼봇’이라는 설정에 맞춰 감정의 기반을 메모리로 삼아 쌓고, 그 섬세함을 서사로 풀어낸 박천휴 작가. 벨라스코 극장을 소극장과 대극장이 공존하는 무대로 구현한 마이클 아든. 그리고 이 모든 층위와 감정, 의미를 온몸을 다해 전달하며 극장을 채운 배우들. 커튼콜 또한 소극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Maybe HappyEnding>은 감정과 기억, 기술과 사랑, 영원할 수 없음에 어쩔 도리가 없는 처절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나는 따스함. 그래서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이런 세계를 관객 앞에 포근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끝에 no time이 Endless가 되기를 바라는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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