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오세곤(극단 노을 예술감독)
새 정부가 들어서고 문화부 장관도 바뀌었다. 새 정부 문화예술 정책이 과도하게 콘텐츠 중심이고 새 장관도 산업적 성향이라고 우려들을 한다. 하지만 언제 안 그런 적이 있었느냐는 자조적 푸념에 공감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그래선지 문화부 장관에게 순수예술을 콕 집어 질문했다는 대통령에 대해서도 크게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중언부언 핵심 없는 대답을 하는 장관이나 그래도 그냥 넘어가는 대통령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현 대통령의 경력을 보건대, 일반 행정 처리에 대해서라면 기초와 광역 지자체의 실전 경험을 토대로 확실한 진단을 위한 질문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나라 토양에서 예술에 대해서까지 그런 식견을 가진 국정 운영자의 탄생을 기대하기는 아직 어렵다고 본다.
20여 년 전 기초예술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사실 내용으로 보면 순수예술과 다를 게 없는데 굳이 새로운 표현을 쓰자고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선 기초가 무엇인가? 기초란 모든 사물의 밑바탕을 의미한다. 기초학문과 기초산업과 기초사회가 그렇듯이 기초예술도 국가와 사회를 떠받치는 주춧돌임을 인식해야 한다. 즉 기초예술은 단순히 응용예술, 실용예술, 상업예술 등의 대립개념으로서 예술의 기초가 아니라 모든 사회와 문화의 상대적 개념으로서 국가의 존립기반이다. 기초예술은 한 사회공동체가 유지되는 문화적 토대가 된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그 사회가 예술을 토대로 축적하고 생산한 문화적 토양 속에서 하루하루 일상을 영위해간다.
순수든 기초든 본질이 같다면 그 중요성이 달라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도 구태여 기초예술이라는 새 단어를 내세우게 된 것은 순수를 현실과 거리가 먼, 그래서 아예 신경을 안 쓰거나 가장 늦게 챙겨도 되는 사치품 정도로 여기는 무지함 때문이다. 상업예술은 그 표현부터 명백히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한다. 반면에 순수예술은 이윤 창출이 아닌 예술적 가치 실현, 즉 예술적 완성도와 예술적 성취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제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발생했고,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순수예술 대신 기초예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기초예술은 그 표현 자체에 경제적으로 또한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선언을 담고 있다. 그 표현은 예술은 순수해야 하므로 돈을 벌 필요가 없다거나, 배가 고파야 우수한 작품이 나온다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단호히 거부한다. 더불어 가깝게는 인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으로부터 궁극적으로는 공동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까지, 즉 사회적 내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확언한다.
사실 기초예술의 국가적 위상이 어때야 하는지는 명백하다. 국가의 존립기반인 기초예술을 극빈생활조차 감내하는 몇몇 예술가들의 강한 의지나 인내력에만 의지하는 집단적 몰지각은 사라져야 한다.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국가 차원의 응급조치는 물론이고 종합적이면서도 세밀하고 유연한 기초예술 정책이 시급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초예술은 여전히 빈사 상태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앞서와 같이 정확한 이해 내지 인식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먼저 국정 운영자부터 다른 건 몰라도 기초예술 정책에 관한 한 실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대통령도 장관도 차관도 실·국장도 과장도 사무관도 주무관도 모두 실력이 없다.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사실이다. 여기서 가장 위험한 것은 실력이 없으면서 실력이 있다고 착각하는 상태이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판단과 결정을 무결점, 무오류로 굳게 믿기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고 나간다,
물론 실력이 없는 줄 알아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위험하기는 앞의 부류들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무능력을 감추기 위해 불필요한 세밀함으로 본질을 가리거나,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갑(甲)으로서 과도하게 복잡한 틀을 만들어 힘없는 을(乙)들로 하여금 거기 맞추도록 강요한다. 그래서 결국 예술과는 무관하게, 복잡한 틀에 맞추는 능력으로 평가받는 부조리한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실력이 없으면 복잡한 설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세밀한 정책을 세우겠다는 건 마치 표적을 모르면서 표적 치료를 하겠다는 것과 같은 만용이다. 그러니까 잘못될 위험이 없는 안전한 정책을 찾아야 하는데 우선은 복잡하지 않고 단순한 것이 유리하다. 그래서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예술에 대한 보편지원 정책이다. 언젠가부터 예술 정책에서 “선택과 집중”을 보편지원보다 수준 높은 지원 체계로 여기는 경향이 생겼는데, 과연 그럴만한 선택 능력이 있는지부터 의심이 든다. 이에 있어 잘못된 선택은 예술 현장의 왜곡이라는 부작용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예술 관련해서는 항상 예산이 부족하다고 한다. 돈이 부족할수록 보편지원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 예술은 실패를 기본 속성으로 한다. 수많은 실패를 바탕으로 명작(名作)도 나오고 대가(大家)도 나온다. 물론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버티는 건 예술인 특유의 무모할 정도로 강한 의지와 집념 덕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본적인 창작 환경을 개선해 주고 최소한의 복지를 제공해 주는 것만으로도 예술인들의 창작 의욕은 크게 고취되고 현장에 계속 남게 될 확률이 높아질 것이 틀림없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예술계는 지원 서류 작성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강 다음 해 초까지 복잡한 빈칸 채우기를 하고는 결과에 따라 한 해 활동이 정해진다. 선정이 되면 되는 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불만이 많다. 선정이 되면 모자라는 예산으로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고, 선정이 안 되면 아예 시도조차 못 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다. 그러면서 나오는 말이 있다, “지원금이 많아질수록 예술 현장은 망가진다.”
애당초 선택 능력이 없는데 선택을 한다. 그 선택의 결과는 예술 창작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죽고 사는 문제이다. 능력 없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셈이니 참으로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선택을 전제로 한 지원에는 신중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라면 우선은 주관적 판단이 아닌 객관적 지표를 활용할 수 있는 경우로 한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객관적 지표만을 활용하는 단계로부터, 객관적 지표를 토대로 주관적 판단을 결합하는 단계를 거쳐, 전문가들의 주관만으로도 능히 결정할 수 있는 수준까지 능력을 키우기 전까지는 대단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복잡한 심사를 거쳐 지원금을 주는 것 말고 다른 형태의 지원을 생각해야 한다. 예술을 하는 데 필요한 요소 중 어떤 것이 부족한지 확인해서 그것을 채워주거나 채울 방법을 찾아주는 것도 지원일 텐데,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인적 네트워킹, 창작품의 국내외 유통 경로 탐색, 저작권을 비롯한 관련 정보 제공, 홍보 대책 마련 등, 실로 수많은 지원 항목이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요청을 받아서건 직접 찾아서건 다양한 가지각색의 경우를 하나하나 해결하다 보면 전체적으로 실력이 향상될 것이고, 그런 바탕 위에서 조금씩 세밀한 정책 설계도 시도해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역시 사람이 중요하다. 정부의 예술 관련 부서나 중앙과 지역의 크고 작은 예술지원 기관이나 모두 현재 자신들의 역량이 높지 않음을 겸허하게 인정하고, 부지런히 일선 현장의 예술과 예술인들을 만나, 이른바 “적극 행정”의 자세로, 그들이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질 시점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