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클래식 연주회 기획가
2023년 12월, ‘일이백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 부조니의 파우스트 박사(Doktor Faust)’까지 올라와서 캠프를 치고 ‘부록’편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이제 정상인 ‘천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가 코 앞이다. 일단, 남은 일이백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를 힘차게 올라가 보자.
러시아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총 6개의 오페라를 남겼다. 안타깝게도 1919년 작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op.33만 종종 무대에 오르고 나머지 다섯 작품은 내용도 어렵고 말(러시아어)도 어려워 쉽게 접하기 힘들다. 이중 도스토예프스키의 동명 소설에 음악을 붙인 ‘도박사’ op.24 (1926)와 톨스토이의 대작을 오페라로 옮긴 ‘전쟁과 평화’ op.91 (1952)는 원작 소설이 엎치는데 복잡한 음악까지 덮쳐, 난해에 난감을 얹은 격이 되었다. 비록 오페라는 실패했지만, 러시아를 대표하는 두 명의 대문호 –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오선지로 옮긴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음악이 어찌 되었든, 오페라 대본의 원작자가 뿜어내는 광휘를 무시할 수 없다. 프로코피예프는 독일을 대표하는 대문호 괴테 그리고 파우스트를 놓칠 수 없었다. 바로 1927년 작 오페라 ‘불의 천사’ op.37 에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전격 등장한다.
오페라 ‘불의 천사’는 중세 독일을 배경으로 하지만 파우스트 이야기가 아니다. 마법에 걸려 반쯤 미친 연인 레나타를 구원하려는 기사 루프레히트의 고군분투기로,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전체 5막 중 4막에서 처음 등장한다. 실의에 빠진 루프레히트가 맥줏집에 들렀다가 마법을 부리고 있는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를 만난다는 설정이다. 파우스트 비극 1부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 지하 술집’의 오마주다.
앞 열 왼쪽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남자가 3막의 결투로 다친 주인공 루프레히트고 붉은 옷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그리고 우측에 모자를 들고 서 있는 사람이 파우스트다. 재미있는 건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오페라의 주연인 루프레히트에게 조언하는 역할의 조연이라는 점이다. 가장 높은 남성 성부인 테너가 맡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는 ‘세상천지 남자들은 늘 술에 취해 여자 뒤나 쫓지’라며 비아냥거리고, 가장 낮은 성부인 베이스가 부르는 학자 파우스트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고, 사랑은 힘으로 얻을 수 없지’라는 묵직한 조언을 던진다. 이 지점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적 연출이 반짝인다.
높은 음자리표에서 테너가 부르는 메피스토펠레스(빨간 실선 박스)는 8분음표로 잔망스럽게 노닐고, 낮은 음자리표의 베이스가 부르는 파우스트(파란 실선 박스)는 2분음표와 4분음표로 묵직하게 이어진다. 재미있는 건 높은 테너의 음형을 따라가며 반주하는 악기가 저음 첼로(빨간 점선 박스)의 스타카티시모(Staccatissimo; 원음 길이의 1/4로 짧게 끊어 연주하는 기법, Staccato의 1/2)고, 낮은 베이스의 반주는 가장 고음을 맞는 제1 바이올린 독주(파란 점선 박스)라는 점이다.
오페라의 남자 주인공 루프레히트는 중간 성부인 바리톤이 맡는다. 즉, 성악부에서 위는 악마인 테너, 아래는 파우스트인 베이스에게 포위된 모양(초록색)이 되고, 기악 반주부에서는 위아래가 바뀌어 다시 한번 포위된다. 주인공에게 파우스트와 악마를 따라가는 것 이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걸 각 성부의 높낮이로 구현한 기발한 음악적 연출이다.
루프레히트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따라 퇴장하면 술집 주인과 세 명의 술꾼이 ‘아, 저 남자에게 차라리 십자가에 키스하라고 말하면 어떨까?’라는 여섯 마디를 부르며 4막을 닫는다. 이는 괴테 원작에 등장하는 아우어바흐 술집의 네 술꾼 프로슈, 브란더, 지벨, 알트마이어를 떠올리게 하는 프로코피예프의 깨알 연출이다.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적으로도 크게 만족했는지, 1928년 오페라의 주요 주제를 편집해 교향곡 제3번 in c op. 44으로 발표한다.
위 사진은 1993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이끄는 키로프 오페라단의 5막 수도원 장면으로, 꽉 찬 3관 편성의 오케스트라 그리고 성악진, 합창단, 무용수까지 더하면 200명이 훌쩍 넘는 대형 프로덕션이다. 레나타를 마녀 심판하려는 종교 재판관과 이를 말리려는 수녀들이 온갖 악귀들에 둘러싸이면서 아수라장이 된다.
4막에서 파우스트 일행을 따라온 루프레히트는 이 장면을 내려다본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저쯤 어디에 그녀(레나타)가 있을 거야.’라며 난장판의 한 곳을 가리키지만, 루프레히트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연출 데이비드 프리먼은 무대 위 합창단(수녀들)에게 극적 연기와 노래를 지시했고, 나머지 빈 곳을 빼곡하게 악귀(무용수)로 채워 넣었다. 전라인 악귀와 순결한 수녀가 뒤섞이면서 매우 선정적인 장면이 연출되는데, 이는 괴테 원작 ‘발푸르기스의 밤’으로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의도적 연출이다. 음탕한 아수라와 안내자 메피스토펠레스는 동일하고, 관람자가 파우스트에서 루프레히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프로코피예프의 전위적인 음악이 고조되면서 이야기, 무대, 움직임이 기괴함의 절정을 이룬다. 결국, 레나타의 화형대에 불길이 치솟으며 오페라가 끝난다. 레나타가 애타게 찾던 불의 천사는 화형이었다. 여주인공의 죽음이 생목숨이 끊어지는 단순 비극인지, 저주를 끝내는 파우스트적 구원일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음악 작품이나 연극 작품에서 조연으로 등장하기 힘들다. 둘의 어마어마한 문학사적 질량이 다른 배역들과 이야기들을 블랙홀처럼 모조리 빨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페라 ‘불의 천사’에서 프로코피예프의 시도는 모험이었다. 방황하는 주인공 루프레히트를 발푸르기스에 빠진 레나타에게 안내하는 조연을 맡겼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괴테의 위대한 질량과 강력한 중력파 때문에 오페라의 4막과 5막이 파우스트의 한 장면으로 왜곡된다. 이 ‘휨’은 분명 프로코피예프가 의도한 것이다. 하지만 ‘휨의 정도’는 온전히 연출가의 몫일 것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아돌프 아당(Adolphe Adam; 1803~1856)의 이름은 낯설다. 하지만 레코드점의 클래식 코너에 가면 늘 작곡가 이름이 ABC 순으로 정리되어 있고, 그중 가장 앞에 배치된 ‘Adam’을 본 적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몇 장 없는 그의 음반은 모두 ‘발레 지젤; Ballet Giselle’이다.
아당은 수십 편의 오페라와 발레 음악을 남겼지만, 지젤과 몇몇 작품을 제외하곤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 중 1833년 런던 King’s Theatre에서 초연한 3막의 발레 ‘파우스트’도 있다.
2관 편성의 오케스트라에 발레 무용수까지 있으니 백 명이 훌쩍 넘는 대규모 공연이었을 것이다. 전 유럽적인 파우스트 돌풍을 몰고 온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보다 무려 26년이나 앞선 선구자적 공연이었지만, 앞서가도 너무 앞섰다. 실패엔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초연을 올린 런던은 파리보다 파우스트의 인기가 훨씬 덜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아당이 조금만 늦게 그리고 영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발레 ’파우스트’를 올렸다면, 레코드점 클래식 코너 ‘A’ 칸, 맨 왼쪽 ‘Adam’의 ‘Giselle’ 음반보다 하나 앞에 ‘Faust’가 자리 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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