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클래식 연주회 기획가

파우스트의 정상이 몇 발짝 앞이다. 직전 마지막 관문에는 무려 800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생소한 작곡가의 거의 연주되지 않는 음악이지만, 규모만큼은 괴테가 꿈꾸었던 파우스트다. 음악적 내용을 차치하고 단지 양(量), 압도적 물량에 파묻혀 보자.

하버갈 브라이언(Havergal Brian; 1876~1972)은 32편의 교향곡과 5편의 오페라를 남긴 영국의 작곡가이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96년을 살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극소수의 영국 클래식 음악 매니아를 제외하곤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이런 형편은 21세기인 지금도 마찬가지다. 작곡가의 이름을 딴 협회가 영국 문화부의 지원을 업고 전방위적인 노력을 하고 있지만, 시중에서 제대로 정리된 음반조차 구하기 힘든 실정이다. 그나마 괴테의 파우스트 덕에 회자하는 곡이 하나 있다. 마흔세 살에 작곡을 시작해 무려 8년이 지난 1927년에 완성한 교향곡 1번 ‘고딕(Gothic)’이다. 만에 하나 음반 매장에서 바흐, 베토벤, 브람스가 포진된 알파벳 ‘B’ 칸에 ‘Brian’이 색인 되어 있다면, 그 음반은 열이면 열 ‘교향곡 1번’ 일 것이다.

교향곡 1번 ‘고딕’은 작곡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넣은 곡이다. 주저함이 없고 아낌도 없다. 그 결과, 연주 시간 100분에 연주자 800명이라는 매머드급 작품이 탄생했다. 내용은 둘째치고 규모 먼저 파악해 보자.

총 6악장 구성으로, 1부는 성악 없이 오케스트라로만 연주하는 세 악장이 빠른-느린-빠른 악장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3악장 형식의 교향곡처럼 보이지만, 각 악장이 ‘쉼 없이(attacca)’로 연결되어 있어 거대한 음(音)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2부는 네 명의 독창자와 대규모 합창단들이 가세해 라틴어 찬가 ‘Te Deum’을 노래한다. 길이가 너무 장대해 편의상 4, 5, 6으로 나누었지만 2부는 사실상 완전히 독립된 노래라고 볼 수 있다. 즉 100분이 넘는 브라이언의 ‘고딕’ 교향곡에서 귀가 쉴 수 있는 시간은 1부와 2부 사이 딱 한순간뿐이다.
편성 또한 어마어마하다. 현악기만 80명이고, 목관 35명, 금관 25명, 타악기 10명 이상에 오르간과 첼레스타까지 동원된다. 여기에 무대 밖 연주 공간 네 곳에 금관 주자와 팀파니 주자 36명이 배치된다. 합창단의 규모는 더 어마어마하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네 명의 독창자를 위시해 네 그룹의 혼성 합창단과 어린이 합창단까지 무대 위에 올라간다. 합창단 한 그룹을 대략 100명으로 잡으면 총 700~800명의 연주자가 필요한 셈이다. 브라이언은 소리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악기(수십 종의 타악기는 물론 정규 오케스트라 편성에 포함되지 않는 악기인 오보에 다모레와 유포니움도 쓴다.)를 동원하고 노래 부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무대 위로 올려 고딕풍 중세를 구현한 것이다.

2011년 PROMS 실황 공연 사진인데, 연주 규모가 너무 커서 한 장에 담기조차 힘들다. 양측으로 펼쳐진 날개(흰 점선) 구역이 4그룹의 혼성 합창단이고, 그 아래쪽 노란 실선의 타원이 두 그룹으로 나뉜 어린이 합창단이다. 중앙의 빨간 점선이 파이프 오르간이고 하단 파란색 박스 구역이 네 명의 독창자와 지휘자 그리고 200여 명이 넘는 오케스트라가 자리한 곳이다. 사진 아래쪽 구석에 표시된 붉은 숫자는 off-stage band(금관+팀파니)가 있는 곳으로 사진에서는 잘려 잘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각 구역을 확대한 사진이다.

중세 고딕의 모든 것을 소리로 담아내려 한 작곡가 브라이언의 의도는 자연스럽게 ‘파우스트’로 이어졌을 것이다. 교향곡의 공식 부제는 명확히 ‘고딕’이지만, 모든 것을 통합하려는 장대한 규모 그리고 시대적 연관이 파우스트와 맞아떨어진다. 그렇다고 고딕 교향곡 1부의 ‘빠른–느린-빠른’ 전개가 70년 전에 완성된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TTIS 2023년 1월호 참조)의 ‘파우스트-그레트헨-메피스토펠레스’의 골격을 따르진 않는다. 20년 먼저 작곡된 말러 교향곡 8번(TTIS 다음 호에 연재 예정)도 파우스트와 깊게 연관되어 있지만, 규모가 크다는 것과 라틴어 성가가 들어간다는 점 이외에 음악적 공통점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브라이언의 고딕 교향곡과 파우스트와의 연관성은 무엇인가? 아래 인용한 괴테 파우스트의 첫머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단장:
자네들도 알다시피, 우리 독일 무대에서는 / 누구나 원하는 일을 시도해 볼 수 있으니
오늘은 배경이건 소도구건 / 마음대로 사용해 보자고.
크고 작은 천상의 조명을 모조리 동원하고 / 별들도 얼마든지 사용하게나.
물, 불, 암벽은 물론 / 동물과 새들도 빠져선 안 되네.
비록 비좁은 가설무대 안일망정 / 창조의 온 영역을 재현해 놓고
알맞은 속도로 두루 거닐어보자고. / 천국에서 현세를 거쳐 지옥에 이르기까지.
(파우스트1; 정서웅 옮김 – 민음사)
파우스트의 시작인 ‘헌사’와 ‘천상의 서곡’ 사이에 있는 ‘무대에서의 서연(序演)’ 끝부분(231~242행)이다. 빈 무대에서 시인과 어릿광대와 이야기를 나누던 단장은 세상 만물을 원하는 만큼 동원해 크게 한 판 펼쳐보자며 호기롭게 연극을 시작한다. 이어 펼쳐지는 파우스트 1, 2부의 인물들은 우주와 지구, 현세와 신화 그리고 천상과 지옥을 종횡무진 누빈다. 어차피 연극은 가상이고, 작가의 머릿속 상상에는 제한이 없다. 하나의 주제를 무한으로 나눌 수도, 무한의 재료를 하나로 종합할 수도 있는 가치. 보통 ‘파우스트적(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브라이언의 교향곡 1번 ‘고딕’은 유럽의 중세가 품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리로 표현한 ‘파우스트적 종합’이다.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 (Es irrt der Mensch, solong’er strebt) 브라이언의 지향은 거대했고 ‘교향곡 1번’이라는 방황의 흔적을 남겼다. 그가 창조한 파우스트적 울림은 과대했지만 결코 망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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