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With Integrity Togetherness and Hope)
하경화
(청주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교수)
국내 유일의 발달장애인극단 ‘멋진 친구들’의 창작극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을 마주하는 그들의 입장과 그에 대한 문제점을 당사자주의 시각으로 해결방안을 찾아가는 과정을 유쾌한 판타지로 표현한 블랙코미디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
발달장애인에게 있어서 ‘연극’이란, 배우가 관객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펼치는 종합 예술이라는 측면보다는 ‘치료’의 개념으로 적용되어 왔으며 더불어 ‘발달장애인 연극치료’라는 주제로 선행된 연구, 프로그램의 사례들은 적지 않다.
그러나 성인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극단 <멋진 친구들>은 손상, 비정상을 전제한 치료 개념에서의 연극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연기자의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이들로 구성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이 아닌 다른 캐릭터의 역할을 하며, 그들이 느끼는 감정과 원하는 것을 얘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무대 장치, 조명, 음향을 이해하고, 대본을 읽고, 움직임을 연습하고, 관객과 소통및 교감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이는 프로 배우로서 역할 수행을 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을 뿐만 아니라 동등한 사회인으로서 진정한 대우를 받기 위한 도전과 기회의 장이 되는 것이라 그들은 간절히 원하고 그 꿈이 현실도 되리라 믿고
있으며, 이 작품을 통해, 아니 연극이라는 대중예술의 한 장르를 통하여 對 시민사회 에 명백한 질문을 제시하고 있는 듯 했다.
하나. 모두가 살아내고 있는 세상은 과연 ‘하나’일까?
교육의 정도, 부와 권력에 의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하나. 장애에 대한 비장애인의 인식과 편견에서 시작된 단절과 구분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가, 그 단절과 구분에 대해 장애인이 느끼고 견뎌야 하는 현실의 모습은 어떠한가?
하나.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다름’을 올바르게 인지하고, 상생하고 있는가?
“너와 나의 아르카디아”는 편견 속에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장애인 연극인의 환상 속 이야기이지만 막연하고, 허구의 세상이 아닌 현실에서 <멋진 친구들> 단원들이 매일 매일 살아내고 있는 시간의 이야기이고, 순수한 모두의 아르카디아에 대한 것이라 보여진다.
공연의 시작은 녹음된 소리로 시작한다. 그리고 무대 좌, 우측의 모니터 자막이 시선을 끌어당긴다. “미친 듯이 쫓아오는 불빛은 좀비”, 이는 무심히 보내는 시선, 죽음으로 몰아내는 편견과 차별이라는 것. 소통하지 않는 곳에서 도망쳐 소통이 있는 곳 아카르디아로 가기로 한 그들의 공연 연습은 마치 관객에게 집중력을 강요하는 듯하였다. ‘야생마’는 맘껏 무대 위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장애인 배우라는 한계와 낙인은 그에게 무대를 쉽게 허락하지 않아 세상의 편견 속에 지친 상태이며, 같은 이유로 그와 함께하는 글을 쓰고, 연출로서 자신만의 세계를 표현하고 싶은 연출(비장애인 배우), 그리고 개성이 넘치는 ‘푸바오와 피에로 야생마, 도라에몽, 소프라노’와 함께 ‘연출’은 지하 연습실에 숨어 ‘연출’의 대본 대로 연극을 만들어 가다가 편견과 차별 없는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세상에 나서기 두려워하는 ‘연출’을 새로운 세상으로 나란히 걸어가게 만드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결국 장애는 너,나 그리고 모두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깊이 패인 상처로 아파하고 있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편견과 차별은 작게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고, 크게는 사회가 만드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경험해 보지 않고 선입견으로 세상을 살지 말고 열린 의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르카디아”가 아닐까?
배역의 이름이 특이한 것은 발달장애 배우들이 갖고 있는 개인적, 성격적 특징을 살려내는 오채민 작가의 상큼함이었고, 배우들 자신도 제3의 자기 이름을 지니므로 또 다른 자기 존재에 대한 신뢰를 키우는 동력이 되기도 한듯하다.
연기적으로도 멋진 친구들은 대사를 완벽히 외워서 문장마다 감정을 넣어 구어체와 대화체로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었으며, 발달장애인들이 지닌 독특한 화법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발음상의 문제는 그네들이 지닌 신체적 조건에 의해 아쉬움은 있었지만, 비장애인과 별반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배우가 그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는 점이다. 무대 동작에서도 인도자 없이 무대의 센터, 상수, 하수, 제 위치에 착석하거나 서서 말하고, 노래를 하는가 하면 춤을 추기도 하는 등 기록적인 조합이 보이기도 하였다. 무대 위는 여러 개의 박스와 스툴로 창고 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으며, 무대 바닥에는 흰 선을 종이테이프로 선명하게 보이도록 무대 상수에서 하수로 붙여져 있었다. 마치 선을 넘어선 안된다고 경고하는 듯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그 선(線)은 변영후 연출이 작가의 의도를 꼭 집어 표현한 하나의 강한 시그널이고, 또한 배우들이 그 선을 절대로 넘지 않다가 연출역을 맡은 ‘비장애 배우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또는 ‘관객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기 위해’ 그리고 사탕 선물을 관객에게 주려고 할 때, 자연스레 선을 넘어서 연기 공간을 확장 했다. 그 선은 모두가 만들어 낸 편견과 차별의 선일 수도 있으며, 막연하게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자의식을 모두에게 주는 듯 하였다.
또한 배우들과 작가가 등장인물로서 이루어내는 극중극(劇中劇)은 이 작품의 핵심이다. 극중극을 통해 각자의 상처가 드러나고, 서로 다른 입장과 갈등을 그들의 편견과 차별의 눈으로 선을 긋는게 아니라 서로 소통하면서 상처로 얼룩진 크고 작은 선들을 지워가고 있었다.
공연 내내 배우들의 연기는 유쾌한 톤으로 살금살금 객석을 전염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지루하고 비루한 삶’일 지라도 ‘순수의 아르카디아’에 도달하면 유쾌함이 모두를 지배하고 그것이 모두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걸 자각하게 될 것이다. ‘야생마’와 각기 다른 캐릭터들이 꿈꾸는 것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이디, 그런 꿈은 달콤하다. 그래서 그들이 지어내는 극중극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즐겁다. 그러한 유쾌함 밑에 내재 된 그들의 깊은 고민과 갈등은 자연스레 페이소스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처음 장애 인식개선 교육과 성교육을 위하여 인형을 조종하던 인형극단의 배우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신체와 자신들의 소리와 자신들의 내적 감정으로 연기를 월등히 하는 배우로 거듭나고 있다. 인형 대신 자신들의 재능을 스스로 조절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들도 전문인 연기자로 인정받고 비장애 배우들과 섞여 공연하고, 그들만의 연기법을 체득해서 갈 수 있는 그 곳, 아르카디아의 경지에 다다를 것이라는 푸른 신호등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은 안도하는 그들의 눈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발달장애인 배우들로 구성된 극단<멋진 친구들>의 행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과 관심과 독려는 너, 나, 모두의 몫이고, 그들의 동인에 박차를 가할 수 있는 그 힘이 모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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