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애(연극평론가)
안톤 체홉의 4대 장막 희곡―<갈매기>, <세 자매>, <바냐삼촌>, <벚꽃동산>―은 연극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관람한 작품들이다. 최근에도 <세 자매>는 공연을 마쳤고, <갈매기>는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으니 언제 어느 때든 극장에서 만나는 중요한 레퍼토리인 셈이다. 이렇게 익숙하지만 한 편 한 편의 무게가 남다르기 때문에 체홉 작품을 공연한다고 할 때는 더 많은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지난 연말에 이 네 편을 한 번에 공연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실현되기 힘든 상상 중 하나로 치부했던 것이 체홉의 4대 장막을 하루에 몰아서 보는 것이었다. 누군가 이렇게 한 번에 보고 싶다는 말을 하면, 그렇게 되면 좋겠다고 동의는 하면서도 체홉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타박했고 우스갯소리로 넘겨버렸다. 그만큼 네 편이 각각의 세계를 견고하게 형성하고 있었고 어느 단체든 한 편만 제대로 공연하는 것도 대단하고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이 무모하고 기막힌 기획을 수행한 단체는 김연민 연출이 대표로 있는 극단 스토리포레스트다. 2012년에 <갈매기>를 번안한 <종로갈매기>로 시작해서 2021년에 <바냐삼촌>의 번안인 <능길삼촌>을 공연했다. 10년에 걸쳐 4대 장막을 우리 정서와 공간, 상황에 맞춰 번안한 작품들을 차례차례 선보였고, 10년을 기념하는 자리에 네 편을 한데 모은 것이다. 단체로서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연극계에서도 전례를 찾기 힘든 작업이다. 작품 하나가 몇 시간씩 진행되는 경우는 있지만 네 편의 장막을 하루에, 연속으로 공연하는 것은 어지간한 공력과 내공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더군다나 작품마다 출연하는 배우들이 다르기 때문에 아무리 재공연이라고 하지만 연습부터가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김연민 연출이기 때문에 걱정보다는 기대가 더 컸다.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를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진정성을 바닥에 깔고 찬찬히 그리고 묵직하게 할 말을 밀어붙이는 것이 김연민 연출의 특징이기 때문에 왠지 네 편을 하루에 공연하는 게 자연스럽다. 한마디로 김연민 연출다운 기획이다.
2022년 12월 23일부터 31일까지 4편을 연속으로 공연한 것은 전체 공연 기간 중에 이틀이었다. 24일과 30일, 오후 1시부터 10시까지. 이것은 극단에게도 부담이었지만 관객들에게도 부담이었다. 저녁시간 겸 휴식시간을 제외하면 8시간 가까운 시간을 공연하는 것이었고, 관객들은 그 시간을 꼬박 극장에서 보내야 했다. 작품 감상과 이해에 앞서 8시간을 객석에 앉아 있어야 하는 몸의 괴로움이 먼저 염려되었지만, 많은 관객들은 전편 공연하는 날을 선택했고 그 날짜들이 먼저 매진되었다. 한두 편 보고 나가겠거니 생각했던 것도 기우였다. 승부에는 관심없이 여럿이 함께 완주하는 데에 목표를 둔 마라톤 선수들처럼, 쉬는 시간이 되면 다음 공연의 대기줄에 줄을 서며 전편을 감상했다. 극단도 놀라운 도전이었고 관객도 스스로 뿌듯한 도전이었다.
4대 장막의 공연이 그저 무모한 도전에, 관객들은 완주의 뿌듯함만 있었을까? 이번 공연의 의미는, 도전 자체는 무모했을지 모르지만, 각 작품별 완성도와 짜임새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이미 10년에 걸쳐 각 작품을 공연한 내공 덕분인지 제대로 잘 만들어진 네 편을 감상할 수 있었고, 그래서 8시간을 아무렇지 않게 견딜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체홉의 작품을 원작대로 올리지 않고 번안한 것이 주목되는데, 각 작품을 어떻게 바꿔냈는가에 대한 기대감이 관극의 신체적 피로감을 잊게 했다. 체홉을 너무나 좋아한다고 밝힌 김연민 연출은 왜 굳이 번안을 했는가의 질문에 체홉의 문제의식이 어느 시대, 어느 공간에서도 적용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했고, 우리의 시공간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사건이고 인물이라는 것을 관객과 공유하고 싶었다고 답을 했다.
번안은 실상 체홉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과 우리의 현실에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한 어려운 작업이다. 이 때문에 작품에 대한 감상과 평가도 다른 기준들이 적용된다. 원작대로 공연한다면 대체로 원작을 제대로 해석했는지, 해석된 내용을 완벽히 알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을 잘 표현했는지 등을 감상포인트로 둔다. 연출가의 해석이 주목받는 이유다. 그러나 번안은 원작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덧붙여 적절한 시공간을 취했는지, 우리의 현실로 적용할 때 어색하거나 이질감은 없는지, 억지스럽지는 않는지 등등 관심을 둘 포인트가 더 많아지고 다양해진다. 연출가 혹은 번안의 주체가 작품과 현실을 얼마나 잘 알고 있고 자연스레 접목시켰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번안된 네 편의 장막은 정말 어느 한 때 우리가 봤던, 혹은 우리 옆에 있던 인물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김연민 연출의 오래된 고민들이 모든 작품들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갈매기>는 1930년대 경성의 종로로 옮겨와 <종로 갈매기>가 되었다. 호수가 있어야 하는 공간적 특성 상 경성 근교가 주된 공간이 되었지만, 원작의 아르카지나가 도시에서 활동하는 배우라는 점을 전제하고 경성의 종로를 불러왔다. 거기에 아직은 남아있는 신분제의 습성, 문학과 예술에 대한 동경 등이 식민지 시기 경성의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졌다. 다만, 니나가 다시 돌아왔을 때의 시간 흐름과 변화는 쉽게 파악되지 못했고 마샤와 메드베젠코의 가족이 얇아진 아쉬움은 남았다.
<쯔루하시 세 자매>는 원작 <세 자매>를 1980년대 일본 오사카 쯔루하시에서 살고 있는 자이니치로 바꿔냈다. 현실과 삶에 대한 결핍과 갈망이 한국이 아닌 오사카에 뿌리내린 자아니치의 정체성으로 선명해졌다.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지만 욕망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한 인물들의 씁쓸함은 1980년대의 오사카에서도 쉽게 발견되는 것이었다. 열심히 살고 있음에도 점점 주변으로 밀려나는 현실, 벗어나고 싶어도 발을 뺄 수 없는 일상의 단단함이 오사카의 세 자매에게도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바냐삼촌>을 1990년대 개발을 앞둔 안산 능길로 가져온 <능길삼촌>은 네 편 중 비교적 번안이 치밀하고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서 가장 자연스러운 작품이었다. 실제로 가장 최근인 2021년에 공연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의 작업 노하우가 축적된 결과로도 해석되는데, 사건은 물론 인물 개개인의 특성까지 매우 한국적이었다. 여기에는 원작보다 더 강화된 어머니 바실리예브나의 역할이 컸다. 사위에 대한 무한한 존경이 아들에게는 희생을 강요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자식에 대한 강요가 익숙했던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왔던 세월이 있기 때문이다. 공간을 고물상으로 설정한 것도 주제와 잘 맞았고, 개발논리도 적절했다. 능길삼촌인 영호 역의 한정호 배우가 보여준 찌질함과 남루함이 짠하고 안쓰러운 건 능길삼촌이 우리 주변에 여전히 많아서일 것이다.
<연꽃정원>은 <벚꽃동산>의 2000년대 경기도 시흥 연성 버전이다. 꽃이 피어야 하고, 그 꽃이 오랫동안 생계이자 권위일 정도로 광활하게 피어야 하고, 시대의 변화에 어쩔 수 없이 팔아버려야 하는 마지막 재산이어야 하는 까다로운 조건들을 실제로 시흥에 있는 연꽃테마파크로 충족시켰다. 거대한 연꽃정원으로 지역의 유지로 행세할 수 있었던 신애네가 결국은 경매로 만식에게 넘겨주게 되는 상황. 아주 간단히 정리하면 지주의 재산이 마름 혹은 소작인에게 넘어가는 것이고, 이 또한 우리에게는 익숙한 부분이다. 이 작품의 압권은 늙은 하인인 피르스이다. 원작에서는 모두 떠나가고 남은 공간에서 사라지는 벚꽃동산 자체인 듯이 홀로 쓸쓸히 마지막을 맞이하는 인물인데, 이 작품에서는 ‘멜빵할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공연 중간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작품의 대미를 장식하는 중요한 인물인데 등장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걱정될 정도였는데, 김연민 연출에게는 계획이 다 있었다. 작품 가장 마지막에 등장한 멜빵할아버지는 전문배우가 아닌 일반인이었다. 이제는 은퇴했지만 한 평생을 자신의 일에 매진했던 분을 섭외했고, 평생을 열심히 살았던 그 마음과 태도에 멜빵할아버지의 대사를 얹어 관객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좀 어색하지만, 긴장이 느껴지지만, 본인이 견뎌낸 세월의 무게와 삶에 대한 진정성이 주는 울림은 이 작품의 마무리로, 그리고 네 편의 긴 장정에 대한 마무리로 최고였다.
네 편의 연속 공연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무대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였다. 서로 다른 극장에서 각기 다른 공연 네 편을 본 적은 있으나, 이 공연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이라는 한 공간에서 네 편이 진행되어야 했다. 작품 4편에서 공간의 교집합이 있던가? 시대도, 공간도 각각 다른 작품인데 같은 무대에서 어떻게 공연할까? 네 편 연속 공연의 기획에서 가장 고민했고 힘들었으리라 짐작되는 것도 무대와 조명이었다. 우려와 노파심을 잔뜩 안고 들어가 마주한 무대는 상당히 영리하게 계산되어 있었다.
김연민 연출은 작품마다 서로 다르게 무대와 객석을 배치했고 연출했다. 공통적으로는 극장 한가운데 대청마루를 닮은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 단을 올리고 사각의 기둥이 설치되어 있어서 실내와 실외를 명확히 구분했다. 사각의 무대 좌우편은 작품마다 다르게 활용되었다. 무대를 정면에서 바라봤을 때 무대 왼편에서 작품이 시작되었다가 마지막에는 오른편 벽면에 객석을 놓고 긴 극장 공간을 모두 통찰할 수 있도록 했다. 주로 활용하는 무대가 작품마다 달라졌기 때문에 객석도 그에 따라 다르게 설정되었는데, 첫 작품인 <종로갈매기>에서는 배우들이 움직이는 주요 공간에 객석을 드문드문 배치했다. 배우들이 관객들 사이를 옮겨 다니는 형국이었다. 첫 작품이니 객석과 무대의 거리를 없애고 친근함을 만들어보자는 의도가 선명했다. 두 번째 작품인 <쯔루하시 세 자매>는 객석이 배우들 공간의 경계면 2면에 자리 잡아 세 자매를 적극적으로 관찰하게 했다. 첫 작품의 객석 자리를 기억했던 관객들은 다시 극장문이 열렸을 때 달라진 객석 위치 때문에 난감해하며 어디에 앉을지 고민했는데, 향후 진행된 공연에서도 객석의 위치를 고민하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능길삼촌>은 대청마루에도 객석을 올려서 배우들의 공간을 4각의 링처럼 만들었고, 마지막 <연꽃정원>에서는 이전 작품에서 먼 공간으로만 한정했던 극장 오른편 객석에 관객을 배치하여 완벽한 프로시니엄 무대를 만들었는데, 관객은 눈앞에 펼쳐진 긴 무대가 마치 4편의 공연이 차근차근 밟아온 여정을 한눈에 보는 듯했고, 그것이 체홉이 말하는 인생,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흔적인 것처럼 여겨졌다. 체홉의 마지막 장막 희곡을 보면서 지금껏 지나온 과정을 통찰하게끔 객석을 배치한 아이디어가 빛나는 부분이었다.
한 극장에서 다른 색깔의 작품 4편은 충분히 공연할 수 있는 것(같은 극장에서 같은 날에 공연하는 ‘신춘문예단막극전’이나 ‘2인극페스티벌’과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다)이었다. 물론 블랙박스씨어터로 활용도가 높은 홍익대아트센터소극장이었기 때문이라 가능하기도 했지만, 배우들의 동선을 무대에 맞게 최대한 고민하고 활용한 점, 중요 무대를 중심에 두고 객석의 배치에 따라 전혀 다른 질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는 점, 관객과의 교감과 소통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취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은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네 편의 공연 순서는 번안된 시대 순서를 따랐다. 193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2000년대. 실제로 초연 공연 순서는 이와 다르다. <종로갈매기>는 2012년, <쯔루하시 세 자매>는 2014년, <능길삼촌>은 2021년, <연꽃정원>은 2017년이다. 번안의 안정적인 성취 여부는 아무래도 최근 공연일수록 효과적이었다. 첫 작품인 <종로갈매기>가 아쉬운 점이 가장 많았고, 상대적으로 <능길삼촌>은 한국작품이라고 해도 바로 수긍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각각 공연되었던 네 편을 모으는 것이 이번 기획의 목표였다면, 다음 개별 작품의 공연(혹시나 재공연 계획이 있다면)에서는 재공연이기에 해야만 하는 치밀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인다. 또한 네 편을 한 번에 놓고 보니 체홉이라는 이름으로 관통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이 발견되기도 했고 각각의 결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결과를 기반으로 개별 작품에 대해 섬세하게 집중한다면 제작기획과 의도에 완벽히 부합하는 성과를 올릴 것이라 생각된다. 어쨌거나, 체홉 4대 장막을 하루에 공연하는 기획, 그 말도 안 되고 어려운 작업을 이렇게 멋지게 했냈다는 점에서 김연민 연출과 출연한 배우들, 제작진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더불어 8시간을 함께 한 관객들에게도.
10년의 세월 동안 체홉 4대 장막 번안을 꾸준하게 작업하고 진행한 김연민 연출은 이번 기획에서 남다른 뚝심과 지구력을 선보였다. 이젠 그 뚝심이 어디로 향할지, 어디에 무게를 실어줄지 몹시 궁금해진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듯 보이지만 실상 연극은 이렇게 ‘우공이산(愚公移山)’처럼 뭉근한 사람들이 은근하면서도 든든하게 끌고 가는 것이 아닐까? 무슨 꿍꿍이를 하고 있는지, 어떤 도전을 선보일지 예측 불가한 괴물 같은 김연민 연출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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