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홍혜련(배우, 드라마투르그)
※필자 주: 본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카운트도 인간이 만들어낸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도대체 왜 그럴까. 인간, 짜증나.
이런 상황을 만든 것도, 이런 상황에서 장난을 치는 것도 너무 지겨워.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연의 모습이 우습냐?”
멀지 않은 미래, 40일 동안 계속된 큰불로 지구 위의 모든 것이 불타고 있다. 지구 생명체의 생존을 위해 세계 각지에서 동물, 식물, 인간 종 중 선택받은 자들을 태운 배가 출항하고, 그 배에서 또다시 최종적으로 생존할 자를 가리는 서바이벌 게임이 시작된다.
2023년 두산인문극장 기획, 정진새 작·연출의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이하 <너의 왼손이>)>는 곧 닥칠지도 모르는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연극이다. SF 연극답게 주인공들은 과학자들이다(한 명은 과학자가 될 뻔했지만 결국 미 우주군 소속의 공군이 되었다. 미 우주군이라니, 의미심장하다). 이들은 명실상부 현 인류 최고의 지성들이다. 그런데 식물, 동물과 동등한 입장에서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한다니, 이 어이없는 상황에 대해 인간은 “내가 저따위 식물, 동물들과 경쟁해야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이냐”라고 항변한다. 인간, 식물, 동물 참가자들이 생존을 놓고 해야 하는 서바이벌 게임이란 바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위바위보. 이 게임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종 특성상 상대방이 무얼 낼지 미리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인즉슨 인간이 승리할 수도, 스스로 지는 것을 선택할 수도 있는 뜻이다. 지구상 가장 위대한 종이라 자부하는 인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연극 이야기를 더 하기에 앞서. 수년 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겨우내 산에 사는 야생동물들의 식량을 보존하기 위해 야산에서 도토리를 줍는 일이 금지한다는 소식을 접한 한 청취자가 “도토리묵을 쑤어 먹으려고 했는데, 도토리를 줍지 못하게 되어 너무 속상해요. 다람쥐보다 인간이 먹는 게 더 중요하지 않나요?”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람쥐는 인간의 식도락을 위해 죽어도 되는 존재라고 생각한 것일까?
다시 연극으로 돌아와서. 그런데 대위기의 재난을 맞아 제일 먼저 살아남아야 하는 종은 인간이라고 소리 높여 주장하는 이들에 맞선 별종 인간이 있었으니, 바로 식물학자 에이프릴이다. 그는 잣나무 씨앗의 생존 대리자로서 이 배에 탔다. 그에게 식물은 지구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나 언뜻 생명옹호자로 보이는 그 역시 또 다른 ‘미친 과학자’일 뿐이다. 에이프릴은 지구 생명의 근간인 식물을 먹는 포식자, 또 그 위의 포식자, 그 위의 포식자들이 모두 사라진 제로베이스 상태에서 식물로부터 모든 것을 새로 재건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는 마치 신과 같은 태도로 전체 생명의 존망을 이야기한다. 이 역시 인간만이 부릴 수 있는 오만이다. (인간만이 이런 오만함을 갖는다고 말하면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인간으로서 오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계가 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에이프릴은 식물들과의 신경연결망을 통해 식물들이 불을 내게 만든다. 식물이 불을 내다니? 식물들은 줄기에서 물을 모두 내려 바싹 마르게 한 다음 바람을 이용해 가지를 부딪쳐서 불을 낸다. 인간만이 불을 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인간들을 향한 복수처럼도 보인다. 그런데 연극의 반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에이프릴의 신적인 욕망만 있었다면 화재가 이렇게 지구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이프릴과 같은 과학보육원 리틀노벨스 출신인 메이는 노벨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고도 아직 더 이루고 싶은 것이 있었다. 자신의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 누가 자기를 갖다 버렸는지 알아내고 싶었던 메이는 미 우주군으로서 전 인류를 감시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리틀노벨스 출신의 옥토버와 공모해 수색을 시작한다. 그러나 엄청난 데이터를 처리하기 버거웠던 데이터센터에 불이 붙었고, 이 불은 때마침 에이프릴에 의해 시작된 불을 통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인 식물들의 뿌리 신경망을 모두 불살라 버렸다. 결국 한 인간의 극한 오만과 또 다른 인간의 극한 이기심이 부싯돌처럼 부딪치며 모든 생명체를 불구덩이에 던져 버린 것이다. 에이프릴, 메이, 옥토버가 함께 자란 과학보육원 리틀노벨스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인류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낸 인간이 결국 인류를 멸망으로 몰아넣다니 참으로 인간답다.
마침내 서바이벌의 결승전,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장본인인 인간 대표, 메이가 식물고아원의 어린 느티나무와 맞붙는다. 가위바위보의 비밀을 풀어낸 메이는 절대로 지지 않을 방법을 알고 있다. 과연 메이의 선택은?
<너의 왼손이>가 그리고 있는 미래는 닥칠지도 모르는 미래가 아니라 이미 시작된 미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대화재는 이미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기후변화로 인한 것이고, 그 근원에 인간의 활동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눈감고 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실’이다.
관극을 마치고 공연장 밖으로 나오니 세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장마는 빗소리를 들으며 부침개와 막걸리 한잔을 떠올리는 낭만적인 것이 아니게 되었다. 세계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단독으로 살아남는 세계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코로나로 경험했다. <나의 왼손과>를 쓰고 연출한 정진새는 코로나를 겪으며 인간 다음의 세상을 생각하며 이 연극을 구상했다고 전한다. 과연 다음 세기에도 인간이 지구상에 남아 있을까. 연극 속에서 마침내 시간을 통제하는 법마저 알아낸 메이가 미래에서 미치마우스를 보내 알려 줄 순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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