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배우 장용철이 만난 풍경_ 연극과 사람 4호

 

글_장용철(극단 작은신화, 좋은희곡읽기모임)

 

 

용기있는 진지함과 명랑한 유희의 대립

 

‘무엇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말하려고 했다’는 것을 직감하고서 오래된 소극장으로 달려갔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 객석을 떠나면서도 내가 제목을 오독했다는 걸 몰랐습니다. 직감이란 한 순간 오독의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깨달은 것은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계단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고도 나는 속으로 말했으니까요. 이솦우화라고? 이솝우화라며!

 

 

극장 밖에서 만난 김단추 작가는 ‘(이솝우화가 아니라) 이숲우화입니다! 라고 내 말을 교정했습니다. 몇 번씩이나. 나는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히스토리아)’에 따르면 아이소포스(이솝)는 기원전 6세기에 살았고, 사모스 시민 이아도몬의 노예로 이야기를 잘하는 재주가 있었는데, 마침내 자유인이 되어 각지를 돌아다니며 지혜가 담긴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으나 그를 질투한 델포이 시민들에게 무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스인 이야기>(앙드레 보나르 작, 김희균 양영란 옮김, 책과함께. 2011)를 탐독하고 있던 내 눈이 그랬는지, 그를 흠모하던 내 마음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명백하게 내 탓이지 작가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고, 다만 직감은 필연적으로 오독을 충동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필연적인가? 니체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용기 있는 진지함과 명랑한 유희의 대립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오류를 저지르게 될 것이다.’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니체. 이진우 옮김. 책세상.)

그 페이지 전체 맥락과 관계없이 위 문장만을 앞세워 질문합니다. 이 시대는 어떠한가? 진지함과 유희는 어떻게 대립하고 있는가? 진지함에 꼭 필요한 용기란 또 무엇이고, 유희란 참혹한 우리 앞에서 얼마나 명랑한가? 우리가 다시 사뭇 진지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를 유혹하는 이 명랑함과는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야 하나? 그리고 현재 우리의 오류는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이것은 정말로, 진짜로, 불멸의, 오류인가?

 

 

해석자, 인터프리터 Inter-Preter 사이에서 말하는 자

 

결국, 우리는 종종 해석자의 절실함에서 발생하는 어떤 진지함에 대한 충동에 직면하며, ‘사이에서 말하는 사람’의 당혹감을 경험합니다. 그것은 명백하게도, 길을 잃고 헤매던 집에서 뛰쳐나가, 너무 오래되어 아련한 추억이 된 길을 따라 어느덧 울컥할 정도로 정겨운 산울림 소극장에 도착하기 직전까지의 내가, 객석에 앉아있던 나와 겹쳐지면서, 나는 무엇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보고 싶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어떤 직감이 어떤 절실함에서 출발한다면, 심각한 오독이 일어났던 까닭은 그 절실함에 있었습니다.

김단추 작가 역시 ‘짐승의 이름을 가진 사람의 관계와 우리 연극 현장’에 대한 해석자의 입장에서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할 일종의 아포리즘을 발굴하고 있었습니다. 2023년 산울림소극장 고전극장 <이숲우화>에서 무엇인가 진지하고 절실한 것을 찾아내야 할 의무는 그러므로 다시 관객 몫으로 남았습니다.

<이숲우화>의 마지막 장면 <달에 간 까마귀>는 우리의 모습을 절실하게 각성토록 합니다.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우화 속에서 살고 있으며, 등장인물인 ‘두 배우와 연출자, 그리고 까마귀들, 그 울음과 웃음소리들’의 명쾌한 해결과 기쁨의 환호성은 곧이어 우리를 우화 속으로 한 뼘 더 밀어 넣었습니다. 절실함을 명랑함으로 바꾸어 보여준 <이숲우화>에게 손뼉 칩니다.

말보다 침묵이, 삶보다 죽음이! 여기 남겨진 우리를 깨닫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비극을, 그것도 고대 그리스 비극을 다시 읽어야 하는가? 에 대한 생각은 사라지고, 우리 소극장의 안팎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기쁨과 슬픔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질문이 남았습니다. 소극장에서의 우화를 현실에 빗대면서. 우화보다 못한 이 세상을 용케 모른 척하면서. 그러나 도통 이해 불가한 이 세상에서,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연극을 만드는 사람에 대한, 만들어 놓고 관객을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연극에서 반드시 등장하는 사람 혹은 짐승에 대한, 그리고 이 시대의 연극 그 자체에 대한 진지함과 명랑함 그리고 용기와 유희는, 오늘의 나를 무릅쓰게 합니다.

 

무릅쓰다는 어떻게
무릎 쓰는 일이 되는가
슬픔의 무게로 세상을 뒤집어서 머리에 덮어쓰는 일
무릅쓴다는 것은,
그럼에도 과거가 현재를 지배하도록 놔두지 말 것!
무릎을 쓴다는 것은
무릎 가진 짐승들만의 운명 아닌가
슬픔의 무게는 시간의 무릎을 갉아먹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만, 오늘도
용서받기 위해서 읽는 사람에게
용서하기 위해서 쓰는 사람에게
해야 할 일을 해낸 사람들에게

이만큼 고개 숙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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