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배선애(연극평론가)
올해 ‘산울림 고전극장’의 테마는 ‘고전문학-이야기의 기원을 찾아서’이다. 이른바 고전이라고 명명된 작품들의 원형을 짚어본다는 의미로 해석되는데, 기획된 4편의 작품들을 보면 기원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매우 막연하고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네 편 중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이야기의 기원에 비교적 가까운 작품이 아마도 <이숲우화-짐승의 세계>(김단추 작, 김헌기×김솔 연출, 창작집단 우주도깨비×보통현상, 산울림소극장, 2023년 8월 9일~20일. 이하 <이숲우화>)가 아닐까 싶다.
그리스 시대 노예출신이었던 아이소포스가 지어낸 이야기들은 동서양 설화의 비슷한 모티프를 공유하고 있는 이야기의 원형에 해당한다. 이솝우화가 동화로 널리 향유되는 덕분에 ‘우화’ 자체가 아동용 이야기 작법으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이솝우화에 대한 익숙함과 친근함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숲우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사랑받고 있는 이솝우화를 현대적으로 패러디한 작품이다. 특히 부제인 ‘짐승의 세계’는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동물’이 아니라 거칠고 투박하고 본능에 입각한 ‘짐승’을 말하고자 한다는 패러디의 의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 의도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잘 성취되었는가는 찬찬히 살펴볼 일이지만, 일단 몽글몽글한 이솝우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 강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작가와 연출, 활동 타이틀을 바꾸다
<이숲우화>에서 먼저 주목된 것은 만든 사람들, 창작진의 면모이다. 작가는 김단추, 연출은 김헌기와 김솔. 최근 ‘프로젝트10minutes’에서 <그래, 넌 행복한 왕자지>를 통해 기발한 상상력과 언어유희를 선보인 김단추 작가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사진도 잘 찍어서 포토그래퍼라는 직함도 갖고 있고, 디자인 감각도 뛰어나서 수많은 연극 작품의 포스터를 만든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이번 작품에는 대본도 쓰면서 연출과 출연까지 했다. 바로 김솔 작가이다. 작품을 쓰고 싶어 했고, 배우로 무대에 서고 싶어 했던 김솔 작가의 욕망이 차근차근 실현되더니 이번 작품에서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다 한 셈이다. 재주 많은 김단추 작가, 김솔이다.
작가만 그럴까? 연출에 김솔과 함께 이름을 올린 김헌기 연출도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작가로 작품을 쓰고 종종 연출도 하지만 더 왕성한 활동은 음악과 음향 분야에서 진행된다. 작품과 잘 녹아들면서도 묘하게 귓가에 잔상처럼 맴도는 멜로디와 리듬, 이걸 누가 만들었지? 하며 명단을 찾아보면 항상 ‘옴브레’라는 이름이 보인다. 작가, 연출가 김헌기는 음악·음향 디자이너로 더 친숙한 옴브레다.
김단추, 김헌기는 아직 낯설지 몰라도 김솔과 옴브레는 너무나 익숙한 이름들인데, 주로 스태프에 이름을 올린 이들이 작가와 연출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야전의 달인들이 중앙사령관실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랄까? 기존에 알고 있던 스태프 김솔과 옴브레가 얼마나 잘 쓰고 잘 연출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김단추 작가와 김헌기 연출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를 봐야하는 것이 <이숲우화>의 중요한 관극 포인트였다. 역시 재주 많은 사람들이었다.(이 작품에서 배우로 출연한 이보미 또한 김단추의 전작인 <그래, 넌 행복한 왕자지>의 연출가이다.)
언어유희 속 번뜩이는 현실 감각
김단추 작가는 장막 공연은 <이숲우화>가 처음인 신인 작가다. 극작술의 특징이나 개성을 논하기에는 선보인 작품들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것은 웃기다 못해 어이없는 언어유희가 작품의 중심 정서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여우와 두루미’ 편의 여우같은 경우 울고 있는 여우에게 친구들이 “야, 우냐?” “여~ 우냐?” “여우냐?”라고 물어보면서 자신의 이름이 여우가 됐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베짱이는 배가 짱짱하게 나와서 베짱이이고, 거북이는 속이 거북하다고 거북이다. 발음만 비슷할 뿐 쉽게 연결될 수 없는 것들인데도 그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설득력이 생긴다.
<이숲우화>는 네 편의 이야기가 묶여 있다. ‘여우와 두루미’,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달로 간 까마귀’. 이솝우화 중에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지만 김단추 작가는 기존의 것에서는 이름만 가져왔을 뿐 현대적으로 비틀어버렸다. 채식주의자 여우와 두루미의 사랑 이야기, 오래되어서 지독히 권태로워진 부부 토끼와 거북이, 관리라는 이름으로 몸에 집착하는 개미와 베짱이, 반짝이는 예술을 위해 갈등하고 화해하는 까마귀 연극의 연출과 배우들. 네 편의 이야기는 각각 사랑, 가족, 외모와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품 처음에 작가 사인회를 설정해서 이솝이 직접 나와 작품을 설명하는 장면이 있지만, 네 편의 이야기들은 각기 독립되어 있고 개별적이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이 마주하는 현실들이 그림처럼 펼쳐지며 그 안의 인간들은 마치 숲속의 짐승들처럼 욕망을 감추지 않는다. 언어유희, 말장난의 홍수 속에서도 현실에 대한 풍자가 비수처럼 번뜩이는 묘한 작품이다. 그저 우습게만 치부하기엔 어딘가 찌릿하고, 그렇다고 무거운 무언가를 찾으려면 한없이 가벼운 그런 묘함. 김단추 작가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싶은 이유는 그 묘함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다.
‘함께 하기’의 시너지가 발휘된 무대
<이숲우화>의 두 연출, 김헌기와 김솔이 어떻게 작업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배우들을 통해 구현된 장면을 보면 ‘함께 하기’가 충실히 수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배우로서 민망할 수도 있는 대사들, 현실웃음을 꾹꾹 참으며 발화할 것 같은 대사들을 너무나 태연하게 말하는 것을 비롯해서 개연성에 따라 움직이는 관습에서 벗어나 맥락 없이 전개되는 사건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듯이 연기하는 천연덕스러움은 작품의 많은 것들을 함께 공유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달로 간 까마귀’는 마치 이 작품의 실제 연습실을 연상시킨다. 연출이 직접 쓴 대본을 들고 연기해야 하는 배우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사와 전개로 난감해한다. 서로가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고 있으나 각자의 이해도가 달라 계속 부딪힌다. 한참 그러다가 문득 작품의 주제를 스스로 깨달은 배우에게 감화된 연출과 다른 배우는 그 힘으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대사로 내뱉기 힘들었던 “깍깍 깍깍깍!”을 자신도 모르게 외치게 된 것이다. 이 모습이 실제 <이숲우화>의 연습실 풍경처럼 겹쳐 보인다. 설명하면 할수록 점점 늪으로 빠지는 듯한 작가의 설명, 그럼에도 뭔가를 분명히 알고 있을 것 같은 연출과 작가의 디렉션, 늪에 빠진 것을 알면서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이해하려는 배우들, 그렇게 다 같이 고민하고 갈등한 끝에 도달한 “깍깍!”. 그러다보니 이자경, 김솔지, 이보미 배우가 까마귀가 찾아다니던 반짝이는 보석이었다. 개인 역량도 뛰어난 배우들인데 함께 어우러져 다양한 역할들-동물 이름을 사칭한 인간-을 다채롭게 표현해냈다. ‘함께 하기’의 시너지를 잘 보여준 경우라고 하겠다.
(김헌기 연출이 잘한 것 중 하나는 김솔 배우를 초반에 등장시키고 그 이후로는 객석에 앉혀두었다는 점이다. 배우 역량의 편차가 너무 커서 극 진행에 방해가 될 때에는 연출이 과감한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개인적 친분 때문에 건네는 말이지만, 김솔 작가가 배우로서의 욕망을 실현하고 싶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연기 연습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등장만으로도 웃음이 터지는 배우와 함께 하는 것, 연출로서는 아주 큰 모험이다.)
<이숲우화>는 분명 거칠고 산만한 작품이다. 이것을 창작진이 지향했다면 제대로 목적 달성을 한 셈이다. 이른바 B급 정서는 거칠고 산만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막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B급 정서는 생각보다 정교하게 많은 것들이 계산되어야 제대로 구현되는 아이러니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 면에서는 정교한 계산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이숲우화>의 아쉬운 점이다. 어이없는 언어유희가 난무하고, 각 장면은 뚝뚝 떨어져있고, 배우의 연기에 즉흥성이 묻어나도, 이 모든 것을 세밀히 들여다보고 신중하게 다듬었다는 흔적이 발견되었다면 진심으로 혹은 어이없어 웃으면서도 흐뭇했을 것 같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언어유희의 즐거움과 풍자를 중요 특성으로 내세운 김단추 작가의 향후 행보는 분명 기대가 된다. 다음에는 어떤 언어로 어떤 이야기들을 우습게 꼬아내고 비틀어버릴지 궁금하다. 김헌기 연출 또한 음악이라는 한 분야가 아니라 무대를 총괄하여 운용하는 감각이 향후 어떻게 확장될지도 궁금해진다. 여러 가지가 궁금하고 기대를 갖게 된다는 것은 분명 장점이다. <이숲우화>는 창작의 경계를 넘나드는 짐승의 세계를 발견하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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