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이재진
헵벨(Friedrich Hebbel. 1813-1863) <마리아 막달레나>, <유디트>
침대 옆 책상머리에는 내가 섬기는 스승이 몇 앉아 있다. 그분들에게서 나는 언어의 유희를, 삶의 진지함을, 인간의 아픔을 읽으며 배웠다. 셰익스피어나 괴테는 이제 너무 늙었다. 그래도 헵벨은 요란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고 모나지 않아 언제나 낯설지 않다. <마리아 막달레나>에서는 가난에서 시작한 고통이 곳곳에 슬며시 배어 나온다. 피조물로 태어난 인간의 아픔이 아무리 숨기려 해도 자연스레 장면 사이마다 흥건히 젖어있다. 너무나 조심스럽게 내 가슴을 잔잔히 흔들어 놓는다. 그 아픔은 셰익스피어처럼 고루하지 않다. 괴테와 같이 화려하지 않다. 실러처럼 고상하지 않다. 그렇다고 클라이스트의 광기 어린 아픔하고도 다르다. 베데킨트처럼 난해하지 않다. 놀이터를 배회하는 뒤렌마트와 다르다. 브레히트처럼 골치 아프게 변화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때로 <유디트>에서처럼 폭풍우 같은 분노가 솟구치기도 한다.
독일의 시민비극(市民悲劇)은 영국, 프랑스에 비해 조금 늦게 자리 잡게 된다. 주인공들의 신분은 귀족에서 시민으로 내려온다. 귀족에게는 비극이, 서민들에게는 희극만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장르의 생성당시에는 시민비극이란 용어자체는 모순되는 의미를 가졌다. 독일의 시민비극은 레씽의 <에밀리아 갈로티>를 시작으로, 실러의 <간계와 사랑>으로 이어지고, 끝내 헵벨의 <마리아 막달레나>에서 틀을 잡게 된다. <마리아 막달레나>에 이르면 같은 신분간의(시민) 비극이 벌어진다. 이제 신분간의 갈등이 아닌 소시민적 퇴폐적인 사고방식, 고루한 도덕성이 시민비극의 주제가 된다. 레씽은 앞으로의 세상은 시민사회가 이끌게 되리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시민비극을 미래지향적인 연극형식으로 보았다.
1) <마리아 막달레네>(Maria Magdalene. 시민비극. 1844)
독일 최초의 시민비극에 속하는 레씽의 <에밀리아 갈로티> 등에서는 최소한 한쪽은 여전히 귀족이다. 헵벨에 이르러 남녀 두 신분이 모두 평민이 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러므로 글자 그대로 독일 최초의 시민비극으로 분류되며, 신분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도 엄청난 비극이 가능하다는 헵벨의 비극을 ‘범 비극론’(pantragism)이라 한다.
작품구조에서도 고전주의 비극하고는 조금 다르다. 고전주의 비극은 주로 5막으로 짜여있으나 헵벨은 시민비극을 소재의 본질을 따져 3막으로 구성했다. 즉 이야기의 흐름이 더욱 집약적으로 되고, 그에 따라 비극성은 더욱 진해지고, 탈출구가 닫혀있는 좁은 시민세계의 한계를 좀 더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원래 붙여진 제목은 ‘클라라’(Klara)였지만 출판사의 권유로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 막달레나’로 바꾸었다.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는 회개하는 죄지은 여인으로 상징되어 있다. 헵벨의 여주인공 클라라는 회개하는 여인이라기보다는 불행하고 가엾은 여인에 가깝기 때문에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여제자하고는 거리가 제법 있다. 출판사의 실수로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가 아니라 <마리아 막달레네>(Maria Magdalene)로 제목이 바뀌어 인쇄되었는데도 작가가 이를 고치지 않고 내버려 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1843년 완성된 이 시민비극은 1848 뷔엔나의 부르크테아터(Burgtheater)에서 무대에 오른다. 관객의 반응은 엄청났고 연극사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클라라의 약혼자 레온하르트(Leonhard)는 아직 직장이 없어 결혼을 기다리는 중이다. 클라라는 서둘러(!) 결혼해야 될 형편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 안톤(Anton)은 직장이 없는 남자에게 딸의 결혼을 허락할 분이 아니다. “마누라에게 줄 가슴속의 사랑보다는 선반 위의 빵을 더” 결혼의 전제 조건으로 삼기 때문이다.
레온하르트는 클라라의 아버지로부터 지참금으로 마련해둔 돈이 값싼 동정심으로 사라져 버린 사실을 알게 된다. 지참금도 없어지고 클라라와 헤어져 시장 조카딸과 수작을 꾸미려고 무슨 핑계를 찾던 레온하르트는 이별의 편지를 써서 클라라에게 전해준다. 안톤은 절망적인 딸의 안색을 보고 편지의 내용을 대강 짐작한다. 죽은 엄마의 시신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게 시킨다.
안톤: 죽은 어미의 손을 잡고 맹세해라, 너는 원래의 타고난 네 몸 그대로라고!
클라라: 맹세합니다, 아버지를 – 절대 – 부끄럽게 하는 일이 – 없도록- 하겠습니다!
안톤: 좋다.
안톤은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더욱 곤혹스럽고 불안하다. 안톤은 딸에게 문제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클라라가 가족의 명예를 더럽히면 자살하겠다고 아버지는 끝내 딸을 위협한다.
안톤: … 사람들이 네게 손가락질을 하는 걸 보게 되면, 그 순간 나는 (손으로 목을 둘러대며) 여기를 면도날로, 너에게 맹세한다만, 면도날로 이 몸을 아주 끝장내고 말 것이다. … 나는 사람들이 내게 침은 뱉지 않고 동정심이나 보여주는 그런 세 상에서는 견딜 수 없다.
클라라: 오 하나님, 저보고 어찌하라고요!
레온하르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는 자기 어깨에 떨어진 엄청난 짐을 벗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목숨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지 않으려면 자신이 죽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다. 도둑누명을 썼던 아들은 혐의가 없음이 밝혀지고 풀려난다. 이에 안도한 클라라는 도둑의 집과 결혼할 수 없다고 파혼한 레온하르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는다. 이 길만이 아버지를 살리고 자신을 살리는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결혼해 주세요!”라는 처절한 애원장면(3막 2장)이다.
클라라: … 아버지는 목을 따실 겁니다, 만약 내가 – 결혼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 당신 아버지가 – … 당신 맹세할 수 있소, 나를 사랑한다고? 그렇게 사 랑한다고, 한 처녀가 한 남자를 죽도록 사랑하듯, 영원히 한 몸으로 맺어지기를 운 명으로 생각할 정도로?
클라라: 아뇨, 그렇게 나는 맹세할 수 없어요! 하지만 이렇게는 맹세할 수 있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영 당신은 알지 못하게 되리라고요! 당 신에게 봉사하겠어요, 당신을 위해 일하겠어요, 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아도 상관 없어요, 나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할 테니까요, … 그렇다고 그리 오래 살지도 않을 게요. 그런데 당신 생각에 내가 너무 오래 산다 싶으면, 나와 헤어지는데 이혼비용 이 아깝다 싶으면, 약국에 가서 독약을 사다가 쥐 잡으려고 사 온 것처럼 아무 데나 놔두세요, 당신이 눈짓 한 번 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죽어가면서 이웃에게는 이렇게 말할게요, 짓이겨 놓은 가루 설탕인 줄 알았다고! … 부르시지도 않았는데 그곳에 왔다고 하나님이 나를 쳐다보시지 않았으면! … 심판의 날 심판자 의 질문에 더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거예요, 너는 왜 자살을 했느냐를, 너는 왜 아비 를 그토록 죽게 했느냐 라는 질문보다는.
레온하르트: 당신은 처음이자 마지막 여인인양 말하는구려! 수천의 여인이 당신 보
다 앞서 그런 일을 견뎌냈고 결국 그에 따르게 되었고, 당신보다 후에 수천의 여
인이 이런 문제에 휩싸이겠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
클라라에게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버지를 살리려면 자신의 죽음밖에 없는 것이다.
클라라: (다시 들어오며) 마지막이 될 거야, 아버지의 저녁 식사를 불 위에 올려 놨 어. 부엌문을 닫으며 이제 다시는 이곳에 들어오지 않겠구나 생각하니 온몸에 소 름이 끼쳤어! 그렇게 이 방에서, 이 집에서, 이 세상에서 떠나가게 될 거야! … 이제 는 이웃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거야, 운 사납게, 미끄러져서 우물에 빠졌구만! … 오 늘은 보름달이야! 오 하나님, 제가 갑니다, 제가 가지 않으면 아버지가 가실테니까 요! 용서하십시오 – 나에게 자비를 내려 주십시오 – 자비를 – (퇴장) ” (클라라는 우물에 뛰어든다. 시체를 들고 사람들이 몰려 들어온다.)
안톤: (단호하게, 막이 끝날 때까지 동요 없이, 아들에게) 어머니가 누워있던 뒷방 으로 모셔라! … 이놈의 세상 나는 이해할 수 없다!
2) <유디트>(Judith. 5막 비극. 1840)
헵벨의 드라마 중 첫 번째 작품이다. 유디트란 이름은 ‘Juda의 과부’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루터가 유디트 서의 이야기가 비극의 좋은 소재가 될 수 있다고 권장한 덕인지 중세 학교극에서 많이 애용되던 소재였다. 사랑이란 주제와 영웅적인 살인이란 주제가 19세기까지 서로 번갈아 이어오다가 <유디트>에서 두 주제가 하나로 엮어진다.
구약성서 외경 중 네 번째 이야기. 아시리아의 왕 느부갓네살이 파견한 홀로페르네스의 군대가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관문인 베툴리엔이란 조그만 유대인 마을을 덮쳤을 때 유디트란 여인이 하녀 미르짜와 단둘이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마음을 빼앗은 뒤 술 취한 적장의 머리를 자르고 마을을 해방시킨다. 이 유디트 전설은 문학에서뿐만 아니라 오페라나 회화에서까지 즐겨 다루는 소재로 애용되어 왔다. Botticelli, Michelangelo, Tizian, Rubens 등이 그린 유디트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르는 장면은 유럽의 미술관을 두루 장식하고 있다.
성스러운 유디트와 폭군의 모습을 띤 홀로페르네스의 이야기는 16세기의 드라마에 자주 등장한다. 19세기에 이르면 유디트의 성스러운 종교적 색채는 점차 퇴색하고 그 대신 두 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이 비극의 주요인으로 자리 잡게 된다. 장 지로도(J. Giraudoux)의 작품에서 유디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살인까지 행하는 믿음이 깊은 여인으로 분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연인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게 된다. 때로는 적장으로부터 처녀성을 잃은 유디트가 자신의 끓는 젊은 피에 대한 수치심이 일어나 적장을 죽이는 작품도 있다. 이 소재를 두고 헵벨만큼 한 여성의 심리적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작가는 없을 것이다.
(유디트가 머리를 산발하고 비틀거리며 뛰어나온다. 두 번째 휘장이 걷혀 있고 그 사이로 홀로페르네스가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이고 머리맡에 커다란 칼이 걸려있다.)
유디트
… 미르짜, 나는 한낱 계집이야. 내 말을 잘 들어, 그리고 나의 부탁대로 해줘. 내가 힘이 다 떨어져 기절해 쓰러지게 되면 내게 물을 끼얹지는 말아. 소용이 없을 테니까. 그 대신 내 귀에 소리를 쳐줘, 너는 창녀야 이렇게. 그럼 나는 벌떡 일어나 너를 움켜잡고 목을 졸라 죽이려 들 거야. 그럼 또 이렇게 말해줘, 홀로페르네스가 당신을 창녀로 만들었는데, 아직 그 사람은 살아 있잖아요, 이렇게! … (침실을 가리킨다.) 내가 저곳에 들어갔을 때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은 널찍한 침대였어. 그 끔찍한 사람 앞에 나는 무릎을 꿇고 신음하듯 외쳤지: “용서하세요!” 너무 무서워서 내 영혼 저 밑에서 터져 나오는 나의 외침을 들어주었다면 나는 절대로, 절대로 저 이를 – 저 사람의 대답은 – 저 이는 내 적삼을 찢어 내더니 내 젖가슴을 움켜쥐더군. 그 인간이 내 입술을 사납게 더듬자 나는 그 사람 입술을 깨물며 달라붙었지. “당신 너무 열 내는군! 조금 식히시지!” 비꼬듯 그 인간은 웃어 젖혔지. 이때 나는 의식은 없었어, 오직 몸에 경련만이 일어났지. …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 긴 칼이었어. … (침실로 뛰어 들어가 큰 칼을 끌어내린다.) 마음대로 즐기고 나더니 이리 평안히 자다니, 이런 뻔뻔스러운 사람이 있을까? 그럼 나는 벌레란 말인가, 마음대로 발로 짓밟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잠이 들다니. 나는 벌레가 아니야. 미소를 띠는군, 나를 끌어당길 때도 이렇게 싱긋이 웃었지. 빨리 죽여라, 유디트! 이 사람은 꿈속에서 두 번째로 너를 욕보이고 있다. 아직도 망설이는가, 그러면 저 사람의 몸속에 숨어 있는 굶주린 욕정이 다시 꿈틀거려 또다시 너를 덮칠텐데도!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내리친다.) … 홀로페르네스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 기도해줘, 미르짜! 이 몸뚱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게 해 달라고. 그분은 내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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