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주하영(공연 비평가)
15년 동안 죽은 자들이 누워있는 묘지를 자신의 정원처럼 가꾸면서 홀로 살아가고 있는 중년의 여인이 있다. 밝은색의 하늘거리는 원피스 위에 어두운색 롱 재킷을 걸치고, 모종삽과 물뿌리개를 들고 무덤 주변을 돌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꽃을 심는 여인…. ‘묘지 관리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비올레트’라는 이름의 이 여인은 프랑스 ‘브랑시옹엉샬롱’ 묘지에 안장되는 사람들에 관한 것들을 기록한다. 장례식이 있던 날의 날씨는 어떠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는지, 어떤 추도사가 있었는지, 비문에는 뭐라고 적혀 있는지를 기록하는 여자는 산 사람을 기억하듯, 죽은 자들의 무덤을 기억한다. 비올레트는 왜 죽은 자들을 돌보며 묘지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일까?
마르세유에 살고 있는 경찰 줄리앙은 397km가 떨어진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브랑시옹엉샬롱 묘지에 도착한다. 브랑시옹엉샬롱 묘지에 묻혀 있는 가브리엘 프뤼당이라는 남자 곁에 유골함을 안치해달라는 어머니 이렌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유언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의 무덤인지, 어머니와 어떤 관계인지 혼란스러움을 겪으며 도착한 곳에서 줄리앙은 묘지를 관리하고 있다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여인과 마주한다. 남편이 14년째 실종 중인 여자는 묘지에 묻힌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직업을 떠올리며, 주변에 꽃을 심고, 채소를 기른다. 왜 그런 일들까지 하냐는 줄리앙의 질문에 여인이 답한다. “그냥 주어진 일만 하고 살면, 인생이 좀 서글프잖아요!” 줄리앙은 생각한다. “도대체 이 여자는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된 거지? 이 여자가 어디에서 왔고,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알아야겠어!”
우란문화재단은 “프랑스에서 가장 사랑받는 소설가 10인 중 한 명”으로 일컬어지는 발레리 페랭(Valérie Perrin)의 2018년 소설 『꽃병물갈이(Changer l’eau des fleurs)』를 2인극으로 각색한 동명작품을 국내 초연했다. 2021년 프랑스에서 초연되며 “시로 물든 삶에 대한 찬가”라는 평가를 받은 연극 <꽃병물갈이>는 원작 소설의 시적인 아름다움과 따뜻한 위로, 삶을 향한 감동을 무대 언어로 잘 전환한 작품이다. 총 94개의 짧은 챕터들로 이루어진 페랭의 소설은 누군가의 묘에 비문으로 사용된 문장들을 각 장의 서두에 붙이고 있다. 시나 노래에서 발췌되거나 익명으로 사용된 비문들은 독자들에게 오랜 여운을 남기며, 삶과 죽음, 사랑과 미움, 기억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각색을 맡은 캐롤라인 로슈포르(Caroline Rochefort)와 미카엘 시리니앙(Mikaël Chirinian)은 소설을 연극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94개의 비문들 가운데 선별된 것들만을 각 장면을 여는 문장으로 활용한다. 그로 인해 관객들은 무대가 각자 다른 사연을 품은 죽은 자들의 ‘집’과 같은 ‘묘지’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연극 <꽃병물갈이>는 소설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비올레트와 줄리앙의 만남’과 줄리앙의 어머니 ‘이렌 파욜과 가브리엘 프뤼당의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만 집중한 특징이 있다. 물론 소설의 핵심인 필립의 실종과 레오닌의 죽음뿐 아니라 묘지의 이전 관리인 사샤의 가르침, 비올레트의 유일한 친구 셀리아에 대한 언급도 있지만, 비올레트의 내레이션이나 줄리앙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략적으로만 맥락이 전달될 뿐이다. 페랭의 소설 속에 담겨 있는 비올레트를 둘러싼 더 많은 인물들의 아픔과 고통, 관계의 복잡한 문제들은 생략되어 있다.
페랭의 소설은 엄마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사산아로 태어나 가까스로 생명을 부지한 비올레트가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살아가다 ‘필립 투생’이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레오닌’이라는 딸을 낳아 ‘가족’을 이루고 살던 삶에 많은 챕터를 할애한다. 또, 남편 필립의 삶에 대한 부분이 줄리앙에 대한 부분보다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비올레트의 삶이 어떤 비극을 지나 브랑시옹엉샬롱 묘지에 이르렀고, 필립이 어떤 이유로 그 누구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는지의 과정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제시되며 퍼즐을 맞춰 나가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독자들은 마치 범인을 찾는 탐정 소설을 읽듯, 무엇 때문에 비올레트와 필립의 딸 레오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인지, 필립이 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에 대해 궁금증을 품은 채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한다”라는 프랑스 관용어를 제목으로 사용하는 소설은 분명 삶의 ‘회복탄력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진정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상처, 죽음을 극복하는 어려움, 부모의 부재와 과잉의 문제, 기억의 현존으로 이어가는 존재와 사랑에 관한 주제들을 다룬다.
연극 <꽃병물갈이>는 비올레트가 줄리앙과의 만남을 통해 아픔과 상처, 고통과 기억을 넘어 새로운 삶으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용기’와 ‘사랑’의 필요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반복되는 ‘만남’을 중심으로 줄리앙의 어머니 이렌과 가브리엘의 ‘만남’을 병치시킨다. 이렌과 가브리엘이 어떻게 사랑을 했고, 헤어졌으며, 죽음 이후 묘지에 나란히 묻히는 것으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게 되었는지의 과정은 줄리앙이 어머니의 유언으로 인해 우연히 만나게 된 비올레트와의 사랑을 ‘지금, 현재의 삶 속에서 함께 나누고 경험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깨닫도록 만든다. 연극의 경우, 19년 동안 홀로 묘지를 관리하며 고립된 속에서 자연의 순환과 생의 약동을 통해 스스로를 치유해온 비올레트의 ‘정지된 시간’을 15년으로 축약한 특징이 있다. 또, 비올레트의 과거의 삶과 줄리앙의 어머니 이렌의 일기 속 이야기들은 무대 뒤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상과 녹음된 목소리의 내레이션을 통해 전달된다. 아들이 읽어 내려가는 이렌의 일기는 줄리앙의 음성이 주를 이루지만, 이렌과 가브리엘의 대화가 될 경우, 비올레트와 줄리앙의 녹음 음성으로 변화를 거친다.
국내 공연의 경우, 무대 벽을 가득 채우는 대형 스크린을 매우 효과적으로 활용하는데, 묘비에 적힌 비문들을 영사할 뿐 아니라 기차역, 레스토랑, 소르미우의 푸른 바다 등 다양한 장소를 표현하게 된다. 또, 경찰인 줄리앙의 개입으로 인해 필립이 비올레트가 있는 묘지에서 100km 떨어진 지역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면서 다른 이름으로 살고 있었음이 밝혀진 뒤, 필립이 쏟아내는 마음속 이야기들은 스크린 뒤쪽에 두건을 뒤집어쓴 배우가 그림자만을 만든 상태에서 왜곡된 음성으로 연출된다. 비올레트의 손에 의해 정원처럼 변모한 묘지는 스크린 뒤쪽으로 들어간 두 배우의 그림자와 흔들리는 나뭇잎, 들풀의 그림자, 그리고 새소리와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에 의해 환상, 혹은 누군가의 기억처럼 구현되는 특징이 있다.
무대 위에는 여러 개의 묘가 여기저기 자리한 가운데 주변으로 꽃이나 아이의 장난감, 물뿌리개와 흙무더기, 모종삽과 장갑, 라디오가 놓여 있을 뿐이다. 비올레트가 돌보고 있는 고양이들은 빈 공간에 노란색 조명과 고양이 울음소리로만 표현되며, 배우들이 손을 뻗어 고양이를 쓰다듬는 제스처나 손을 뻗는 행동을 함으로써 관객들의 상상을 통해 완성된다. 누군가의 묘는 때로 비올레트가 묘지를 방문한 사람들에게 차를 대접하곤 하는 관리인 숙소 겸 로비로, 가브리엘 프뤼당이라는 변호사의 무덤으로, 비올레트의 딸 레오닌과 함께 화재로 죽음에 이른 다른 세 명의 아이들이 안장된 곳으로 기능한다. 비올레트와 줄리앙은 관객을 향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며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도 하며, 지나간 삶의 이야기를 축약해 전달하기도 한다. 관객들은 어딘가 신비롭고 수상해 보이는 ‘묘지 관리인’ 비올레트와 이렌과 가브리엘의 관계를 파헤치는 경찰 줄리앙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건의 전말과 숨겨진 속내들을 탐구하기 시작한다.
페랭의 소설이 인용하는 비문 중 비올레트를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보다 강렬한 것이 있다면, 살아있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겨진 부재한 자의 현존이다”라는 문장이다. 8살 딸의 비극적 죽음 앞에서 도저히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었던 비올레트는 딸 레오닌의 관 속에 넣고 싶은 게 있냐고 묻는 친구 셀리아에게 “나! 나를 넣어줘!”라고 말한다. 딸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바닷가에서 물속 깊이 침잠하며 레오닌을 느끼고 죽음을 갈망하는 비올레트를 구원한 것은 묘지에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생의 이어짐”이었다. 비올레트는 죽은 자들을 “존중”하는 묘지 가꾸는 일을 통해, 무덤 옆으로 피어나는 꽃들과 텃밭에서 가꾼 채소들을 통해, 딸을 ‘애도’하는 일을 지속한다. 죽음을 “부재”가 아니라 “비밀스러운 현존”으로 만드는 비올레트는 죽은 자들의 삶을 “재창조”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그녀가 끝없이 그리워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들이 버려지고, 멈춰지고, 재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망각하고 있다.
줄리앙은 비올레트에게 기억의 ‘유령’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요청한다. 14년 동안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던 남편 필립을 바라보면서 “누구라도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외쳤던, “이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말했던 비올레트가 그녀 자신에게도 같은 생각을 적용하기를 주장한다. 하지만 비올레트는 “사랑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비올레트는 이렌이 그토록 후회하면서 일기장에 남긴 “너무 늦기 전에 모든 사랑을 표현하라”는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연극 <꽃병물갈이>는 또다시 소르미우를 찾은 비올레트가 딸의 존재를 느끼기 위해 지중해 바닷속으로 침잠하는 순간, 레오닌만큼 작은 손을 가진 다른 아이가 비올레트의 팔에 매달리고 품에 안기는 장면을 ‘꿈’처럼, 혹은 ‘상상’처럼 구현한다. 비올레트가 줄리앙과 그의 7살 아들 ‘나탕’과 마침내 조우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삶으로 향하고자 하는 그녀의 내면의 갈망을 꿈꾼 것인지는 관객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비올레트가 가장 좋아했던 묘비명 “죽음은 누구도 당신을 더 이상 꿈꾸지 않을 때 시작된다”는 말을 그녀가 진실로 믿었다면, 그녀의 죽음은 이제 ‘끝’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줄리앙과 나탕이 그녀의 꿈을 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올레트의 죽음은 그녀가 무덤 옆에 끝없이 심었던 ‘꽃’과 ‘나무’처럼, 새롭게 싹을 틔우고 피어날 준비를 시작한다. 삶은 다시 미소 짓기 시작하고, 죽음은 기억으로 ‘삶’ 속에 영원히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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