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로젝트 내친김에 <언덕의 바리>

글_김기란

 

2023년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공연된 <언덕의 바리>(2024.01.06-01.14)는 여성 독립운동가 안경신(安敬信)의 삶을 바리데기에 빗댄 공연이라고 했다. 사실 안경신은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닐 뿐, 잊혀진 독립운동가는 아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바 있기 때문이다. 작가 고연옥은‘여성, 독립운동가, 폭탄범’이라는 수사를 통해 자극적인 소문처럼 떠돌 뿐,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은 안경신을 무대에 세웠다. 충분히 흥미진진한 소재지만, 소재로만 소진될 수는 없는 내용이다. 독립운동가 안경신의 삶은 곧 우리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평안남도 대동 출신인 안경신은 일제강점기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2년 수료한 후,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여했고, 그해 11월 오신도(吳信道), 안정석(安貞錫) 등과 함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를 조직, 평양본부 교통부원 겸 강서지회 재무를 담당했다. 그녀는 군자금을 거둬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활동을 하다, 1920년 김행일(金行一)을 따라 상해로 망명했다. 1920년 8월 미국의원단 내한을 이용, 국제여론을 끌어낼 목적으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서 결사대를 조직했을 때, 안경신은 제2대에 합류하여 장덕진(張德震), 박태열(朴泰烈) 등과 함께 도보로 상해를 출발, 3달만인 8월 1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8월 3일 평안남도 경찰국 청사, 평양시청,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지만, 도화선이 비에 젖어 불발되었다. 이듬해 3월 피신 중 붙잡혀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언도받지만, 공소하여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이 확정되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언덕의 바리>는“여자폭탄범”이라는 신화에 갇혀 있던 독립운동가 안경신을 신화로부터 탈출시켜, 한 여성으로서의 고단한 삶의 여정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래서인지 실존했던 독립운동가로서 안경신이라는 특별한 개인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다. 안경신의 삶의 주요 선택과 행동에 영향을 미쳤을 식민지라는 역사적 맥락은 공연에서‘전제’될 뿐 구체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간간이 들리던 당시 대중가요와 의상을 통해 추측되고, 독립운동의 역사는 분절된 장면 속 악당임이 명백한 반동인물들을 통해 환기될 뿐이다. 인물들의 행동을 설득하는 상황적 맥락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 부산하게 토로되었지만, 다의적 해석을 함축하는 무대 위 행동들이 말의 확정적 의미를 압도하는 바람에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상황적 맥락은 희미해지고 이를 대신한 것은 무대 위 행동으로 보여지는, 굳건한 의지만큼 흔들리는 한 여성의 혼란한 내면이다. 독립운동의 역사 대신, 그 안에서 살고자 했던 한 여성의 열정과 좌절에 집중한 공연의 의도가 읽힌다.

역사 속 신화가 아닌, 한 개인(여성)으로서의 안경신의 삶을 서사화하기 위해 소환된 것은 대중적 설화이다. 고연옥 작가는 <언덕의 바리>라는 공연 제목이 환기하듯, 극 중 경신의 삶을‘바리데기’설화 속 바리공주에 비유하려 했다. 바리공주는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할 수 있는 약물을 찾아 저승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았던 여성이다. 일견 식민지 상황을 초래한 무능력한 대한제국의 신민으로 태어나 주권을 찾기 위해 독립운동이라는 시대적 소명에 충실했던 경신의 삶은 자신을 버린 부모를 구하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바리의 삶과 상황과 목적추구라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하지만 무대 위 경신의 행동을 추동하는 상황은 탈역사적인 설화 속 상황과 달리 역사적이다. 극은 행동의 예술이라는 점에서, 행동의 짜임이 곧 서사화와 연동된다고 할 때, 무대 위 경신(김문희 분)이 선택한 행동은 <언덕의 바리>의 서사이면서 동시에 역사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 공연의 소재가 된 안경신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정보는 한 줌에 불과하지만, 그가 한 실제 행동, 무대 위에 소환된 행동은 명백히 독립운동사라는 역사의 일부로 귀속되기 때문이다.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 인물, 믿을 수 없는 선택을 한 인물을 서사화할 때 특정 맥락을 제거 혹은 첨가하거나 상황을 과장하거나 특정 이미지를 부여하거나 의도를 구성할 수 있다. 서사화하는 행위 속에서 필수불가결하게 보완을 위해 또 다른 내용을 끌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정보가 부족한 안경신의 삶에 대한 상상적 내용은 부가될 수 있지만, 안경신의 극 중 선택과 행동은 독립운동이라는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덕의 바리> 마지막 장면은 혹 이러한 점을 환기하는 것이 아닐까. 7년 만에 가석방되어 영양실조로 실명한 아들과 재회한 경신은“옛날에 가졌던 뜻을 그대로 가지고 나가려 한다”는 말을 남기고 아들과의 삶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언급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인 현실이고, 설화는 현실에 대한 비유적 세계이다. <언덕의 바리>는 다루는 소재의 특성상 이 둘의 연결 고리가 느슨함에도 불구하고 경신의 내면의 혼란을 시각화하기 위해 이를 포기하지 않는 무리수를 두었다. 고연옥 작가는 대본 속 말을 통해, 김정 연출은 무대 위 스펙터클을 통해 무리수를 돌파하고자 했다. 특히 설화의 세계가 요구하는, 꿈과 현실 사이의 몽환적 공간은 관객석쪽 무대 공간에 갈대밭의 언덕으로 표현되었다. 연출가 김정은 이 공간을 매우 공들여 제작했는데, 본래 객석 자리였던 공간에 마련된 갈대숲 언덕은 무대 위에 ㄷ자 형태로 설치된 관객석을 마주본 채, 한 폭의 풍경화처럼 자리잡았다. 갈대숲 한 편에는 2층 객석 난간 높이에 나룻배가 한 척 매달려 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감을 노래한 장석남의 시 <마당에 매는 배>가 환기되는, 공중에 걸린 나룻배는 경신과 바리를 잇는, 역사 속 실존 인물과 설화 속 인물을 잇는, 경신의 현실과 꿈을 잇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하나의 환유처럼 느껴졌다.

<언덕의 바리>에서 드러내고자 한 모든 내용과 의미가 함축된 한 편의 서정적 스펙터클처럼, 무대쪽 관객석에서 바라본 객석쪽의 나룻배가 걸린 갈대숲은 그 자체 매우 인상적이었다. 반면 무대로 사용되는 정사각형의 공간은 분절된 장면전환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점이 눈에 띈다. 검은색의 매트가 깔려 있고, 무대 상수 방향 끝에는 갓을 쓴 전등 하나가 긴 장대에 매달려 있으며, 반대쪽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극 중 경신의 모든 행동들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동시에 이곳에서 경신은 갈대밭에서 배를 젓는 소년(이재호 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가는 분열된 자아도 보여준다. 자신을 모진 고문으로 죽어간 여자들을 구할 수 있는 공간으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는 경신에게 바리의 모습이 오버랩되기도 했지만, 갈대숲과 무대의 접점은 제한적이었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유경오

 

무대에는 주어진 소명과 개인적 삶 사이에서 분투하며 분열되고 혼란을 겪는 한 여성이 보인다. 그녀가 처한 상황과 그녀의 선택을 추동하는 맥락은 분절된 장면 속에서 사라지고, 행동만이 무대를 채운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이번 공연을 함께 한 배우 중 미옥 역의 류혜린을 제외한 모든 배우가 행동 구현에 최적화된 몸을 바탕으로‘행동 연기’를 하는 극단 동의 배우들이었기 때문이다. 공연의 내용은 대사를 통해서도 전달되었고, 안경신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사가 제공하는 정보를 따라가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극단 동 배우들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부지런히 대사를 뱉어냈지만, 대사전달력이 빼어나진 못했다. 게다가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 혹은 희화화된 스타일이 많았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데도 실존 인물의 내면을 시각화하는데도 그다지 효과적이지는 않았다. 몸으로 보여주는 행동의 연쇄는 풍성한 볼거리는 되었지만, 풍성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진 못했다.

그럼에도 하나의 행동은 한 마디 말 이상의 증폭된 에너지를 전달했고, 그만큼 분절된 각 장면 하나하나는 충만하게 꽉 찬 에너지를 보여줬다. 특히 첫 장면에서 노년의 안경신과 청년의 안경신을 한 몸으로 연결한 김문희나 현강 역의 강세웅과 행일과 성수 역을 맡은 최태용의 유연한 몸연기는 무대를 장악하는 힘의 강도가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고연옥의 말과 김정의 스펙터클, 극단 동 배우들의 행동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돌하며 채워진 <언덕의 바리> 공연은 강렬한 에너지를 경험케 했지만, 공연이 끝난 후 남은 것은 처연하게 공중에 걸린 한 척의 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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