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홍혜련
계륵(鷄肋).
말 그대로 닭갈비다. 우리에겐 별미인 닭갈비이지만, 본래 고사에 따르면 그 양이 적어 먹자고 덤비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다. 연극 <조조와 양수>는 바로 이 ‘계륵’ 고사의 두 주인공, 《삼국지》 조조와 양수의 이야기다.
조조가 한때 ‘나보다 더 낫다’고 크게 칭송했던 당대 최고의 인재 양수. (《삼국지》를 접한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아는 이야기라 결론을 미리 밝히자면) 그런 그가 조조가 읊조린 이 ‘계륵’ 한마디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것도 바로 조조의 손에. 어쩌다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을까.
중국 창작 경극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답게 <조조와 양수>는 원작의 형식미를 미니멀한 무대 위에 제대로 살려 냈다. 쉽게 접하기 어려운 전통 악기의 라이브 연주와 더불어 마치 노래하듯 읊는 대사, 내공 있는 배우들의 힘이 넘치면서도 절제된 춤추는 듯한 연기는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런 형식적 아름다움을 차치하고도 이 연극은 서사 자체만으로도 큰 울림을 주었다.
이야기는 그 유명한 적벽대전 직후의 상황에서 시작한다. 제갈량의 귀신도 울고 갈 계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 조조는 절치부심하여 재기를 꿈꾸는데, 그러려면 천하의 인재를 수하에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다. 그리하여 찾고 찾던 중에 최고의 인재 양수를 만났으니, 가뭄에 물 만난 듯 조조는 기쁘기 이를 데 없다. 양수 역시 천하의 영웅 조조를 만나게 되어, 이제야 시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할 수 있게 되었다며 의기를 다진다.
그러나 어찌 할까. 부하 된 자임에도 양수의 눈에 자꾸만 주군 조조의 허점이 들어온다.
사달은 그 유명한 조조의 잠버릇(!)에서부터 시작된다. 조조의 군영에 군량미와 군마가 부족해지자 양수는 하필이면 조조와 악연이 있던 공문대를 천거해 말과 식량을 구하러 보낸다. 그런데 조조는 공문대에 대한 의심을 끝내 떨쳐 버리지 못하고 은밀한 방법으로 일을 치르고 한밤중에 돌아온 공문대를 그만 죽여 버리고 만다. 그런데 바로 이튿날 공문대가 진짜로 큰 공을 세웠음을 알게 된 조조는 자신의 의심 병 탓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알고 이마를 치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천하를 도모코자 인재를 영입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도리어 인재를 제 손으로 죽여 버렸으니 이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면 대업이 무너지게 될 판이었다. 양수가 자꾸만 자신을 의심하여 전말을 추궁하며 옥죄어 오자 조조는 당황하여 그만 “내 잠결에 사람을 죽이는 버릇이 있다”라고 둘러대고 만다. 그런데 양수는 이런 조조가 영 못마땅하다. 아아, 천하를 도모하려는 자가 어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단 말인가. 분개한 양수는 조조가 잠자는 곳으로 그의 아내 천낭을 보낸다. 아뿔싸, 양수의 계략에 걸려 궁지에 몰린 조조.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인재도 잃지 않기 위해 아내에게 큰절을 하고 죽여 버리니 과연, 조조다. 아, 그런데 양수, 이후에도 조조의 실수와 잘못을 사사건건 들추어내고 물고 늘어져 급기야 사람들 앞에서 조조를 망신 주기에 이른다.
“문지방은 문을 넘어서서는 안 되고, 바닷물은 뱃전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신하가 감히 주군을 넘어서려 해서는 안 된다고 아내가 엄중히 경고하는 말도 양수는 끝끝내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차라리 둘이 도망가서 살자고 하는 간곡한 청도 뿌리쳐 버리니, 결국 한중 땅에서 일이 벌어지고 만다.
득보다 실이 많다는 양수의 충고를 무시하고 한사코 한중 땅에 들어간 조조. 그런데 막상 한중에 당대해 보니 양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꼬리를 내리고 돌아가자니 이거,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조조가 누구던가. 《삼국지》 위나라의 왕, 결국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 만 영웅 중의 영웅이 아니던가. 일거양득, 한중 땅에서도 물러나고 자꾸만 자기 수염을 뽑으려 들던 양수도 제거하는 수를 생각해 내니, 바로 암호명 ‘계륵’이다.
그러그러하여 천하제일의 인재 양수는 자기 자신을 리쿠르트한 조조에 의해 제거되고 만다. 총명이 지나쳐 독이 된 것일까. 꼬리가 머리를 흔들려 했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내게는 이 <조조와 양수>의 이야기가 한 편의 직장 스릴러처럼 느껴졌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야기의 배경을 하나의 회사로 옮겨 상상해 보시라. 사장 조조와 최고 인재라 손꼽히는 사원 양수. 무척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럴 거면 네가 사장 해라.’ 사원 양수가 회사 생활 하면서 끊임없이 듣게 되는 말일 것이다. 사장에게 끊임없이 직언을 하고 사장의 잘못을 회사 인트라넷에 하나하나 지적하다 결국 대기 발령과 정리 해고의 수순을 밟게 된 양수. 조직에서 살아남고자 했다면 양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런데 연극 <조조와 양수>의 양수는 조직에서 살아남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비극이었다. 그는 조조라는 한 인간을 섬겨 그의 나라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정도를 원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조조가 아니라 그가 말한 이상, 천하를 통일해 시름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한 그의 꿈을 원했다. 그것이 양수가 진정 바라고 바라던 것이었다.
아, 그러나 양수여. 정녕 그러했다면 누구 밑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그대가 직접 나서서 스스로 주군이 되지 그랬소. 조조가 사장인 회사를 박차고 나와 자기 회사를 차리는 양수를 그리며, 아쉬워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