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배선애(연극평론가)
작품의 부제목이 흥미롭다. ‘외국인이 춘향전을 연기한다면?’ 춘향전을 외국인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떤 역할로? 호기심이 마구 생겨나는 문장이다. 그만큼 발상이 도발적이기도 하다. 극장을 찾아가면서 기대가 컸지만 한편으로는 염려도 되었다. 명절이면 TV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외국인장기자랑 같은 분위기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이었다. 외국인 관객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지 싶을 정도로 각양각색의 언어를 쓰는 외국인들과 함께 본 <안나전: Hallo 춘향!>(이하 <안나전>, 공동창작, 윤안나 연출, 유종연 각색 및 협력연출, 김유진 드라마터그, 극단 드림플레이, 연우소극장, 2024년 1월 25일~28일, ‘제3회 두드림페스티벌’ 참가작)은 ‘춘향전’으로 이야기를 걸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안의 차별과 편견을 고찰하게 만든 묵직한 작품이었다.
글로벌한 배우들이 춘향전을 공연한다는 즐거운 상상
공연에서 일단 주목된 것은 배우들이다. 이전의 여러 작품에서 한 번쯤은 봤던 외국인 배우들을 한 공간에 함께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우선 이 작품을 기획하고 연출한 윤안나 배우. 독일 국적의 윤안나(Anna Elisabeth Rihlmann) 배우는 여러 작품에서 익숙하게 보아온 배우로, 특히 <텍사스 고모>에서 자신의 실속을 챙기는 키르기스스탄 결혼이주 여성이 인상적이었다. 춘향전에서는 춘향이 역할을 맡았다. 두 번째 배우는 중국 국적의 이송아(Li Siya) 배우다. <잔인하게 부드럽게>에서 주인공을 흔드는 미지의 소녀 레일라로 돋보였는데, 춘향전에서는 향단이가 되었다. 세 번째 배우는 인도 국적의 아누팜 트리파티(Anupam Tripathi)다. 세계적 흥행작인 <오징어 게임> 이전에 연극 <오셀로 Oh The Yellow>에서 다른 인종의 오셀로를 보여주었던 아누팜 배우는 이몽룡이 아닌 방자를 맡았다.
이렇게 외국 국적의 세 배우에 한국 국적의 배우도 네 명이 함께 했다. 분명 한국 국적의 한국인인데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배어나는 이세준 배우, 그리고 실제로 미국 뉴욕에 연극을 공부하러 떠났다가 돌아온 박효진, 전필재 배우, 거기에 협력연출이자 이몽룡 역할로 유종연 배우가 합세했다. 세 명의 외국인 배우와 네 명의 한국 배우. 다양한 국적의 인물들이 무대에 서니 공간 자체가 매우 다채로웠다. 인종이나 피부색만이 아니라 그들의 서로 다른 언어와 몸짓, 의상이 말 그대로 글로벌의 구현이었다.
배우를 주목하게 한 것은 극의 구성 덕분이기도 한데, 공연 중간중간에 배우 각자가 자신을 소개하는 시간을 설정했다. 이송아 배우부터 시작해서 모든 배우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떻게 연기를 시작했는지, 한국에는 언제 왔는지, 그간 활동은 어떻게 했는지 등등을 독백으로, 인터뷰로, 스탠딩 코미디로 풀어내고 있었다. 그저 작품 속 캐릭터로만 한정되었던 배우들의 실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기에 매우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었고, 배우 개인에 대한 호감도 커지게 되었으며, 차례대로 들려주는 구성 때문에 다른 배우는 어떤 이야기를 할지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모인 7명의 배우들은 춘향전을 공연하기 위해 연습을 시작한다. 외국인이라고 춘향전을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나라 배우들도 수없이 햄릿, 오이디푸스, 니나, 메데이아가 되지 않던가. 한국에서 배우로 활동하고 싶은 외국인 배우들의 로망은 언젠가는 한국의 전통적인, 혹은 대표적인 작품에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안나전>의 기획 동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이들 배우가 준비하는 춘향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습을 시작하면서부터 부딪히는 현실이었다.
글로벌한 배우들이 춘향전을 공연하면서 마주하는 현실
연극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하는 일, 지원서 쓰기. 그러나 안나는 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의 어떤 문화예술기관이나 공적 기관에도 지원서를 쓸 수 없었다. “지원금 없이 어떻게 연극을 해!” 흔하게 듣는 이 대사가 독일인 배우의 입에서 나올 때의 독특한 질감. 낯설면서도 친근함이 묻어나는 이 대사는 외국인으로서 대면하게 되는 한국이라는 현실이었다. 현재 예술과 관련된 모든 지원제도는 내국인에 한한 것이다. 외국인이 지원을 받아 예술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 등을 통해 내국인에 준하는 조건들을 충족시켜야 한다. 내국인 예술인도 지원받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인 현실에서 외국인 예술인은 더더욱 방법이 없다는 것이 공연의 출발부터 부딪히는 현실이다. 문화예술 지원과 관련해서 외국인 배우는 완벽한 타자다.
타자로서 외국인 배우의 위치를 선명하게 보여준 것은 공연 시작부터다. 배우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햄릿과 거투르트, 오필리어와 호레이쇼를 연기한다. 근엄한 표정으로 각자의 언어로 진지하게 햄릿의 인물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그 자체로 배우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런데, 바로 뒤에 이어지는 오디션 장면이 그들의 정체성을 뒤흔든다. 한국인보다 더 능숙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아누팜에게는 어눌한 한국어를 요구한다. 아누팜의 이미지는 주로 동남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로 캐스팅되기 때문이다. 안나는 유창한 한국어 때문에 무섭다는 타박을 받으며 귀엽고 사랑스러움을 강요받는다. 애교 많은 백인 여성이라는 프레임이 안나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이송아는 한국어 발음에 남아 있는 모국어의 뉘앙스 때문에 대사보다는 몸을 쓰는 인물에 캐스팅이 된다. 이송아 배우가 태생적으로 신체의 유연함을 장착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눌한 한국어와 상반되게 유려한 한국어 발음을 필수로 전제하는 모순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오디션 장면의 세 배우는 외국인 특히 외국인 배우에 대한 공연예술계 현실을 적시하고 있다. 제도에서의 차별과 사회적인 편견이다. 현재 우리나라 예술계에서 외국인 배우가 어떻게 쓰이고 있으며 그 경계가 얼마나 견고한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의 의미는 실상 한국인 배우에 의해 더 강조되고 설득력을 얻었다. 실제로 미국에 연극 유학을 다녀온 두 배우 박효진과 전필재는 영어로 오디션을 보고 영어로 배역 연습을 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배우가 되고 싶었던 두 사람이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어떤 장벽과 한계에 부딪히고 있는지,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한국어로 듣다 보니 더 직접적으로 체감이 되는 것이다. 외국인이, 타자로서 다른 나라의 문화 속에 주체가 되기 위해 겪는 현실이 녹록지 않음은 한국과 미국 어느 나라나 다 비슷한 모양새다. 그러니 배우들이 몇 배나 더 고군분투할 수밖에 .
한국 배우인데 오히려 더 외국 배우 같았던 이세준 배우는 세 명의 외국인 배우들과 한국 배우들을 결합하는 역할을 했다. 춘향전 안에서는 북 대신에 배운 지 일주일밖에 안된 기타를 연주하는 고수가 되어 춘향전을 진행했고, 춘향전 밖에서는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가 되어 세 명의 외국인 배우들과 동등한 배우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시종일관 유쾌한 상황과 분위기를 만들어낸 중요한 지휘자였다. 거기에 협력연출이자 이몽룡 역을 소화한 유종연 배우는 안나 연출을 도와 작품의 구성과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펼쳐낸 것이 돋보였다. 어쩌면 무모할 수 있는 안나 연출의 구상과 기획에 대해 힘을 실어주고 구체성을 부여해준, 그리고 잘 해보자고 가장 크게 응원하는 역할이었을 것이다. 듬직한 체구만큼 듬직한 작품 운영을 보여주었고, 여유 가득한 이몽룡의 연기는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웃음을 유발했다. 이렇게 일곱 명의 배우는 자유롭지만 단단한 팀워크를 보여주었고, 서로서로 보완할 점을 잘 보듬어냈으며, 배우로서 공유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함께 하면서 <안나전>을 재미있으면서도 묵직한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안나전>은 배우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문제제기를 적극적으로 공유한 일곱 명의 배우들이 각자 자신이 마주한 차별과 편견을 드러내면서 차곡차곡 많은 것들을 쌓으며 만들어낸 단단한 작품이었다. 작품을 보며 내내 웃으면서도 씁쓸했던 것은 차별과 편견에 익숙해져버린 스스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즐거운 공연이었음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춘향전’이 빈약했다는 점이다. 작품 속 춘향전 장면이 너무 없어서, 외국인 배우들이 실제로 춘향전을 공연할 때 어떤 난관이 있는지 궁금했는데 그 부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춘향이 캐릭터를 독일인 안나가 어떻게 이해했는지, 어떻게 분석했고, 어떻게 연기하려 했는지를 좀 더 추가한다면 우리 안의 견고한 다른 것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외국인 배우는 배우로서의 현존도 중요하지만 캐릭터의 수행성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멀지 않은 미래에 외국인 배우들이 연기하는 춘향전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상상을 하는 것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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