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충일(연극 평론가)
일찍 찾아온 여름의 무더위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무성한 나뭇잎들이 스카이라인을 지워버린 빌딩 숲 사이에서 제법 도심의 볼륨감을 높여주고 있다. 여름 한 철, 광합성으로 한껏 몸집을 키운 형형색색의 식물들이 도심의 무더기 콘크리트 옆에서 흙냄새를 풍기며 웅성대고 있다. 그 곁엔 지구과학적인 기후걱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헤진 박스와 재활용품을 수집한 리어카가 땀을 흘리며 기어가고 있는데, 그것을 끄는 노인은 보이지 않는다.
‘삶을 언어로 조직하여 무대 위의 행위로 완성하려하며, 그 불완전함의 힘에 의지하여 새로운 질서를 완결’하려 무대를 찾는 사람을 맞이하는 저녁 바람은 여전히 뜨겁다. 극단 호감의 작품 <외로운 용의자들>(작·연출: 정준영)을 만나 변신에의 꿈이 관자(觀者)의 저작(咀嚼)으로 오롯하길 소망하면서, 오늘(6.11. 저녁 7시 30분) 구 도청 앞 빌딩 숲 뒷골목에 위치한 대전 연극의 끈질긴 내력과 많은 고투를 품어 안은 대흥동 소극장 고도로 들어선다.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나라는 급속한 경제 성장에 힘입어 수명은 빠르게 늘어나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들었다. 안고 있는 가장 깊은 고민은 노년 빈곤층의 ‘최저 생활 보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노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대안 마련은 답답하다. ‘사람을 살리는 연극’을 모토로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호감을 같고 무대에 풀어낸 극단 호감의 예술적 작업은 시의 적절하다.
일상의 삶을 에워싸고 있는 세계의 아픔을 알아서 깨닫고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하는 일은 복합적이다. 그 영역엔 백 프로의 추상도 없고 같은 만큼의 구체도 없다. 추상과 구체는 상호의존적인 개념이다. ‘세계의 구조’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것도 구체적인 사물과 이어질 수밖에 없다. 하여 ‘고령사회가 안고 있는 노인문제’란 추상은 ‘경로당 안에서의 선상 출신 <곽규>의 치매가 빚은 박카스(제초제)마시기’란 구체가 ‘상호 생성의 입체적 시선’으로 스며들 때 극적 상상력으로 변화 될 수 있다.
고령화로 인한 ‘고독한 삶’에 예민한 촉수를 가동시킨 작품 <외로운 용의자들>. 구석진 동네의 평화로운 경로당에서 갑자기 노인 한 명이 쓰러진 채 발견된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고 원한을 품은 누군가에게 공격당했을 가능성이 있어 출동한 경찰에 의해 한 명 한 명 심문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작품 속 일상을 살아가는 노인들의 모습은 경로당 한 쪽에 “고장 난 뻐꾸기시계”로 걸리게 되고, 이 은유적 대상물은 “고장 난 것들끼리 서로 바라봐주면서 경로당 사람들을 살리는” 극적 재료로 작용하고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우선 이 작품을 쓰고 연출한 정준영은 경로당에 함께 하는 희화화(戲畫化)된 인물들의 삶의 풍경에 다소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붓을 긋는다. 무대의 주인공들이 엮어가는 삶의 민낯은 질서와 안정과는 거리가 먼 뒤죽박죽 불완전한 인생들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무대의 탑 조명을 고정 시킨 채 면밀한 각도와 위치를 살피고 이들의 애환과 기쁨, 그리고 꼬여드는 삶의 방정식을 진지하게 포착한 다음 따뜻함과 코믹한 시선과 생생한 언어를 통해 무대화 한다 .
이 작품 속 경로당에는 다섯 명의 80대 노인들이 등장한다. 간헐적 치매 증세를 보이며 ‘아침에 눈 뜨는 게 무서운’ 기저귀를 찬 교대 출신의 안곽규(강희석 분), 자기감정에 솔직함을 은근 슬쩍 “화를 내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반복되는 말로 ‘퉁’치면서도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떠날까?“를 걱정하는 난청(難聽)의 한별희(이은영 분), 영감이 하늘나라로 간 후 집에 물이 안 나와 경로당 화장실을 이용할 만큼 빈한하지만 다소간의 사리분별로 입바른 소리를 천연스럽게 내지르는 일일 연속극을 좋아하는 변개숙(이진아 분), 경로당 회장을 맡아 센스 있는 행동과 공자님 말씀 뒤에 명의를 빌려준 빚진 아들 덕분(?)에 종교시설 순회 동전받기와 다른 동네 박스 모으기로 생활의 상흔이 숨어있는 강기백(이종국 분), 사소한 일에도 지적질 하길 잘하고 맨날 배고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똥오줌 가리지 못하는 마흔 넘은 아들을 감당하기 어려워 ’둘이 죽어 버렸음 좋겠다‘는 부회장 도창도(정석희 분). 결국 다섯 대의 고장 난 시계는 붙임성 있는 ”경로당의 정예멤바“로 거듭 태어나는 지지고 볶는 풍경을 그려낸다.
비었음은 이미 채워짐을 전제한다. <외로운 용의자들>의 무대는 현상적으로 비어있는 듯 막을 열지만 사유적 희극성으로 채워지는 공간으로 흐른다. <경로당 환경개선 프라그라므(상추 키우기)>실행을 위한 비료 제작 과정은 박식하고 재미있는 표현 기법, 세상의 경험담 내지 위트, 빈틈없이 짜인 구성감으로 다가온다. 그 결과 ‘밥은 똥이다’라는 위선의 의상을 벗겨내며 결국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인간의 근원적 본질에 가 닿는다. 게다가 ‘별희’가 ‘곽규’에게 <깻잎 떼어준 일>과 ‘개숙’의 T.V 드라마 <외눈박이 내 사랑>에의 집착은 ‘치정사건’으로 은유화되고, ‘사랑이 어떻게 변해요?’라는 대사는 눙치고, 혹 빠지면서, 심연의 가슴 아픈 진실을 보여준다. 박카스(제초제)를 마시고 병원에 입원중인 곽규에게 쓰는 편지는 삶의 속살에 파여 있는 남은 삶의 회한과 세상에 대한 조망이 진지하게 드러나기도 하지만, 진정 사람을 정말 슬프게 하는 건 사실 ‘난 아무렇지도 않는데?’라며 가리고 있는데도 슬쩍 희미하게 드러나는 그 사람의 상처가 내 가슴 깊은 곳으로 불쑥 아프게 찌르고 들어오는 ‘측은한 마음’이 아니겠는가.
무대 위 다섯 명 노인들의 대사 연기는 우선 안정감 있게 다가온다. 이는 균등하게 배분된 듯 대사의 양과 함께 등장인물 모두가 ‘노인 되기’역을 연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세상에 어떤 노인도 자기 자신을 노인처럼 보이기 위해 애를 쓰지 않는다. 노인은 시간이 흐르고 몸과 마음이 노화되어 노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무대 위의 배우는 노인처럼 보이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자신이 노인이라면 당면하게 될 여러 가지 심적 고민이나 육체적 조건들을 이끌어내는 쪽으로 접근하여야 할 것이다. 즉 ‘내가 만약 노인이라면’ 나는 노인처럼 보이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단지 노인이 되어 ‘노인을 노인이게끔 하는 어떤 느낌’을 내 몸과 마음을 통해 도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외로운 용의자들’에게 일본의 극작가 제아미(世阿弥)의 “실물을 닮으려는 의식이 없어지는 예위(藝位), 흉내 내기에 통달하여 진실로 대상자체가 되어버려 닮으려는 의식이 없어진 상태의 연기”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다.
이제야 다가온다. 다시 못 돌아올 줄 알면서도 고통스런 길을 찾아 나선 <외로운 용의자들>. 고령사회의 ‘나이듦’이란 화두를 웃음 뒤의 조소, 비틀림 속의 올곧음으로 자유 분망함 속에 ‘삶의 진실’을 의도한 연출, 웃을 수만 없는 아픈 현실을 리듬감 있는 언어적 재료를 풍부하게 발산한 배우들, 지금은 삭아버린 불덩이처럼 침묵하고 있을지라도 언젠가 활활 타오른 날을 기다리는 극단 호감의 식구들의 얼굴에… 그런 이들은 벌써 ‘고장 난 뻐꾸기시계의 경계를 넘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 시계’를 경로당에 걸어놓고 상치 비빔밥을 먹은 후 화투를 치며 “우리 같은 사람, 일이라는 걸해야 살아있음을 느끼는겨 안그려?‘라며 헛헛한 웃음을 지고 있는 풍경으로 다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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