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임야비(tristan-1@daum.net)
소설가, 연출가(총체극단 ‘여집합’), 클래식 연주회 기획가
부록 제8편에서는 불세출의 종합 예술가 바그너가 18살(1831) 때 작곡한 ‘파우스트에 의한 7개의 노래(7 Kompositionen zu Goethes Faust, WWV 15) 중 합창곡을 살펴보겠다. 사실 이 작품은 TTIS 2021년 7월호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 (3)’에서 다룬 바 있다. 하지만 그때는 점점 연주 인원의 편성이 커지는 연재 취지에 맞추고자 두 명이 연주하는 가곡 형식의 5, 6, 7곡만 분석했다. 남은 1~4곡은 독창과 합창 그리고 피아노 반주가 등장하는 조금 더 규모가 큰 형식의 음악으로 연재 순서상 ‘기십(幾十) 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에서 다뤘어야 했지만, 예기치 않게 누락되었다. ‘천명이 연주하는 파우스트’라는 정상에 오르기 전에 미처 다루지 못했던 음악들을 총정리하는 부록 편이니, 이번 기회에 초기 바그너의 걸작 합창곡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 곡 ‘군인들의 노래’는 독창이 없는 남성 합창인데, 파우스트 비극 1부의 ‘성문 앞에서(Vor dem Tor)’ 등장하는 군인들의 행군을 씩씩한 음악으로 옮겼다.
경쾌한 2/4박자 위로 장쾌한 내림 나장조 행진곡(Marschmäßig)이 부점 리듬을 타고 f (포르테)로 울려 퍼진다. 이어지는 8마디는 p (피아노)로 진정한 뒤, 4성부의 강인한 남성 합창이 터져 나온다. 젊은 바그너는 이 단순한 행진곡에서도 괴테 원문의 ‘나팔 소리(Und die Trompete; 891행)’와 ‘돌격(ein Stürmen; 895행)’에 강조를 찍는 음악적 연출을 시도한다. 이후, 마지막 두 행인 ‘그러고는 우리 군인들 / 떠나간다네. (Und die Soldaten / Ziehen davon)’에서 점점 작게(dimin.) 곡을 마친다. 성문 앞에 선 파우스트를 중심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군인의 행군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연출이다.
두 번째 곡 ‘보리수 아래 농부의 노래’는 괴테의 원작에서 군인들의 행군이 지나간 다음 바로 이어지는 농부들의 합창이다. 수많은 작곡가가 파우스트의 구석구석까지 음악화했지만, 이 부분에 선율을 붙인 작곡가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래서 존재 자체만으로도 참 귀한 작품인데, 투박하고 흥겨운 멜로디가 매우 매력적이다. 먼저 텍스트의 구조와 내용을 짚어보자.
괴테의 편집증적인 필력을 엿볼 수 있는 운문이다.
총 4연의 운문으로 각 연은 8행씩이다. 1, 2행과 4, 5행의 각운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노란색 하이라이트), 6, 7행은 웃음소리의 의성어로 모든 연에서 반복된다. 여기에 3행과 마지막 8행을 ‘-ogen’으로 운을 맞춘 부분(초록색 하이라이트)을 발견하면 괴테의 강박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런데 이 운문에 음악을 붙인 바그너는 여기서 한술 더 뜬다.
우선 8마디의 단순한 주제가 빠르고 활기차게(Rasch und Lebhaft) 피아노로 제시된다. 이 투박하고 흥청거리는 주제는 바로 앞 군인들의 강건하고 단호한 주제와 멋진 대비를 이룬다.
20마디의 긴 피아노 전주로 흥을 한껏 돋은 후 남성 테너 목소리가 나온다. 괴테는 원작에서 남성과 여성 그리고 독창과 합창을 구분하지 않고 ‘보리수나무 아래 농부들. 춤과 노래’라고만 지시문으로 표기해 놓았다. 그런데 바그너는 소프라노 독창과 테너 독창(위 악보의 빨간 사각형)과 합창(위 악보의 초록 사각형)이 돌아가면서 노래하는 구조로 재구성했다.
1연과 3연은 테너 독창이 1행부터 5행까지를 부르면 혼성 합창이 6, 7행의 웃음소리를 노래한다. 8행은 테너가 선창하고 합창이 한 번 더 따라 부른다. 2연은 1, 3연과 구조와 진행이 똑같지만 소프라노 독창이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4연이다. 여우 같은 소프라노가 1, 2, 3행으로 비아냥거리지만, 짐승 같은 테너는 4, 5행을 부르며 어슬렁거린다. 앙증맞은 구애의 대치는 6, 7행의 혼성합창으로 훈훈하게 해소된다. 이어 8행의 선창을 소프라노와 테너가 함께 드높이 부르면, 혼성 합창이 가사를 반복하며 축제의 흥분을 최고조로 끌어 올린다. 이후 피아노 혼자 남아 축제의 분위기를 24마디에 걸쳐 이어간다. 그렇게 음악을 끝맺으려는 순간, 합창의 ff (포르티시모)로 Juchhe! (아하하!)를 느닷없이 외친다. 처음 들을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하는 부분이고, 들으면 들을수록 절로 웃음 짓게 하는 재미있는 부분이다. 물론 괴테 원작에는 없는 부분이지만, 피 끓는 청년 작곡가 바그너의 앙증맞은 자필 서명 정도라 생각하면 매우 깜찍하게 느껴진다.
이렇게 바그너는 괴테가 만든 조밀한 원단에 남과 여 그리고 독창과 합창이라는 염색을 더 해 다채롭고 아름다운 의복을 만들어 냈다.
세 번째 곡 ‘브란더의 노래’와 네 번째 곡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 1’의 배경은 유명한 라이프치히 아우어바흐 술집이다.
먼저 ‘브란더의 노래’는 네 명의 술꾼(브란더, 지벨, 프로쉬, 알트마이어) 중 가장 상남자인 브란더가 부르는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노래다. 총 3연으로 각 연은 7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1행과 3행, 2행과 4행 그리고 5행과 6행의 각운을 맞췄으며 마지막 7행 ‘몸 안에 사랑 든 듯. (Als hätte sie Lieb’ im Leibe)’은 후렴으로 노래 시작 전에 브란더가 제안한 대로 모두가 따라 부른다.
바그너는 괴테의 원문을 그대로 살려 음악에 얹었다. 한가지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목은 남성 합창이 브란더의 선창을 따라 부르는 후렴구다. 총 세 번의 후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음형과 음량이 동일하나, 마지막 세 번째 후렴구는 피아노의 ff (포르티시모)로 탐관오리를 빗댄 생쥐의 죽음을 통렬하게 두드린다.
네 번째 곡 ‘메피스토펠레스의 노래 1’는 일명 ‘벼룩의 노래’로 베토벤과 무소르그스키의 가곡이 매우 유명하다. (TTIS 2021년 9월호 ‘2인(人)이 연주하는 파우스트(5)’ 참고) 이에 비해 바그너의 곡은 많이 연주되지 않는데, 아마도 베토벤의 명작과 분위기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일단 2/4박자의 빠르기가 같고, 호기로운 메피스토펠레스의 비꼬는 발성 그리고 피아노의 잔망스러운 움직임으로 벼룩을 묘사한 점이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젊은 바그너의 번뜩이는 음악적 차별점이 있다. 바로 벼룩의 움직임이 뒤로 갈수록 극성을 부리는 연출이다.
음악의 시작 부분인 악보(1)에서 벼룩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32분음표의 셋잇단음은 쉼표를 두고 나타난다. 그러다 벼룩이 고관대작이 되는 부분이 오면 악보(2)처럼 셋잇단음표 뒤에 8분음표와 mf (메조 포르테; 조금 세게)가 붙는다. 이후, 왕비와 귀족들이 시달리는 장면에서는 악보(3)처럼 셋잇단음표가 정신없이 활개를 친다. 바그너는 셋잇단음표의 빈도와 셈여림을 변형해 가며 벼룩의 극성을 점층법으로 연출했다. 하지만 벼룩은 원작에 따라 메피스토펠레스와 평민 술꾼에 의해 압사한다. 바그너는 이 장면을 남성 합창으로 처리한 후, 악보(4)처럼 32분음표의 셋잇단음으로 벼룩의 죽음을 표현했다. 그런데 앞의 (1), (2), (3)과는 달리 화음이 없어 소리가 무척 허전하다. 바그너가 하찮은 벼룩의 초라한 최후를 음악으로 연출한 것이다.
서양 음악사뿐 아니라 총체 예술 미학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바그너. 그는 작곡가라는 단순한 카테고리 안에 넣을 수 없는 위대한 문학가이자, 연출가였다. 그런 바그너의 싹을 들어보고 싶다면 주저 없이 ‘파우스트에 의한 7개의 노래’를 권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tdxucZNpKfM&list=PLq7MWRGJO0XyAezGiK3DrN9Cyz-X0lVJ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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