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엘지아트센터 <벚꽃동산>

글_양세라(연극평론가)

 

 

  1. 벚꽃동산의 메타포 유리온실 집

 

원작과 마찬가지로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엘지아트센터의 <벚꽃동산>(2004.6.4.~7.7) 역시 고향 밖을 떠돌다 안식처인 벚꽃동산으로 돌아온 여주인공 도영(전도연)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원작에서 꽃이 핀 벚꽃동산이 보이고 여러 개의 문이 있는 저택과 주인공의 딸 아냐의 ‘어린이 방’이 무대로 제시되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이번 공연은 사뭇 다른 무대연출과 공간의 재현을 목격하게 된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무대는 암전 없이 꽤 큰 구조물로서 집 한 채가 먼저 관객의 눈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샤이먼 스톤이 연출한 체홉의 <벚꽃동산>에 벚꽃동산은 없었다. 원작에서 찬미되고 향수를 자극하며, 여전히 아름다운 벚나무 동산은 이번 공연에서 유리 온실처럼 따뜻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집이라는 기호로 전환되었다. ‘벚꽃동산’을 대신하는 이 집은 생명력 있는 새집처럼 아름답고 투명하다. 원작에서 여러 개의 방으로 구성된 저택이 우리 시대에 누구나 한번 꿈꿔봤을 화려하고 예쁜 건축물(무대디자인 사울킴)로 무대에 재현된 것이다. 온실처럼 따스한 집에 사는 사람들은 나른한 여유와 나태에 길들여진 듯 보인다. 이 집의 투명함은 관객이 집안 사람들을 엿보게 한다. 특히 계단으로 구조화된 집의 실내와 지붕은 재벌 가족과 집안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내면화된 계급의식과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장치이다. 원작이 당대 극장에 맞춰 장면이 전개되는 것을 이번 공연에서는 무대 위에 안이 훤히 보이는 집을 하나의 프레임처럼 구조적으로 배치하였다.

 

사진 제공: 엘지아트센터

 

이 압도적인 무대가 강렬하게 메시지를 발산하는 덕분에 큰 무대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자동인형이 작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집의 문을 열거나 닫으면 집 밖의 등장인물과 구분하기 위하여 음소거가 되는 것처럼 연출되기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지붕 위와 일층의 거실과 이층 방의 대화가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은 마치 교차편집된 영화나 드라마 장면의 몽타쥬처럼 연출되면서 인물들의 목소리와 대사를 배제한 연출 덕분이다. 흡사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감각으로 3막 이후 파티와 논쟁 장면을 원작과 다른 감각으로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집을 구조화한 무대연출은 영화 기생충을 오마쥬한 것처럼 몽타쥬 흔적이 강렬하다. 물론 3막에서 4막으로 넘어가는 장면에서 검은 눈과 흰 무대에 대비되어 집이 조형성만 남은 채 흑백사진처럼 건조한 공간으로 전환되기도 한다. 이러한 무대 연출은 마치 보는 체홉이 강조되고, 듣는 체홉의 감각이 배제된 공연이라 느껴지기도 했다. 제정러시아 몰락한 귀족의 서사는 샤이먼 스톤 공연에서 압축된 장면의 교차와 중첩으로 우아한 대화는 상실되었다.

 

  1. 허위의식의 계단 희극

<벚꽃동산>은 19세기말 러시아의 현실에서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커지는 시대와 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해 몰락하는 지주이자 귀족 계급의 상황과 이들의 태도를 반영했다. 물론 체홉의 원작은 주인공 딸인 아냐를 통해 비극적인 인식보다는 긍정적으로 현실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새로운 세대에게서 희망의 비젼도 제시한다.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은 이 원작을 현실과 경영, 자본에 대한 감각이나 시대인식에 무딘 한국 재벌 3세 가족 이야기로 각색되었다. 원작의 라네프스카야와 가예프 귀족남매는 송도영, 재영 남매로 자본주의 귀족 재벌3세로 전환된 것이다. 체홉이 <벚꽃동산>이 희극으로 이해되지 못하고 드라마로 연출되며, 불리는 것에 불만이었던 점을 이번 공연은 각색을 통해서 일부 해소한 듯하다. 이들이 대륙의 열차가 아닌, 비행기와 국제공항을 오가며, 핸드폰과 주식에 대해 관심을 갖거나, 여주인공 송도영(전도연 배우)이 동시대 매체에 존재했던 거침없는 재벌3세 기혼 여성의 전형적 모습을 연기할 때 관객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아냐역의 송도영 딸 강해나(이지혜)가 과외선생 변동림(남윤호)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다 성적으로 교감하는 상황을 장난처럼 연출한 장면도 동시대 희극적 감각으로 연출된 대표적 예로 보인다. 원작에서 열일곱살의 아냐와 만년 학구열만 소유한 대학생 트로피모프가 가치관을 공유하며 드러내는 애정 어린 장면을 공연은 어설프면서도 진지하게 이들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만담 같은 대화로 구축하였다. 이 장면 역시 이 희곡이 드라마가 아닌 희극인 이유를 연출가가 반증한 셈이다.

 

사진 제공: 엘지아트센터

 

원작에서 가족과 기울어가는 러시아를 상징하는 벚꽃동산은 그 화려한 봄꽃이 만발한 순간 직후 급격하게 떨어져 나부끼는 꽃잎들처럼 찰나에 그 영화(榮華)가 표현된다. 격변하는 시대에 대한 무지와 시대착오는 재영과 도영 재벌3세 남매, 이들의 과거 운전사였던 아버지와 인연을 강조하는 신흥재벌 황두식(박해수)과 한량 김영호(유병호)의 소통되지 않는 대화를 통해 대비되며 강화되었다. 원작에서 벚꽃나무 영지를 떠나면서 던지는 이들의 시선과 말에는 곧 사라질 공간에 슬픈 눈길을 던지는 애잔함과 동시에 다가올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와 축복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특히 아냐와 트리모프처럼 젊은 주인공들의 생동하는 기운과 그들의 가치관이 이 극에 반영된 다가올 현실에 대한 극작가의 인식처럼 보이는 찰나도 있다. 마찬가지로 이번 공연에서도 젊은 세대의 비현실적인 이상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를 주기에, 도영 재영 남매처럼 기성세대의 시대 인식과 비교되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이중적으로 희화화된 인물들도 있다. 운전사(신예빈)와 가정부 정두나(박예림), 비서 이주동(이주원)의 삼각관계를 통해 집주인들의 망령처럼 집주변과 계단식 지붕에 자신들의 욕망을 드리웠다. 이들의 욕망은 연극에서 노래가 되고, 회화의 한 장면처럼 빛과 조우하는 인상적인 미장센이 되었다.

 

  1. 흩날리는 욕망의 검은 눈 속에서

체홉은 <벚꽃동산>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영지를 소유한 대지주로 표현된 토지자본의 몰락을, 건설과 별장 임대사업을 하는 신흥부르주아인 로파힌의 부상을 대비했다. 시대의 흐름을 따르지도 못하고, 이전의 관습과 귀족의 생활방식을 버리지 못하는 벚나무꽃 영지 사람들은 결국 기울어가는 기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들에게 변화가 필요하다며 지원을 이야기하는 ‘로파힌’은 시대의 변화 특히 자본의 논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부를 이룬다. 심지어 이 가족의 영지마저도 소유하며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하여 부를 소유했다. 특히 부동산을 개발하여 이득을 취하는 그야말로 졸부의 전형적 행태를 보인다. 박해수가 연기한 ‘로파힌’, 황두식은 “벚나무 동산은 이제 내것이다!”라며 송도영에 대한 관심과 그녀의 입양 딸 강현숙(최서희)과 관계, 집안의 고용된 사람들의 관계 모두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자신의 욕망의 정체를 드러냈다.

<벚꽃동산> 원작은 모든 사람이 이 영지를 떠나고 빈 무대에 문을 잠그는 소리와 고요, 정적, 그리고 나무를 찍는 소리가 구슬프게 울려퍼지며 끝난다. 정적이 무대를 채우는 그 순간에 연극이 끝났을 줄 알고 관객이 몸을 세우려는 그 순간 늙은 집사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무대에 기운 없이 등장하여 누운 채 움직이지 않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원작에서 모두가 떠나가고 덩그러니 남은 늙은 하인과 빈 무대로 끝나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공허한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그것은 원작을 통해 환기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했다. 주인공들의 과거 영화(榮華)와 몰락을 목격하고 경험했던 집사가 비로소 쉴 때, 그의 늙은 육체만이 무대에 남는 것이다. 그 육체에서 건조하게 울리는 “살긴 살았지만 도무지 산 것 같지 않아. 아무것도 없군. 아무것도….” 이 대사가 주는 여운을 곱씹은 적이 있다. 그의 독백은 마치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극의 에필로그처럼 덧없는 인간의 영화와 유한한 삶에 대해 관객을 향해 읊조리는 시처럼 여운을 준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서 이 인물은 사라졌다.

 

사진 제공: 엘지아트센터

 

지난 시절, 과거의 향수나 삶의 유한성을 되뇌는 장치를 제거한 연출가 사이먼 스톤은 메가폰을 잡은 (박해수)가 새로운 시대로 나가자며 개발과 건축을 위해 “전부 다 부숴버려. 새로운 시대가 올 거야. 이제 시작이야”라고 무대 마지막 순간 외치도록 했다. 이전의 것을 헐어 흔적을 없애고 새것을 세우는, 이 시대를 지배한 천박한 이 테제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이 상황은 역설적이다. 이 아이러니는 3막에서 4막 사이에 내린 검은 눈과 파티가 열리는 투명한 집안의 극단적 대비에도 존재했다. 극장을 뒤덮을 것만 같은 검은 눈은 생일파티에 흥청이는 유리집 사람들의 욕망이 뿜어지듯이 대비를 이루며 무대 위에 쌓였다. 우리는 저 검게 흩날리는 것을 보며, 그것이 눈이라는 믿음에 길들여질까. 낡은 것이 가면, 새것이 올 것이라는 기대는 늘 우리를 배반한다. 이번 공연은 비싼 술, 화려하고 편리한 호텔 등을 꿈꾸는 박해수가 연기한 인물로부터 터져나온 욕망의 외침으로 마무리되었다.

귀향으로 시작한 이 연극의 마지막 무대는 모두가 떠난 뒤, 원작에서 빈 무대에 늙은 피르스의 노쇠한 몸과 정적이 전했던 쓸쓸함보다 더 끝을 알 수 없이 짙은 쓸쓸함과 절망을 전달한다. 검은 눈처럼 나부끼다 진공 청소기에 날리는 먼지처럼 한없이 가벼운 새로운 시대를 알리기 때문이다.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벚꽃동산> 공연에서 보여지는 관계, 지켜보는 욕망, 답습하는 태도와 행동, 변함없는 행동과 태도에서 비롯되는 전형성, 표피적인 인간관계의 한계를 읽고 이 시대의 절망을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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