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채승훈(연극연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에 관한 정의들은 아직도 현대연극을 지배하고 있다. 특히 그중에서도 기승전결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정의는 연극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물론, 아마도 관객들의 유전인자에도 무의식적으로 포함되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력하다. 관객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에 함몰되어 결말이 없으면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연극 정의는 언젠가는 그 시효가 현저히 약화하거나 다할 것이다.
다음의 글은 앞으로 미래에 연극이 어떤 식으로 진화하는지에 대한 필자 나름의 고찰이다. 물론 이것은 가설일뿐이다.
미래의 연극은 어떻게 변할까 하는 생각을 한 번쯤은 해 본다. 다양한 경우가 예상되기도 한다. 내가 지닌 호기심은 현재의 미디어 세계가 한층 더 발전하게 되고 모든 사람이 그러한 최첨단 미디어에 익숙하게 되는 시점의 연극, 예술이다.
현대 사회의 문명을 대표하는 것이 최첨단 정보산업일 것이다. 뉴미디어라는 말로 통칭할 수 있는 이러한 첨단 정보 문명의 발전은 너무 광범위하고 변화속도가 빨라서 종사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지향점을 예측하기 어렵다 한다.
이러한 뉴미디어 시대의 도래는 현재 인간들의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으며 조만간 그들을 새로운 습성으로 길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뉴미디어에 의해 인간은 지배될 것이다.
우리가 종사하는 연극 세계 또한 많은 변화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습성에 의해 길들여진 새로운 관객들을 만들어 낸다. 이미 그러한 경향은 진행되고 있다. 현재의 관객들은 전 세대와는 다른 코드로 대상을 읽는다. 전 세대들이 느끼는 부분과 전혀 다른 부분에서 새로운 감각으로 새로운 것을 발견해 낸다. 그러한 변화는 연극창조자들을 적지 않게 당황하게 만든다.
뉴미디어의 세계는 앞으로 그러한 관객들의 변화를 더욱더 빠른 속도로 촉진 시킬 것이다. 뉴미디어의 세계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연극을 원하게 될까.
첫 번째는 대본의 구속력이 한층 약화할 것이라는 점이다.
본래 우리 인간들의 정보 전달 방식은 통합적이었다. 여기서 통합적이란 말은 대상을 대할 때 인간은 모든 감각을 함께 사용한다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인간의 오관을 함께 자극한다. 예를 들어 새가 한 마리 날아오를 때의 상황을 묘사해 보자. 날개짓을 하는 새의 모습, 하늘, 구름, 시원한 공기의 냄새, 푸드득하는 소리, 배경이 되는 바람 소리 등은 동시에 우리들의 오관을 자극한다.
그러나 그동안의 기성 미디어들은 오관을 통합한 전달방식을 제한하였다. 인쇄기 발명 이후 최근까지 인간은 오관을 동시에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제한받아 왔다. 즉 감각기관 중의 하나 만으로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이루어 왔는데 책과 신문은 눈으로서, 라디오는 귀로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행해 왔다. 이는 분명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원형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멀티미디어라는 하나의 통합된 미디어를 통해서 정보가 입출력된다. 모니터를 통하여 시각적 메시지를 보고 동시에 음성 메시지를 듣는다. 그리고 자신이 분석한 메시지를 송출할 수 있다. 이러한 뉴미디어의 특성, 즉 오관의 동시사용 – 물론 맛과 냄새를 감지하는 감각의 사용은 아직 제한되지만 –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을 어느 정도 복원하게 된다.
아마도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의 정보전달에 익숙해진 관객들의 새로운 기호는 연극 무대에서 어느 일방적인 장르의 지배구조를 용납지 않게 될 것이다. 어느 한 장르의 지배방식은 신문이나, 책, 라디오 등과 같이 한가지 감각만을 사용하여 전달하는 과거 미디어의 방식과 유사하다.
뉴미디어 시대의 연극 무대는 이제 어느 한 분야, 한 장르에 의한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사라지게 된다. 그것은 곧 지금까지 무대에서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문학 즉 대본에 의한 지배구조의 청산을 의미한다.
인류의 역사는 일방적인 문화전달의 역사였다. 그것들은 문자로 기록되었으며 사람들은 책, 라디오, 신문으로 발전되어온 문명 속에서 그러한 문자로 기록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인간의 본질적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거세하였다. 연극무대에서 대본이 중요 기능을 발휘하는 것도 그러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와 함께 앞으로는 통합적인 이미지의 사용이 무대 위에 일반화될 것이다. 대본을 낭독하며 서서 입만 금붕어처럼 움직이는 대사 위주의 전달방식, 관객들의 균형적이며 통합적인 기능을 저해하는 그러한 전달방식은 권위적이며 교조적이다. 많이 약화되거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오관을 함께 사용하는 인간 커뮤니케이션 부활의 시대에 걸맞는 것은 모든 감각적 요소가 균형감 있게 어우러진 통합이미지의 사용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원초적 형태의 원형예술로의 회귀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할 때 연극의 통합기능은 더욱 강화된다. 대본의 독창적인 해석과 새로운 창조질서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20세기 연출의 특성이라면 이러한 특성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대사전달의 측면이 약화하는 동시에 다른 요소들, 몸이나 소리, 빛의 사용이 강화 될 것이다.
현대의 뉴미디어 세대들은 정보의 빠른 전달에 익숙해져 있다. 그것은 무대 위에서도 빠른 템포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다 보면 많은 빛과 몸과 소리의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변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고정세트는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무대는 이제 영상과 조명의 음영이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에 배우와 앙상블을 이루어 낼 것이다.
또한 대량전달, 일방통행의 최면 속에서 본의 아니게 획일화되었던 문화들은 이제 개개인의 참여로 해서 다양화, 개인화할 것이다. 컴퓨터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는 누구든지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뉴미디어의 가장 큰 특성은 쌍방향 소통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멀티미디어 컴퓨터의 세계는 수용자와 전달 주체의 쌍방향이 상호 구별이 안 될 정도로 자유롭게 소통한다. 이러한 구조는 수용자의 참여도를 일반화시키며 인간들을 그러한 쪽으로 숙달, 습관화시킨다.
이러한 새로운 습성은 연극을 열린 구조로 만들길 요구한다. 이러한 시대에 연극은 관객의 참여도가 높은 작품을 창조해야 한다.
관객과 무대가 함께 참여하는 연극적 방법의 하나는 미니멀리즘이다. 간단한 스토리와 열린 구조, 즉 무엇인가 답을 내리지 않는 태도는 관객들의 참여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관객들은 간단한 스토리에 그들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살을 붙인다. 아마도 관객들은 간단한 얼개의 그 무엇이 계속 반복되는 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반복되는 가운데에 관객들은 그들만의 세계를 그리는 여유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중종, 기승전결의 완벽한 웰메이드 연극은 과거형의 미디어 방식이다. 그와 함께 관객 대부분이 공통의 개념과 느낌을 가지고 극장 문을 나서는 연극은 닫힌 구조의 연극이다.
관객들의 무의식은 무대 위에서 시간, 공간적으로 무언가 비인 것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비인 무대, 간략하고 최소화된 소품들, 반복되거나 쉼이 많은 시간 구조 속에서 관객들은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될 것이다.
뉴미디어 시대가 가져온 ‘일방주의에서 상호주의로의 변화’. 이것은 혁명과도 같다. 뉴미디어의 시대에는 누구나 평등하다. 탈중심화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는 발신자를 수신자로, 생산자를 소비자로, 지배자를 피지배자로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과거 커뮤니케이션을 지배했던 이해 논리를 뒤엎는다.
이미 일방적인 정보전달의 시대는 종식되었다. 정보독점의 시대도 역시 끝났다. 권력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주어진다. 이러한 시대가 계속 진행된다면 인간의 의식 또한 조만간 변할 것이다. 아니 작금의 각 세대는 이미 의식구조의 확연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새로운 의식은 과거 매스미디어의 시대 – 그것은 전통적인 문화구조, 지배구조 등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일방적인 구조 – 에 길들여진 기존의 담론들과 이미 충돌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충돌 현상도 일시적인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상호주의에서 비롯되어진 의식의 변화는 우리들의 삶을 변화시킬 것이며 예술과 연극도 변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만이 아니라는 탈 중심의 의식이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과거의 고정불변의 의식 세계에 발생한 분열은 증폭된다. 편협화, 획일화에서 다양화, 다원화, 주변화의 시대로 변한다. 주변 요소들이 강조되고 변두리에의 관심, 즉 무대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이 주어진다. 즉 모두가 주연이다. 이것은 명백히 포스트 모더니즘과 관련이 있다. 뉴미디어 시대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징후들을 더욱 발전시킨다.
기존의 진리 찾기, 현실인정을 거부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메타 방식은 관객들을 무대에서 거리를 갖게 만든다. 이때 만들어지는 쌍방향의 거울은 끝도 없는 미로를 만든다. 기존의 작품들에서 내세운 진리는 더이상 절대적이지 않다.
과거의 작품들을 객관화시켜 혹시 바늘처럼 숨겨져 있을 진실을 다시 찾아본다. 기성의 것들에 대한 새로운 각도에서의 관심과 그것들을 새롭게 꼴라쥬하는 패스티쉬의 방식은 그 자체로도 이미 메타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컴퓨터의 화면과도 같다. 그것은 새로운 무대 표현 방법으로 떠오른다. 장면들은 여기저기에 설정된다. 그러한 장면들 속에 과거, 기성의 이미지들이 혼합되어 교차된다. 과거에 단역이었던, 주목받지 못했던 직업이, 인물이, 신분이, 등장인물이 주인공이 되고 도리어 주변에는 명대사와 명장면들이 명멸한다.
그렇다. 뉴미디어의 세계는 넓은 바다와도 같다. 우리는 컴퓨터 속에서, 뉴미디어의 바닷속에서 원하는 것을 찾는다. 예를 들어보자. 화면 위에 주제를 정하고 검색을 위해 문자를 치고 기다린다. 나타난다. 계속한다. 추가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다시 새로운 검색창을 두드린다. 다른 자료가 필요하다. 계속 친다. 그 위에 나타나는 새로운 화면. 이것은 분명 일방통행, 과거식의 문서 해독방식이 아니다. 주어진 대로 읽고 시간을 내서 도서관에 가서 자료를 찾는 방법은 이제 무의미하다. 이러한 새로운 문서 찾기 및 해독의 방법은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습관화한다.
시간진행순서 무시,
자동기술,
자유연상,
계속되는 새로운 세계에의 관심.
이와 같은 하이퍼 텍스트에 관한 새로운 습성은 뉴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산물이다. 과거에는 천재적인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이러한 방식은 이제 모든 신세대에게는 보편화 된다. 텍스트를 초월한 하이퍼 텍스트적인 의식은 연극 세계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다. 그것을 하이퍼 디렉팅이라 새롭게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기승전결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물론 모더니즘의 시대에 크게 파괴된 고정의 구조는 이제 더욱 파편화된다. 무대의 곳곳에서는 시간 진행을 무시한 이미지들이 배치된다. 그리고 각각의 장면들은 마치 문어의 다리들처럼 모두 살아서 움직인다. 이미 하이퍼 텍스트적인 의미 해독에 길들여진 새로운 관객들은 이러한 방식이 도리어 낯설지 않다.
이제 연극은 새로운 관객들을 위해 기존의 모든 작품을 파편화시키기 위해 해체하여야 한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진정한 리얼리즘의 완성이다. 모든 등장인물에 평등한 자격이 주어진다. 모든 장면이 동등하게 중요하다. 수많은 장면이 각기의 역사와 당위성을 가져야 한다. 마치 컴퓨터에 나타나는 수많은 검색자료가 나름대로의 역사와 당위를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하이퍼 텍스트, 하이퍼 디렉팅의 습관은 당연히 고유의 예술 장르를 파괴하거나 장르간 혼합을 더욱 부추긴다. 이미 기존 구조의 파편화, 파괴를 맛본 독자, 관객들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한다. 그들은 고유의 장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으로 족하다. 컴퓨터의 세계에서는 이미 모든 벽이 무너졌다. 한 가지의 장르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한다. 아니 그들에게 이미 장르란 존재하지 않는다.
패스티쉬와 하이퍼 디렉팅은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한다. 해체된 이미지들이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명멸한다. 모든 일에 총대를 맨, 통합의 기능과 책임을 진 새로운 연출가는 이제 기성의 것들, 과거에는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들을 그들의 무대에 주연으로 다시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