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한국연극을 망치고 있는가?/ 우상전

                  평론가가 한국연극을 망치고 있는가?

                                             우 상전(연극배우)

지난번에 ‘한국은 신작희곡의 낙원’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이번에는 한국연극계의 평론가들에 대해서 한번 글을 써보고 싶다. 그건 다름 아닌 <한국연극지> 2012년 12월호에 실린 ‘2012년 공연결산좌담’과 ‘서울시극단의 위상과 역할’을 읽고서다.

한국연극에서 평론가들의 지위는 좀 특별한 면이 없지 않다. 우선 현장 종사자들보다도 배움에서 우세해 대부분은 대학교수로서 정년이 보장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고 있고, 거기다 온갖 세미나에 참석해 마음껏 발언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뿐만 아니라, 온갖 심사를 담당해 그들에 의해서 공연이 평가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으로 유지되는 연극제작의 현실에서 모든 지원심사를 담당하는 자리까지 차지하고 있어서 실질적인 권한도 막강하다.

아마 모르면 몰라도 전 세계에서 이런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세계 연극계에 평론가협회장을 배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국평론가들의 위상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위상은 한국이 ‘교육천국’이라는 독특한 사회현실의 결과일 수도 있다. 연극관련 대학만 해도 백여 개에 이르러 자연히 학위를 가진 이론가들인 평론가들이 연극판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대다수를 차지하는 연극배우들은 지적인 면에서 대응할 형편이 되지 못하고 연출가들도 수는 많지만 실력이 미진한 게 사실이다. 이는 프로그램들에 적혀 있는 ‘연출의 변’을 보면 대부분이 읽어 볼만한 글귀도 없는 논리부족 상태에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따라서 자연히 논리와 이론을 겸비한데다 평가를 위해 많은 공연을 넘나드는 평론가들이 우위를 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할 일 것이다.

따라서 평론가들에 대한 권한이나 평가마저도 누구 하나 시비를 걸거나 거론하는 사람이 없는 항상 ‘치외법권’의 명예를 누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풍지대’의 행운을 누리고 있는 게 현실이다.

평론가는 왜 신작희곡(초연 창작극)에 목을 맬까?

결산좌담의 첫마디는 이렇게 시작한다.

“초연 작품을 일관하니 창작극보다 번역극이 우세했던 것 같습니다. 창작 초연보다는 재공연도 상당히 눈에 띄었고요. 특히 민간단체 초연 창작극이 예년에 비해 많이 줄었습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맞장구를 치고 있다. “국공립제작극장에서 많은 작가들을 흡수하다 보니 민간 초연 작품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또 이런 발언도 있다. “기존에는 극단을 중심으로 작가와 연출가가 만나서 하고 싶은 공연을 했습니다. 제작극장의 문제가 창작극의 부재와 공연 질의 전반적인 위축 등 의도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연결되는 것 같아요.”

“제작극장에 인적 자원이 쏠리다 보니 상대적으로 제작환경이 위축되면서 민간극단의 활동이 적지 않게 영향을 받은 해가 아닌가 합니다. 작품의 수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창작극이 위축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아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제작극장이)배우들도 오디션으로 뽑는 형태이니 확실히 응집력이 떨어졌어요.” “소극장 규모에서 좀 더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데, 중극장 이상 규모로 가면서 등장인물도 늘고 기술적인 부분도 많아지다 보니 극작법이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반면 배우와 연출가에게는 좋은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죠.”

더욱 우리를 주목하게 하는 것은 “대극장 공간을 채우는 극작술에 익숙하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사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연출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극작가의 책임보다는 현장인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여기는 것이다. “대극장의 빈 공간을 몸으로 채워줄 배우가 있을까도 싶네요. 그런 배우가 없으니, 연출가는 서둘러 공간을 이것저것으로 채워 넣는 거죠.”

“극장의 크기를 두고 토론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연출이 소극장만 잘하고 중극장, 대극장에선 못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평론가 김윤철이 이렇게 일갈하자 이번에는 슬그머니 말을 바꾼다.

“그렇다고 소극장 공연에서 과연 연출과 배우가 자신들의 힘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는가도 회의스러워요. 제작극장이나 공연이 대형화되는 것에 맞서는 새로운 시도로서 이런 소극장 중심의 페스티벌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들이 제작극장 시스템에 대한 대안이 되지는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평론가들이 좋은 공연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은 고작해야 1인극 ‘당신의 손’이나 ‘넙쭉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또 여기서 우리가 괄목해야 할 부분은 평론가 김윤철이 말하는 국공립제작극장의 ‘주문생산’이다. 주문생산을 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창작극이 적다는 의식은 못했습니다. 요즘 이루어지는 창작극은 주문생산의 형태이다 보니 작품에서 작가의 창작동기와 의욕이 느껴지지 않는 게 문제죠.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나 남산예술센터의 기획 작품 역시 다 주제나 접근방법을 제시하면서 주문하는 거거든요. 이런 출발이 과연 예술적인 창의성을 북돋아주는데 얼마나 기여를 하느냐는 거죠. 모름지기 예술은 작가의 개인적인 절심함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이전보다 작품에서 예술성, 발랄함, 신선함이 안 느껴지고 몇 년 전보다 후퇴한 것 같아요. 주문생산의 부작용이 아닌가 합니다.”

좌담의 발언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1. 국공립의 제작극장이 극작가 등을 독식해 민간극단의 활동과 작품의 질을 위축시키고 있다.

2. 민간극단은 좋은 체제여서 이를 살려 내야만 ‘초연 창작극’이 활성화될 수 있다. 특히 민간극단이 소규모에서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는 것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다양성을 살려내야 한다.

3. 대극장 공연이 좋지 않은 것은 극작가들의 탓보다는 연출가나 배우들에게 더 책임이 크다.

4. 국공립의 ‘주문생산’은 아직 문제가 있다. 그리고 이게 민간극단의 제작환경을 위축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평론가들의 이런 인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어째서 평론가들은 ‘초연 창작극’(신작희곡)을 그토록 갈망하는 것일까?

둘째. 많은 창작극이 공연되었는데도 왜 창작극이 위축되었다고 여기는 것일까?

셋째, 민간극단들이 과연 (그동안) 정말로 운영을 잘하고 있었던 것일까?

넷째, 국공립제작극장의 주문생산이 부실한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혹시 한국극작가들의 평소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해서 ‘주문을 해도’ 잘 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다섯째. 왜 소극장에서만 그것도 민간극단에서 실험극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째서 우리나라 평론가들은 특히 여성 평론가들일수록 신작희곡을 갈망하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연극 평론가들이 신작희곡을 열망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난 그동안 SPAF나 LG아트센터에서 좋은 해외공연들을 보면서 ‘연극의 맛’은 연출과 연기술에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비록 자막으로 내용을 따라갈지라도, 또 이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안톤 체홉’의 작품들조차도 이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의 솜씨에 더 매료되었던 게 사실이다.

신작희곡이 미미한 러시아나 동유럽에서도 이런 쾌감으로 연극을 만들고 공연을 올리지 않았다면 그들의 활동이 이토록 활성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내가 특히 감동을 받은 것은 독일팀이 만들어 남산센터에서 공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이다. 미국작품을 자기들의 해석으로 새롭게 인물을 창조하고 무대를 만들어낸 수작이었다. 나는 우리와 비교가 가능한 그 작품을 보면서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내가 알기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등도 고전의 현대화에 더 관심이 많고 이를 통해 무대에 명작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평론가들은 왜 신작희곡만을 갈망하는 것일까? 나는 이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명작의 신작희곡이 탄생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도 못한 현실에서 어째서 그들은 끊임없이 신작을 바라는 것일까?

연극만이 아닌 다른 장르들도 다 고전의 리바이벌이 대세다. 한국에서 오페라, 뮤지컬, 발레, 판소리,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까지 모든 장르가 고전의 리바이벌로 관객을 맞고 있다. 이런 장르들의 경우 창작 작품은, 더구나 초연작은 너무나 초라한 대접을 받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연극만이 유독 초연을 갈망해서 신작으로 관객을 맞고 싶어 하는 심리적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창작에 참여하지 못하는 평론가들의 콤플렉스인가? 아니면 우리나라에서 천재작가의 탄생을 기원하는 바람이 너무 커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극작가를 통한 어떤 대리만족을 꿈꾸고 있는 것인가?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한국연극의 미래는 창작극에 있다고 확신을 하기 때문일까?

아무리 추측하고 골똘히 생각해 보아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셰익스피어와 같은 고전작가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면서… 내가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연극적’인 것 – 연출이나 연기, 무대기술 등에 문외한이어서 자기들이 알 수 있는 것이란 오로지 희곡의 분석과 해석 – 문학성이 전부여서 신작희곡이 자꾸 양산되지 않으면 연극판에서 기여할 기능(역할)이 없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들의 역할이 미칠 수 있는 ‘초연 희곡’이 발표되는 것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고, 이로 인해 항상 창작극의 위축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문학평론가들만큼의 분석과 비평 수준에도 이르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좌담 중에 평론가 김윤철의 이 한마디에 의해서도 분명해진다. 그는 괄목할 만한 올해의 인물을 거론하면서 “김은성작가는 연극의 메커니즘을 알고 극작을 해요.”하는 말에서 많은 평론가들이 연극의 메커니즘에 밝지 못함을 역설적으로 짐작케 하고 있다.

그동안 세계에 내세울만한 신작희곡이 발표되어 우리를 흥분시킨 적도 없다. 오죽하면 ‘연예는 한류(韓流)고 연극은 일류(日流)’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창작극이 일본작품과 비교해도 너무 허술한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흥행성에서 우리 창작극이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초연 창작극’에 이토록 몰두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오죽하면 평론가 이진아마저도 “저는 개인적으로 공연을 창작극이니 번역극이니 하면서 원작 희곡을 바탕으로 이분하는 것을 좀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외국작가의 희곡을 공연하는 것이 왜 국내작가의 희곡을 공연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하나요.”

사실 창작극과 번역극을 구별하는 것은 일부 평론가들뿐이다. 솔직히 한국에서 창작극을 걱정하는 것은 평론가들만의 이슈일 뿐이다. 왜냐면 ‘라이어’나 ‘보잉보잉’같은 번역극이 대학로에서 떼돈을 벌고 있고, 그 많은 뮤지컬이 대부분 창작공연이 아닌 것으로 미루어 관객들은 창작극과 번역극을 구별하지 않는다. 요사이 ‘레미제라블’ 열풍에서도 알 수 있듯 구별 없이 ‘재미’만 있으면 보겠다고 나서는 게 관객들이다. 그런데도 평론가들은 입만 열면 창작극 타령이고 제작여건도 열악하기 짝이 없는 민간극단이 좋은 창작극을 창출해주기를 너무나 갈망하고 있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또 다른 연말결산

한팩이 발행하는 <한팩뷰> 2013년 1월호는 지난해 한국의 연극과 무용계를 정리하는 강일중(공연 칼럼니스트)의 글을 싣고 있다. 그의 글의 일부를 간추려 보면

“(지난해) 연극은 텍스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이 큰 흐름이었다. 시각적 이미지와 움직임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됐다. 이런 추세 속에 연극 연출가들은 아주 세밀한 부분에서의 작품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안무가의 도움을 적극 추구했다. 등장인물들과 함께 무대에선 카메라맨이 찍은 무대 장면들을 리얼타임으로 스크린에 투사하는 등 영화적 요소가 더욱 과감하게 활용됐다.

그렇다고 (이런) 시도들이 늘 기대했던 수준의 좋은 결과를 가져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2013년에 보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또 다른 유사 사례의 출현을 자극할 것이라는 점에서 고무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연극계에서 현저하게 나타난 현상 중 하나는 안무가를 적극적으로 제작에 참여시킨 것이다. 일부 연출가들이 세밀한 분야에서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왔었다. (이제는) 안무가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작품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연출가들의 안무가 기용은 유행처럼 번졌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연극 베스트3작품 즉 <과부들>(연출 이성열) <그게 아닌데>(연출 김광보) <목란언니>(연출 전인철)는 모두 안무가가 제작에 참여했다. ‘한국연극’이 뽑은 베스트7 연극 중 국내 신작 부문 네 편은 위의 세 작품에 <손님>(연출 이병훈)이 추가 됐다. <손님> 역시 이경은 안무의 손길이 갔다. 종래의 대사보다 시각적 이미지가 더 큰 감동을 주고 감각을 깨우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판단이 이런 추세를 자극했다.”

“제작환경의 변화도 이런 흐름에 기여했다. 최근 수년간 남산예술센터, 명동예술극장, 재단법인 국립극단, LG아트센터 등 규모가 큰 극장들이 왕성하게 제작활동을 하고 있다. 이런 극장들의 제작지원 속에 작품을 만드는 연출가들은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제작비 덕분에 보다 높은 질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세세한 분야의 전문가를 제작에 참여시키고 있다.

연극 연출가들이 시청각적 이미지 쪽에 방점을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현상 중 하나는 작품 속에 영상을 비중 있게 쓰는 것이었다. 이 방식은 최근 해외공연계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양정웅 연출의 <로맨티스트 죽이기> 이곤 연출의 <맨하탄 1번지>같은 연극들에서 이런 영화기법이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연극 분야에서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는 나름 신선함이 엿보이는 기획이었다. 개별 작품들에 대한 ‘부정적인 비평’도 많이 있었지만 서구의 고전이 아닌 우리 고전에서 소재를 가지고 와 새로운 시각으로 동시대성이 확보된 작품을 만드는 것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스트린드베리이 100주기 기념 페스티발’도 마찬가지다. ‘축제가 급히 만들어지는 바람에 개별 작품들에 대해 깊이 있는 접근이 결여돼 있다’는 비평도 있었다. 그러나 이 축제의 경우 주한 스웨덴 대사관으로부터의 부분적인 지원 외에는 국내 공적 자금 지원은 거의 없이 연극인들이 스트린드베리이 작품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참여했다는 점이 돋보였다.”

여기서 우리는 평론가 이은경의 “올해 우리 연극은 큰 이슈나 변화가 없는 침체상태로 한 해를 마감하는 것 같아요.”와는 너무나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두 잡지의 논리전개를 비교해 보면 연극평론가들은

1. 우리의 현실(공연현실이나 제작현실)에 대해서 너무 단편적이다.

2. 그저 ‘초연 창작극’ 타령만 하고 있다.

3. 연극의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안목이 없다.

4. 국제적 흐름이나 감각마저도 이해도가 없다.

5. 미래의 비전에 대한 의견제시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런 비교를 통해 우리는 평론가들의 연극에 대한 인식과 개념수준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시 극단의 토론회

이 기사를 읽으면 더욱 가관이다. 제목은 ‘세종문화회관 산하 서울시예술단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공개토론회’다. 그런데 사진을 보면 원형테이블에서 패널들끼리 마주 보면서 토론을 하고 있다. 공개재판에도 방청객이 있게 마련인데… 아마 <한국연극지>에 실으려고 공개(?)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 세종회관의 문제점은 한마디로 박인배사장의 정치적 노선에 있다.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번역극은 안 된다. 창작극을 하되 쌍용자동차 노사문제를 다루었으면 좋겠다.” 이런 요구를 시극단에 하고 있다고 쓰여 있다. 독재정권에서도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시’를 한 적은 없다.

또 그는 취임하자마자 산하 단체장을 다 내쫒겠다고 나섰다. 유인촌장관시절 임기를 채우지 않은 예술단체장을 그만두라고 해서 온 세상이 한바탕 난리를 겪었다. 그런데 이제는 서울시장이 바뀌었다고 또 그 짓을 예술단체에서 반복하는 게 명색이 예술을 다루는 단체에서 단체수장이 할 짓인가?

기사가 나간 후에 박원순시장이 박사장을 불러 “제발 대선에 도움이 안 되니 가만히 있으라!” 오죽하면 이런 소문까지도 단원들 사이에 퍼져있을까?

그런데 연극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토론회에서 상황파악도 안 되는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전임 예술감독이었던 김석만은 아직 현재 이사장 자리에 있고, 현재 예술감독인 김철리는 참석도 하지 않은 (참석자 명단에 없음) 자리에서 “상임 드라마투르크를 고용하라.”

나도 국립극단에서 단원생활을 해보았지만,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목숨’을 노조에 의지하고 사는 단원이 참석해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전해주어 ‘의미 있는’ 자리였다고 적혀있다. 날아가는 새도 웃을 일이다.

지금 서울시극단의 문제점은 바로 그들의 ‘공공성’을 단체수장이 자신의 ‘정치적 이념’으로 예술작업에 관철시키려는데 있다. 단적으로, 그리고 한마디로 시극단의 ‘공공성’이 서울시장의 정치적 정체성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는 게 문제다. 우파에서 좌파로 좌파에서 우파로 바뀌면서 극단의 ‘공공성’이 수시로 바뀌는데 있다. 그리고 이게 ‘예술성’의 잣대로 수시로 둔갑한다는데 있다.

따라서 서울시극단(나아가 세종문화회관)이 진정한 예술단체가 되려면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말로만 또 돈으로만 독립한 ‘재단’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독립한 ‘재단’이 되어야 하는데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떤 변화와 제도를 도입한들 ‘백약이 무효’인 게 현실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논쟁을 꾀하려는 패널은 한 분도 안 계신다. 그러면서 기사는 “(서울시극단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2013년 서울시극단의 성공적인 변화를 기대한다.”고 토론회를 마무리하고 있다.

이 토론회야말로 민주화 이후 최고의 ‘어용토론회’라고 연극사에 기록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게 나의 착각일까? 한국연극의 평론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한심한 작태’를 꾸짖어도 부족한데 오히려 문제의 핵심을 비껴나 엉뚱한 소리나 하고 있는 게 너무나 확연히 보여서 슬퍼진다.

 현대 예술의 운명과 창작극의 한계

나는 송년회에서 국립극단의 2013년 공연계획을 설명 듣고 창작극 일색인데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 구자흥 극장장이 내년에 명동예술극장도 ‘주문생산’을 하고 싶다고 하면서 의견을 구할 때 너무나 놀랐다.

세계적으로 작금의 클래식 예술은 현대미술만을 제하고 모든 장르가 새로운 창작이 불가능한 처지에 놓여 있는 게 현실이다. 1960년 들어 붐을 이루기 시작한 세계적인 ‘아방가르드’ 열풍은 예술장르에 많은 실험과 새로운 창작을 시도하게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현대미술만을 제외하곤 모두가 실패로 끝났다. 연극만 해도 부조리극의 열풍은 급속하게 식어버렸다.

그나마 현대미술만이 겨우 살아남았는데 이건 부자들이 이를 이재(理財)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 한국의 최고의 갤러리스트가 삼성재벌(홍라희)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은가! – 표현의 자유도 없는 중국도 현대미술만은 벼락부자들에 의해서 활기를 찾고 있다. 다른 장르는 모두가 참혹하게 몰락했다. 창작 오페라와 현대음악, 현대무용, 현대문학 어느 것 하나 살아남은 게 없다. 음악과 발레, 문학, 모든 예술장르가 다시금 고전으로 돌아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죽하면 백남준도 먹고 살려고 현대음악을 버리고 현대미술로 전향했다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공산주의는 정치적(독재적)이념으로 예술을 모두 죽여 버렸고 자본주의는 예술의 시장경제화로 순수예술을 전부 죽여 버렸다.

아마 한국에서도 희곡을 써서 돈방석에 앉을 수 있다고 하면 확연히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수입도 없는 희곡작가를 누가 하려고 들겠는가? 또 재능을 보이기만 하면 뮤지컬과 영화제작자의 등살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박근형도 편당 1억 이상의 개런티를 받을 정도로 영화 시나리오를 잘 썼더라면 연극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이는 작가 이만희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연극판의 평론가들은 여전히 ‘초연 창작극’에 미래가 있다는 듯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이 휩쓰는 세상에서 그나마 연극이 명맥을 유지하려면 극작가보다는 전업연출가를 키우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도 재능이 있으면 영화로 가버릴 것이고…

이런 상황인데도 제작극장 책임자들은 어째서 흥행을 포기하고 창작극의 ‘주문생산’에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운영자로서 성과를 내려면 창작극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일 거다. 그래야 평가위원인 평론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지원도 받는데도 유리하고 자리를 보전 하는데도 보탬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산권과 인사권을 가진 문광부나 서울시 등이 평가에서 평론가들의 의견을 참고할 것인데 그들의 많은 이가 오로지 ‘초연 창작극’만을 선호하니 당연히 ‘주문생산’을 해서라도 ‘초연 창작극’을 무대에 올리려 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어차피 흥행도 잘 안 돼 수입도 올리지 못해 민망한 판에 그나마 잘난 척이라도 하려면 창작극을 해서 칭찬을 받는 영예라도 누려야 하는데, 이때 가장 안성맞춤이 ‘초연 창작극’이라면 너무 억지를 쓰는 것일까?

민간극단은 더욱 가관이다. 극단 대표인 연출가가 자신이 창작을 하지 못하면 – 우리나라는 극작가들이 극단 대표이자 연출가를 겸하고 있어서 – 연출을 하지 않는 신인작가(주로 여성작가) 뒤를 따라다니면서 애걸해서 작품을 구한다.

그렇게 해서 새롭고 실험성이 보인다고 평론가들의 평판을 얻게 되면, 그때부터 작가와 연출가는 서로 인연을 맺어 후속작을 날리게 된다. 그러면 평론가들은 민간극단의 소극장에서 명작이 나왔다고 소리치며 제작극장을 질타하면, 제작극장은 다시금 ‘주문생산’의 문고리라도 잡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서너 작품 올리고난 뒤에 밑천이 다 드러나면 제작극장의 ‘부름’을 기다리게 될 것이고,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슬그머니 연극판에서 사라지는 것이 민간극단의 순환구조다.

이렇게 해서 민간극단에서 평판을 얻은 작가는 어느 날 제작극장으로부터 주문을 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대극장 작품을 써 본 적이 없어 이번에는 평론가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고 만다. 결국 ‘그 밥에 그 나물’인 순환구조인데도 대극장에서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평론가들은 연출과 작가를 다시 다그치기 시작한다.

그러면 연말에 “극장의 크기를 두고 토론하는 건 우리나라밖에 없어요. 극작가가 소극장에서만 잘하고 중극장, 대극장에선 못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다시 공허한 논쟁이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자본의 힘이 미치지 못하면 창작은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옛날에는 천재적 재능만 있으면 예술가로 입신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예술을 ‘돈’으로 환원시키지 못하면, 결국 예술은 지원금이 없으면 명맥을 유지할 수조차 없게 된다.

그래서 (고전의 자리에는 오르지도 못하고) 영원히 실험예술의 장르에 머물다 어느 순간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언제 살아질지 모르는 ‘초연 창작극’에만 희망을 걸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데도 평론가들은?

그런데도 왜 평론가들은 창작극을 그것도 지원금으로 연명하는 민간극단이 제작해주기를 그토록 염원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늘 초연으로 말이다. 지금 창작극은 과잉 생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제작 극장들이 이른바 ‘주문생산’을 해서라도 창작극을 진작시키고자 혈안이 되어있는데, 그나마 자본이 있는 그런 곳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비전마저 제시하지 않고) 어째서 허약한 민간극단의 초연에만 ‘갈증’을 느끼는 것일까?

좌담에서 김윤철도 “창작극 주문생산 방식이 예술적 창의성을 위협할 수 있는 제도지만, 좋게 활용하면 명작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라고 희망을 말하는데 어째서 일부 평론가들은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만 견지하고 있는 것일까?

평론가 김옥란마저도 “창작극이 실제로 수치상으로 적은 건지 아니면 성과가 적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헷갈립니다.” 또 김윤철은 “창작극이 적다는 의식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평론가 이은경은 첫마디가 “초연 작품을 일관하니 창작극보다 번역극이 우세했던 것 같습니다. 창작 초연보다는 재공연도 상당히 눈에 띄었고요. 특히 민간단체 초연 창작극이 예년에 비해 많이 줄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평론가들의 착시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심리적인 분석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연극계는 <오태석>이라는 거목의 극작가가 평론가들에게 군림하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평론가들은 그의 활동에 흡족(?)해 하면서 지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칭송하고 연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평론활동을 지속해왔다.

물론 그가 평론가들을 만족시켜 줄 요소는 너무나 충분하다. 우선 그의 희곡들이 문학적이고 ‘지적(知的)’이라는데 있다. 이른바 다른 장르, 특히 TV드라마와 같은 사실극과 차원이 다른 지성(知性)을 간직하고 있었다. 즉 생략과 압축, 은유적이며, 부조리적 요소를 간직하며 한국적인 언어구사로 평론가들의 ‘지적 만족’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지적이고 문학성을 선호하는 평론가들의 ‘엘리트주의’를 만족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평론가들이 비평가가 아닌 그의 추종자처럼 보이기도 했던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마저도 세월이 흐르자 어쩔 수 없이 ‘약발’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그의 대를 이을 <김지훈>이라는 작가가 등장하게 된다. 그가 ‘원전유서’를 발표하자 평론계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엘리트주의’ 코드를 또 다시 품어줄 새로운 작가가 혜성처럼 나타났다고 환호했다.

그렇게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그가 차기작으로 ‘풍찬노숙’을 발표하자 그만 실망하게 된다. 어쩌면 <오태석>처럼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엘리트주의’를 만족시켜주기에 너무 버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까지 평론가들을 흥분시킬 다른 극작가마저 출현하지 않고 있다.

단적으로 자신들의 ‘지적만족’을 위한 나름대로 학벌(學閥)을 갖춘 남성(男性)의 신인 극작가가 나타나지 않자 평론가들은 ‘허기’를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초연 극작가를 염원하게 되고, 아무리 많은 창작극이 공연되어도 늘 허기와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창작극 공연이 많아도 오히려 재탕(재공연)이라고 투정을 부릴 뿐이고, 번역극은 안중에도 없다. 마치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세계에서 한국보다 창작극을 많이 하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내가 ‘한국은 신작희곡의 낙원’이라고 말할 정도로 다작인 게 현실인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허기를 느끼는 이유를 알 수 없게 하고 있다.

작금의 우리 창작극 과잉현상은 되레 연극발전을 저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연극계의 모든 여건으로 미루어 우리나라는 일 년에 한편만이라도 좋은 창작극이 무대에 올라도 만족해야 할 처지다.

평론가 김윤철도 올해의 수작 ‘그게 아닌데’를 좌담에서 “요즘 보기 드문 우화를 가지고 현실에 대한 비판을 통렬하게 한 수작이다. ‘그게 아닌데’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미학적 형식이 무엇이냐에 대한 고민이 맞아 떨어진 작품이었어요.” 그런데도 일부 평론가들은 이 정도의 작품으로는 양이 차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 작가가 그들의 ‘지적만족’을 충족시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지 않아서 일까?

또 평론가들은 좌담 초반부터 민간극단에서 ‘초연 창작극’이 나오지 않는 것을 국공립제작극장의 탓으로 돌려 불만을 쏟아 내고 있다. 하긴 ‘풍찬노숙’을 남산연극센터가 아닌 민간극단이 소극장에서 공연했다면 평론가들이 여전히 희망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연극인(작가, 연출, 배우) 모두는 국공립제작극장에서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영광으로 여기고 있는 게 우리 연극계의 현실인데도 말이다.

또 그런데도 일부 평론가들은 국공립제작시스템이 “무대미술이나 새로운 테크놀로지 등으로 무대를 채우려는 것을 더 많이 보았습니다.”하면서 그마저도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테크놀로지도 연출가가 무대에서 효용 있게 적절히 사용하지 못한 것을 지적하고 탓해야지 이마저도 폄하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지금 세계 연극은 과학의 발달을 수용해 관객들을 사로잡고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평론가들은 이마저도 불만스러울 뿐이다. 작가 이윤택도 올 한해 “공연물이 다양해 다양성면에는 일조했지만” 이렇게 평가를 하는데도 평론가들만 “커다란 틀에서 보면 작품이 다양하지는 않죠.”

그저 일부 평론가들은 연출이나 연극성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숭배자가 혜성처럼 나타나 (소극장이든 1인극이든 상관없이) 자신들이 ‘짝사랑’할 수 있는 대상만이 무대에 현신하기를 염원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지적만족’ 때문에 현실감과 이성을 잃고 있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닐 듯싶다.

창작극은 희망이 될 수 없어

내가 몸담고 있던 국립극단은 창단의 목표가 창작극의 개발과 활성화라고 글로 명시되어 있던 단체였다. 하지만 창립 50주년이 되어도 기념할만한 작품조차 없어 옹색함이 그지없었다. 그래서 작가료를 2천만으로 올려보고 해도 좋은 창작극은 난망인 상태였다.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되어 있었지만 가장 커다란 난제는 대극장을 제압할 창작극 작가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소극장에서만 길들여진 원인도 없겠지만 대극장의 창작을 위해서는 어떻게 작품을 써야 하는가를 모르는 것도 커다란 이유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주문하면 출연자만 대거로 많이 나오는 작품이 고작이었다.

거기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대극장을 소화해 낼 연출가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립극단은 항상 외국인 연출이 자기들의 고전을 풀어낸 공연만이 칭찬을 받는 게 고작이었다. 이건 대극장 무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먼저 연출력이 시급함을 가르쳐주는 일이기도 했다.

좌담에서 세계평론가협회 회장으로 세계연극의 흐름에 밝은 김윤철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극의 작가는 연출가인데. 우리나라 연출가의 가장 큰 문제는 연출의 개념이 없다는 거예요. 작품을 어떤 콘셉트로 연출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몇 십년간 똑같이 반복해 온 총체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누가 해도 비슷한 연극들이 나오다보니 연출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가도 큰 문제인 것 같아요.”

연극 작가인 연출가가 실력이 있어야 부족한 극작을 보완하고 또 이를 통해서 작가들에게 창작의 영감까지도 불어넣어 줄 수 있는데, 우리의 연출가들은 작가가 써준 대로 연출할 뿐, 또 자기가 쓰고 자기 자신이 연출을 하니 상상력과 창의성이 더는 발휘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로 인해 대극장공연은 항상 헐렁한 어설픈 공연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연극이 평론가들의 소원대로 지속적으로 ‘초연 창작극’으로 명맥을 유지하려면 그나마 연출력을 향상시켜 아마추어리즘의 무대공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말이 좋아 실험이고 신선함이고 새로운 것이지 이는 미숙함, 완성도가 떨어지는 연극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연출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우리의 창작극은 희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걸러지는 장치 없이 현재와 같이 몇 푼의 지원금을 받아 마구잡이식(?)으로 관객을 모으는 현재의 제작현실로는 영원히 미완성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좌담에서 평론가 이은경이 “규모가 큰 공연보다는 상대적으로 <넙쭉이>나 <그게 아닌데>같이 규모가 작은 공연을 보면서 더 행복했어요.”해서는 한국연극은 영원히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따라서 연극이 (현실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대극장의 제작극장에서 탄탄한 완성도로 성공을 도모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도 자본이 대극장을 운영하는 제작극장에 있는 게 천만다행이다. 국공립극장 외에도 예술의 전당, 두산아트센터, LG아트센터 그리고 지자체들의 구민회관 등이 모두 대극장을 갖고 있다. 또 뮤지컬을 하기 위해서라도 대극장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이다.

거기다 경제적인 형편이 좋아질수록 관객들도 관람환경을 중요시하게 되어 안락한 대극장을 선호하게 되어 당연히 안정적인 제작환경의 제작물에 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겨우 소극장에서 예술성을 발휘한다고 1~2인 시리즈로 연명하는 민간극단의 창작극으로는 평론가들이나 만족시키는 게 고작일 것이다.

솔직히 아무리 노력해도 대형무대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며 채울 수 있는 재능 있는 우리 작가의 출현을 기대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뮤지컬이 대세를 이루는 것도 물론 춤과 노래를 관객들이 선호하기도 하지만 대사(문학성)만으로 관객들을 감동시키기에는 현실적으로 역부족하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이야기를 끌어가기 힘들면 노래로 슬쩍 넘겨 버리면 된다. 뮤지컬이란 일단 극적구성의 허약함을 (극적구성이 없어도) 노래로 대신해도 되는 이점을 가진 장르다. 그래서 작가보다는 음악가가 더 많은 활약을 해야 한다. ‘레미제라블’만 해도 그 방대한 소설을 짧은 이야기로 압축시키려면 노래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원작을 살리겠다고 언어로 대들면 지루해서 누구도 관람하기 힘들 것이다. 이거야 말로 이제는 문학성만으로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세상이 단순치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정녕 평론가들이 창작극을 원하고 이를 통해 한국연극이 발전을 꾀하고 싶다면 창작극은 지원금으로 소수자를 위한 무료공연을 한 다음에 졸작이 걸러지는 장치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료공연은 창작극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래야 관객들로부터 새로움으로 다가갈 수 있고 일종의 ‘매니아’층이 – 관객들이 항상 새로운 작가의 탄생을 지켜보는 사람이라는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 –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작극장이 무모할 정도로 작가와 연출가를 양성하기 위한 ‘주문생산’을 늘린다 해도 창작극의 육성은 쉽지 않을 것이다. 흥행성을 얻는다는 게 특별한 정치적 이슈가 없는 민주화시대에서는 너무나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처럼 아무런 걸러지는 장치 없이 어설픈 창작극으로 막을 올려 무차별적으로 흥행을 도모하는 것은 흥행적으로나 연극의 발전적인 측면에서 – 항상 어설픈 공연이 창작극이라는 인식을 관객들에게 심어 주어서는 지원금만 축내는 너무나 무모한 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요즘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는 한국영화도 겨우 흥행 성공확률이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많은 민간극단의 소극장공연이 이 시대에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한국연극이 명맥을 유지하고 그나마 조금이라도 창작극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또 연말에만 베스트 3이니 베스트 7하고 떠들다 기억에서조차 사라지는 수많은 창작극을 되살리기 위해서도 연출가를 양성하는 게 아주 시급한 과제다. 물론 이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수많은 고전’을 이 시대의 정신으로 표출해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 결실을 맺으려면 우선 ‘개념 있고 개성이 확실한’ 무대작가인 연출가를 양성하는 게 유일하고 최선의 방법론일 뿐이다.

좌담에서의 지적대로 “지금 작가연출가 연극 흐름이 유럽에서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데요. 확실한 개념을 가진 천재적인 연출가가 나타나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게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법이다.

설령 제작극장을 위한 대작이 발표되었다 해도 연출가가 이를 대극장 무대에서 풀어낼 재간이 없으면 소용이 없는 일이 될 뿐이다. 따라서 국공립제작극장은 창작극에만 목을 맬 게 아니라 연출가의 기량을 확대하는데 더 힘을 기우려야 한다. 최소한 이번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막을 올린 중국연출가의 해오름극장의 수준으로라도 한국의 연출 수준을 업그레이드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어쨌든 한국연극이 지나치게 극작가를 우대하고 창작극에 몰두하다가 이제는 창작극을 하지 않으면 예술성과 주체성이 결여된 (시대정신이 없는) 개념 없는 연극인처럼 인식되어 버린 게 사실이다. 연극인 자신들조차도 번역극을 하면 무언가 민망해하고 거북해 하는 게 현실이다. 이는 평론가들로부터 세뇌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들의 평판과 가치에 전 연극판이 아무런 비판 없이 순치되고 교화(?)된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마 평론가들은 모를 것이다. 한국의 내로라하는 연출가들이 평론가들의 평판에 얼마나 몸을 사리고 두려워하기까지 하는가를… 물론 이는 자신감의 결여가 주된 이유이겠지만,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글을 써서 만인이 볼 수 있는 자료로 남기는 일 것이다. 따라서 평론가들이 남긴 글에 얼마나 많은 연극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옛 국립극단에서 있었던 일이다. 연습 중에 막내단원이 와서 나에게 묻는다.

“연출 옆에 앉아있는 분이 누구에요?”

“평론가야! 왜?”

“갑자기 연출 목소리 톤이 달라져서요.”

한국에서 유명한 연출가일수록 평론가나 유력지 기자가 연습장에 나타나면 목소리의 톤마저 달라지는 게 현실이다. 나이 든 배우들은 으레 그러려니 하지만, 신참들에게는 그게 그토록 신기한 모양이다. 이게 한국연극의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평론가들이 문학성을 버리고 연극성을 찾으려 들면 또 현실을 알려고 들면, 그런 것들에 대해서 논쟁을 하고 토론을 하고 충고를 활성화한다면 한국연극은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얼마 전 중앙일보 최민우기자가 쓴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이해성이 자신의 작품 ‘사라지다’에 ‘연출의 변’을 이렇게 쓴 모양이다. 기사에 따옴표로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연극에는 감상적인 이야기를 일단 폄하하는 습관이 있다. 이성적으로 들려주는 건 머리에서만 맴돌다가 끝이 나지만, 정서를 건드리면 내안에 오래 머물다 깊이 있는 사유까지 들어가게 된다.”

착해서 조용히 한마디 한 소리겠지만 ‘이성적’ ‘머리’ ‘정서’에 담긴 것은 ‘피가 끓는’ 절규라고 느껴진다. 너무나 순치되어 이제는 ‘이성적’이 아니면 비예술적(반연극적) 행위를 하는 것처럼 인식 되어버린 게 현실이다. 이게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결론

등산로가 등산객들로 인해 오염되고 피폐해지면 정부는 ‘휴식년’을 선포한다. 그래서 한 동안 사람들이 그 등산로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폐쇄한다. 그랬다가 등산로가 원상을 회복하면 다시 등산을 재개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연극평론가들에게도 ‘휴식년’을 한번 실시해보면 어떨지? 앞으로 5년 동안 평론가들은 일체의 평론활동과 평가, 심사, 토론회에 나설 수 없도록 하는 거다. 이렇게 해서 한동안 한국연극의 종사자들이 평론가들의 평가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작업을 해보도록 하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의지로 막을 올리고, 또 관객들과 허심탄회하게 공감하도록 내버려두면 어떻게 변모할까를 한번 생각해 본다. 그렇게 하면 한국연극이 새로운 생명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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