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광주/ 이예은

<100% 광주>

이예은 (드라마터그, 연극학 강사)

 

단체 : 리미니 프로토콜 Rimini Protokoll
공연일시: 2014/04/26-04/27
공연장소: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관극일시: 2014/04/27 3 pm

 

 

+ Prologue

 

리미니 프로토콜(Rimini Protokoll)이 100% ‘도시’의 연작으로 기획한 <100% 광주>. 기획에서, 제목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통계학적인’ 데이터에 입각한 100%의 광주를 무대 위에 올렸다. 광주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별, 나이, 거주 지역 등을 기준으로 100명의 표본 집단을 선발하여 무대 위 배우들로 세웠다.

그리하여 이 공연은 정말로 ‘100%’의 광주를 실현하였는가? 공연은 정작 이 질문의 선 상에 놓여 있다. 그것은 공연이 시작되고, 끝이 나고, 끝이 난 이후에도 질문으로 남는 화두이다. 왜냐하면 이 공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 대한 모든 답변은 양적인 데이터와 그 데이터 하나하나에 숨어 있는 질적인 가치들, 그 사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프레임이나 기획적 컨셉을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그 공연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보통 기획 컨셉 혹은 형식이 그 공연의 전부인 경우가 그러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공연을 이야기함에 있어 다큐드라마의 형식, 혹은 피나 바우쉬가 이미 시도한 바 있는 전 세계 도시들을 테마로 한 도시 특정적 공연의 기획 같은 것으로 소개하는 일을 삼가고 싶다. 분명 명확한 형식적 프레임과 기획적 주제 의식을 지니고 있으나, 이 공연 자체는 형식과 주제를 모두 포섭하는 그 너머의 뉘앙스로 장악되어 있다. 형식과 내용이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이 하나로 통합되는 스타일(style)이 공연의 전체 안에 용해되어 있다.

 

# 포스트드라마 연극이 새로운 방식으로 찾아나가고 있는 낯선 형태의 ‘명확성’

 

이 공연은 관객이 통계 수치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다양한 무대 디자인으로 수치를 시각화한다. 무대 위 조감도를 벽면 스크린에 투사하여 원형 다이어그램을 만들기도 하고, 백 명의 사람들을 세 줄로 세워 객관식 질문의 답안을 색도화지로 표현하게 하기도 하며, 핀 조명으로 대상 집단을 비추어내기도 한다. 지극히 미술적인 방법으로 통계적 감각을 구현해내는 디자인이었다.

무대 디자인 뿐 아니라 배경 사운드며 라이브 음악, 배우들이 던지는 즉흥성을 가장한 질문과 답변들까지도 사실 많은 부분 계획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철저히 즉흥적이지 않은 퍼포먼스였다. 시종 계산으로 의도된 연출 프레임이 있었다. 단, 그것은 그 안에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놀 수 있는 최대치의 자유로움을 뒷받침해주는 프레임이었다.

 

인위적인 프레임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이 공연은 오히려 잘 짜여진 것, 계획된 것, 프레임이라는 장치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안에서의 즉흥, 유희, 균열이 능동적으로 드러났다. 확정적인 형식이 불확정적인 영토와 만남으로 인해서 그 모두의 실체를 드러내었다. 확정적인 것과 불확정인 것. 이 공연은 그것을 구분해 놓지 않고, 그렇다고 하여 그것의 경계를 값싼 논리로 전시해 놓지도 않는다. 매우 분명하게 연출된 확정적인 프레임과 매우 분명하게 어눌한 백 명의 배우들이 공존한다. 그 두 영역 사이의 갈라진 틈새에서 공연 속의 작은 사실들과 작은 사람들이 활개 쳐 움직이고, 뛰고, 울고, 놀았다. 확정적인 세계와 불확정적인 세계의 ‘경계’를 ‘사이’로 만든다. 그 사이의 부피 안에서 연극이, 객석이 투명해짐을 느낀다. 그것은 날카롭고 선적인 경계 너머의 두터운 양감을 지닌 순수함에 대한 체험이었다.

지금 시대에 소망하는 연극적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구원이다. 포스트드라마 연극은 오히려 드라마의 본질과 매우 가깝게 교착되어 있다. 단 어떻게 새로운 방법으로 연극적 구원을 실천할 것인가를 탐구한다. 그 새로움과 구원에 대한 희구가 동시에 맞물리는 지대에서 작품을 체험해 본 것이 1990년대 이후 아일랜드와 영국을 중심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코너 맥퍼슨(Conor Mcpherson)의 내레이션극, 포스드 엔터테인먼트(Forced Entertainment)-이었다. 예를 들어 이들의 작품은 명확성과 불명확성의 틈새를 벌여 그 사이에서 열심히 유희하는 과정으로 공연의 시간을 채운다. 관객은 관극 시간 동안 균열과 진실이 함께 호흡하고 공존하는 이상한 체험을 한다. 순간순간은 진실이나, 사실 그것을 한 데 모아놓고 보면 매우 기형적인 형태의 것. 진실과 균열이 공존하는 것을 공연의 시간 동안 체험한다. 실제로 포스드 엔터테인먼트의 작업 일지를 보면, 공연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즉흥성을 연출하기 위해 사전에 극도로 치밀한 계산과 준비를 해 놓는 것을 볼 수 있다. 명확성과 불명확성, 의도된 것과 즉흥의 것의 영역을 동등하게 탐구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진실은 균열된 것이야.” 라고 폭력적으로 고발하고는 무책임하게 끝을 내 버리는 모더니즘적 자세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내용은 같으나 자세가 다른 것이다. 이제는 그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 궁금하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희미한 명확성과 명백한 불명확성이 어느 한 지대로도 기울지 않고 동시에 공존해야 한다.

지금의 우리는 연극 안에서 뿐 아니라 삶 속에서도 매우 개별적인 현존과 체험, 그리고 어느 곳에서도 맛보지 못한 낯선 새로움이라는 화두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내용의 본질성과 형식의 혁신성이 동시에 요구된다. 하여 이야기에서, 연극에서, 혹은 삶에서 우리는 아주 섬세한 방식으로 진실의 한 파편을 체험하고, 그것이 기형의 균열을 일으킬지라도 그것이 진실이었음을 다시금 믿게 되기를 바란다. 매우 미시적인 진실과 거시적인 지형을 함께 보고 느끼는 것. 모든 것을 다 안다고 믿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한 없이 작은 존재인 것, 그리고 그 거시성과 미시성이 공존하는 것에 대해서 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 그것은 현재 매체의 주류를 담당하는 SNS의 자연스러운 방법론이자 지금 우리 시대의 존재론이기도 하다. 따라서 매우 파편적인 진실과 거대한 균열이 기형적인 균형을 이루며 공존하는 것은 비단 연극에서만 추구하는 세계상은 아니다. 우리는 삶 자체를 그러한 방식으로 추구하며, 그것이 또한 지금 우리 시대의 특질이자 한계이다.

 

 

# 그토록 하찮고, 그토록 고통스러운 우리들이 함께 ‘있었다.’

 

광주 표본 집단의 일원으로서 선발된 100명의 인원이 나와 차례로 한 마디씩 자기소개를 한다. 자기소개는 자기를 말해주는 대표적인 문장이 되어도 좋고 오늘의 기분처럼 사소한 것이 되어도 좋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이들은 이어지는 질문들에 “예/아니오”로 대답을 하며 원형의 다이어그램 위에서 움직이며 통계 수치를 무대 위에 그린다. 지극히 혼자만의 고민거리로 밖으로는 결코 발설될 일이 없을 법한 질문들이 대다수이다. 그 질문들이 무대 위에서 큰 소리로 발설되고, 이들은 무대 위에서 몸으로 그 질문에 답한다.

원형의 다이어그램 위에서 자유자재로 질문과 답변이 오가던 사이 다음의 질문이 던져진다. “탈세를 해 본 일이 있는가?” 공연이 시작되고 최초로 사회 금기와 관련된 질문이 던져진다. 이 질문을 기점으로 투표권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항상 투표를 하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사회 이슈에 실천력이 있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하여 암전 상태에서 금기의 질문들이 오간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서 익명성을 전제로 하자 민감한 질문들에 대해 갑작스럽게 불어나는 “예”의 조명등들. 이곳에서 사회와 사회 속의 개인이 보인다. 그리고 사회와 개인 ‘사이’의 세계도 보인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그 세계와 그 세계 안의 우리. 그 사이의 무겁고 조용한 비가시적인 부피.

“동성애를 느껴본 일이 있는가?”, “가정 폭력을 경험한 일이 있는가?”, “성매매를 해 본 일이 있는가?”, “낙태를 해 본 일이 있는가?” 그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자행되고 사실은 지속되고 있는 사건들. 그 보이지 않는 세계의 행위들이 보이지 않는 무대 위에서 질문되고 답변된다. 조용히 켜지고 꺼지는 조명등들만큼이나 그 곳에는 발설되지 못한 삶의 물량이 숨어 있다. 암전 속에서 대답을 하는 배우들만큼이나 관객들도 암전 속에서 이 모든 침묵의 답변들을 바라보고, 반응한다. 무대 위의 사람들과 객석 안의 사람들이 암전 속에서 함께 ‘있다’. 그 보이지 않는 세계. 분명히 우리 모두가 살고 있는, 그러나 발설하지는 못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 안에서 무대 위의 사람들도, 객석 안의 사람들도 그 세계 안에 함께 ‘있었다.’

우리가 함께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그 세계가 보이거나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은 어쩌면 중요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공연은 그것을 발설한다. 우리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지극히 은밀하든 은밀하지 못하든, 사실 그 세계에 함께 있음을 발설한다. 그것은 고발이 아니라 발설이다. 그것은 어떠한 과장도, 주장도, 허위도 아닌 사실이다.

이 공연에서 배우가 관객을 향하여, 관객이 배우를 향하여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있었다면, 그것은 우리의 비밀스러운 비극이, 우리의 비밀스러운 고통이 사실은 눈에 보일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라는 사실의 표현이었다. 이 공연의 힘은 은밀한 것을 공공연한 것으로 전환시켜주는 공공화의 힘이었다. 암전의 힘. 여러 가지 연출로 공연장에서 오랫동안 지속되는 암전을 경험해 본 일이 있는데, 이 공연 속의 암전만큼이나 공연을 실제적인 육체로 느껴지게 한 적은 없었다. 우리 세계 안의 그 어떠함도 솔직해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암전의 힘이었다.

 

# 군중 대 군중의 만남

 

비로소 객석 등이 켜지고 무대 위의 군중과 객석 안의 군중이 만난다. 기다려 왔던 만남이었다. 군중과 군중이 만난다. 이것이 오롯이 연극이 아닐까. 그 어떠한 한 사람의 목소리도 거치지 않은 채, 그 어떠한 한 사람의 존재도 그 사이에 두지 않은 채, 순수한 군중과 순수한 군중이 만난다.

서울 사람들이 광주 사람들에게 질문을 한다. 그러나 서울이며 광주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관객은 배우들이 솔직했던 만큼 솔직했다. 당신들은 이것이 정말 연극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늘의 공연 관객들 반응이 마음에 드는가. 오늘 거짓말을 한 사람이 있는가. 관객은 배우들에게 솔직함의 실체를 물었고, 배우들은 관객에게 솔직함을 대답했다.

 

 

+ Epilogue

 

이 공연에서 병렬되는 질문들은 너무도 단도직입적이고 너무도 즉발적이어서 질문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질적인 민감함은 통계적 건조함 뒤에 숨어버린다. 질문들이 지닌 비밀스러움과 답변들이 지닌 통계성 사이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면서 우스꽝스러워지고, 동시에 우리의 고통 또한 얼마나 하찮은가를 느끼며 위로받는다.

이 모든 냉소와 위안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당황스러움. 그리고 그 발설될 수 없는 질문들에 기어이 몸을 이끌며 통계적 태도로 답변을 하고 있는 백 명의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 내는 답변의 동선과 그 답변 속의 것들, 답변 속의 삶이 한꺼번에 전해진다.

우리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죽음도 피할 수 없다. 이 공연의 마지막 네 개의 질문. 10년 안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20년 안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30년 안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120년 안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 마지막 질문에 아직 걷지 못하는 아가들까지 부모님에게 안긴 채 무대 앞으로 나온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이다. 질문의 마지막 순간, ‘우리는 사실 그것을 모두 알고 있다.’ 라고 고백한다.

이 지점에서 이제까지 공연에서 이루어진 그 모든 질문들의 협소함이 한꺼번에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의 협소함도 함께 다가온다. 우리는 이토록 부분적이고 미시적이다. 그것은 통계학적 관점의 우리이다. 그러면서도 그 협소함이 우리 고통의 몸체 부분 부분들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 우리는 그토록 사소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가 그것을 함께 알고 있다.

무대 벽에 동그랗게 투사된 원은 무대 위에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작게 조감하는 렌즈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노란 달의 형체를 띠기도 한다. 이 동그란 원이 말해주는 것은 무대 위의, 지구 위의 우리 모두가 지닌 미시성이다. 그토록 미시적인 우리, 그토록 고통 받는 우리가 그곳에 함께 있었다. 그 어떠한 하찮음도, 그 어떠한 비극의 깊이도 동시에 외면하지 않은 채 기어이 그 하찮은 것이 곧 비극적인 것이고, 비극적인 것이 곧 그 하찮은 것이라고 고백하면서. 그 사소한 백 명들이 모여 그토록 발설할 수 없었던 것을 그토록 발설하면서, 우리가 함께 있었다. 우리는 사소한 이들이 모여 있는 그 커다란 우주를 보았고, 그들은 무대 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러나 공연장을 나왔을 때 막상 든 생각은, 100%의 광주라기보다는 단지 백 명의 사람들을 특별한 방법으로 만나고 왔다는 것이었다. 백 명의 사람들이 보이고, 들렸다. 그리고 그 백 명의 사람들을 만난 관객들의 얼굴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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