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라는 연극, 연극은 무엇이 아니다
-<늙은 소년들의 왕국>
양근애(연극평론가)
작/연출: 오세혁
제작: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
출연: 도창선, 이승기, 김태현, 최현미, 이승구, 윤정욱, 이종길, 김승준, 안진혁, 류성국, 송영미
공연 장소: 게릴라 극장
공연 일시: 2014/05/01-18
광야에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늙고 추레한 모습으로 2014년 서울역에서 만났다. 내복차림의, 말투부터 행동거지까지 영락없는 노숙자인 두 노인네의 만남만으로도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흥미롭다. 딸들에게서 버림받은 리어왕의 비극적인 대사를 돈키호테식 낭만적 낙관주의로 치환해내는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시공간에서 살았던 리어와 돈키호테가 서울역에서 만나 처음에는 대비되는 듯하더니 곧이어 서로를 비추고 결국 부둥켜안는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출발이다. 그들은 라면박스 하나로 시작되는 왕국을 건설한다. 이 가당치도 않은 왕국에 한 어린 백성이 찾아온다. 백성이 있기에 왕국은 살아남는다. 정치-이념과 밥-현실의 벽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뚝심이 늙은 소년들과 부랑자들뿐만 아니라 관객과 연극을 끝까지 버티게 한다. 한편의 우화처럼 무대에서 시작된 연극은 극장 밖을 타고 넘어 진짜 현실에 대해서도 묻는다. 연극과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사이 현장의 열기가 점점 높아진다. 도대체 이 연극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오세혁 작/연출 <늙은 소년들의 왕국>의 무대는 작고 어둡고 거의 비어 있지만 느낌표로 가득 차 있다. 리어도 돈키호테도 부랑자들도 느낀 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왕국을 잃고 떠난 리어왕과 왕국을 찾아 떠난 돈키호테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서울역, 폐허보다 어지러운 광야이다. 부랑자들은 바람이 불든 비가 오든 세상을 잊고 누워만 있다가 종교단체가, 여당이, 야당이, 자원봉사단체가 주는 초코파이 앞에 무람없이 줄을 선다. 리어와 돈키호테는 부랑자들로부터 밀려나 초코파이 하나도 제대로 얻지 못하는 신세지만 작은 것도 감사하며 박스 위에 작은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이 세계를 의심스러워하지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광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광야를 모르거나 스스로 광야였던 적이 있어서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두려움보다 광야를 사랑해서이다. 늙은 리어와 돈키호테는 비극과 희극으로 만나 서로의 두려움을 끌어안아 본 적이 있다. 이들을 본 부랑자들이 조금씩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지만 점차 그들이 보고 느낀 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이 되기 위해’ 꿈틀거리게 된다. 연극은 시종일관 어설프고 역동적인 소동 속에서, 우스꽝스러울만큼 즐겁게 놀면서, 견고해보였던 세계의 구조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단 한 명의 백성을 위해
이 왕국에 문득, 교복을 입은 단 한 명의 백성이 찾아온다. 부랑자들로부터 백성을 지켜내면서 리어는 진짜 왕이 된다. 돈키호테는 왕의 기사를 자처한다. 왕과 기사와 백성이 만들어내는 왕국의 시스템은 단순하고도 훌륭하다. 백성이 먹고 남은 음식을 기사가 먹고 기사가 남은 음식을 왕이 먹는다. 이것이 왕국의 경제시스템이다. 백성이 먹을 만큼, 아주 작은 양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기사 역시 자기가 먹을 만큼만 가져가고 왕이 자기가 먹을 만큼을 취하고도 남은 음식이 많은 상황, 왕은 남은 음식들을 미래를 위해 저축하겠노라고 외친다. 이런 우화 같은 장면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단 한명의 백성을 위해 왕이 기꺼이 노래하는 왕국, 백성의 순수함을 보고 노인 속에 잠자고 있던 소년을 꺼내 돌진할 줄 아는 왕과 기사, 그리고 그 순수를 ‘자존심’이라고 부르는 오세혁의 뚝심이 뭉클하게 와닿는다.
<늙은 소년들의 왕국>에는 이렇듯 시적 상징이면서도 재현 그 자체보다 더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는 장면들이 많다. 현란하게 마치 만화처럼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리어와 돈키호테 그리고 부랑자들을 보면서 어느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계의 구조가 문제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는, 아직 주저하고 있는 관객들에게 연극은 일단 힘을 내자고, 우리가 믿었던 순수한 소년을 다시 꺼내보자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식들이 나타나 리어와 돈키호테를 데려가고 짧은 인터미션 뒤에 시작된 2막, 부랑자들의 첫 대사는 방금 전까지 분명 보았던 왕국이 꿈이고, 환상이고, 몽상이고, 망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우린 현실 속에서 잠시 연극을 한 것”이라고 말하며 선명한 현실 위에 다시 드러눕는다. 왕과 기사를 잃은 소년 백성만이 꼿꼿하게 앉아 세계를 똑똑히 바라본다. 소년 백성의 이 오연함이 누워있던 부랑자들을 불편하게 하고 몸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결국 ‘함께’ 리어와 돈키호테를 찾아나서는 모험을 하게 만든다. 현실이 그렇듯 벽을 무너뜨리고 나가면 다시 벽 앞에 서는 형국인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주는 초코파이를 받아먹을 것인가, 본 것과 느낀 것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모험을 할 것인가. <늙은 소년들의 왕국>은 모험을 그치지 않는다. 불우한 죽음을 은닉하는 꽃밭 앞에서 황홀해하지 않는다. 정의로움을 비웃는 모든 권력 앞에서 무릎을 꺾지 않는다. 바라는 세상이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단 한명의 어린 백성이 있는 한, 멈춰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연극은 무엇이 아니다
‘정의로운 천하극단 걸판’의 연극을 본 적이 있는 관객이라면, <늙은 소년들의 왕국>에 여전히 살아 있는 걸판의 경쾌함과,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묵직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강렬한 에너지의 여운 때문에 객석에 불이 켜진 후에도 한동안 관객들이 극장을 떠나지를 않았다. 왜 변했냐고 물었을 때, 오세혁은 주저 없이 세월호 이후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세혁만큼 삶 자체가 연극인 사람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는 셰익스피어에게서 극단 경영인으로서의 모습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연극이 쉬지 않도록 끊임없이 레퍼토리를 생산해내고 싶다고도 했다. 안산에 연습실을 두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극을 하지 않는 날이 거의 없는 오세혁과 걸판의 연극인들에게 온 세상은 이미 연극이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믿자 우리가 둘러싼 세계를 그 세계가 비극일수도 희극일수도 실험극일수도 선동극일수도 신파일수도 로망일수도 멜로일수도 부조리일수도 있다. 그 중에 어떤 세계에 떨어지더라도 우리는 그 세계를 믿고 살아남자. 세계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도록 열심히 열심히 몸부림치자.”라는 극 속의 대사이자 걸판의 슬로건과 같은 이 말이 ‘연극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역설을 이끌어내게 한다. 잊고 있었지만 연극은 원래 무엇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른 많은 이름들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연극은 그저 연극일 뿐이다. 오세혁에게 스타일이 있다면 오직 자유로움일까. 적어도 <늙은 소년들의 왕국>에서는 매끄럽고 세련되지 않아도, 어떤 스타일이라 이름붙일 수 없어도, 연극은 이미 연극이고 그 자체로도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 같다. 그 다음은 무엇이 올지 기대도 걱정도 되지 않는다. 아마 오세혁은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늘 하던대로 연극 속에서 살고 있을 것 같다. 리어와 돈키호테가, 그리고 단 한명의 백성이 그랬듯 그가 사람들을 이끌고 이 도저한 놀이판을, 신나고 거룩한 모험을 멈추지 않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