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에서 ‘원로’는 어떤 존재인가?
우 상전(연극배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또는 세계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게 인류의 ‘고령화’일 것이다. 거기다 ‘저출산’까지 겹쳐 노동인구의 감소로 (경제, 사회적으로) 지금 세계는 인구의 고령화가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고령화’를 극복할 것인가가 최대의 이슈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현재는 일본이 최고의 장수국이지만, 향후 80년 후에는 한국이 1위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다.
이게 한국에서 더더욱 중요한 사회적 과제로 등장하는 것은, 통계에 의하면 현재 OECD국가(34회원국)중에서 ‘자살률’이 최고인데. 이는 외환위기 당시에 40, 50대였던 세대가 노령화에 접어들면서, 즉 그들의 자살률이 높이지면서 이런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목할 것은, 일본의 경우에는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갈수록 자살률이 오히려 낮아지는데 반하여, 한국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일본에서는 노인을 위한 복지가 괜찮은 상태에 있다는 암시일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노년층에 ‘불안장애’가 심하다는 통계도 등장하고 있다. 준비 안 된 노후에 공포감을 느껴 어지럼, 가슴떨림, 소화장애와 같은 여러 증상들이 노년층을 괴롭히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요사이는 60대 고령자의 취업률이 20대를 앞질렀다고 야단이다. 취업이 안 되는 자녀들을 대신해 부모들이 취업전선에서 비정규직의 설움을 맛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제는 누구도 ‘고령화’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점점 고령화가 심해질 것이며, 이로 인한 갖가지 문제점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연극의 경우는 좀 다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장로사회’를 이룬 조금은 특별한 조직구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더십과 고령화’, ‘고령화와 연극의 미래’ 등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게 사실이어서, 진즉부터 이에 대한 논의가 있었어야 했다.
‘세월호사건’ 이후에 온 나라가 우리 자신의 ‘민낯’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모든 국민들이 나서서 제대로 된 우리의 적나라한 현실을 보려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좀 더 통렬하고 처절하게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고 아우성이다.
따라서 ‘진보’가 대세를 이루는 연극계도 앞장서 우리의 ‘민낯’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때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연극계의 ‘고령화’를 통해 대학로 연극촌의 민낯을 한번 들여다보기로 하자.
한국연극은 왜 ‘고령화’에 주목해야 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민낯’을 들춰 본 적 없어, 문제성과 직면할 때마다, (매사에 걸쳐) 연극판의 ‘모순과 부조리’와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고령화’에 따른 여러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서도 거론해 본 적이 없어서 우선 생각해 보아야 할 게
1. 연극은 아예 ‘은퇴’가 없다. 따라서 ‘은퇴’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고령화’의 일반적 현상과 차별화가 필요하다.
2. 한국처럼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는 곳에서 연극계는 진즉부터 ‘고령화’가 미치는 영향력을 주시했어야 했다. 왜? 연극판이 흥행이 아닌 ‘지원금’으로 연명해와 ‘은퇴’가 없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원금과 고령화’에 대한 논의가 진즉부터 있었어야 했다.
3. 한국연극의 현실에서 공연활동을 하는 주축은 언제나 ‘젊은 층’이었다.
따라서 ‘관람환경‘도 당연히 젊은 층에 국한되어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리더십’은 언제나 고령자들에 의해서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연극의 ‘생산과 소비’는 젊은이들에 의해서 행해지는데, 이에 대한 평가나 각종 심사, 시상은 늘 ‘노년층’에 의한 리더십으로 이루어지는 모순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시대감각이나 상상력에서 항상 엄청난 차질(격차)을 빚어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젊은이들에 의한 새로운 생각이나 창작은 ‘고령화’에 막혀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리고 이게 사회변화의 부적응과 맞물려 연극의 활성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4. 한국은 ‘개인복지’가 미약하다. 따라서 고령의 연극인들도 현장에서 활동을 하려면 당연히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런데 생산과 소비가 ‘젊은 층’에 쏠려 있는 현실로 인해 당연히 노년층이 소외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로 인한 갈등과 불만이 존재한다.
5. 실제로 예술가만큼 정년(?)이 짧은 직종은 없을 것이다. 물론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평균적으로 창조성이 강한 장르일수록 짧은데, 대략 50세 전후가 된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그 이후의 활동은 ‘반복’에 그치고 있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새로운 창작이 힘들어지는 보수적인 노년층이 장악하면 당연히 시대감각의 변화에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한국연극은 아직 노후를 보내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측면이 많은 게 현실이다. 왜?
하나. ‘어른’에 대한 공경이다. 스승이라는 이유로, 또는 멘토, 자기에게 도움을 준 경력, 아니면 무조건적 ‘경로사상’ 등의 좋은 미풍양속이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자신도 늙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노인공경’의 ‘시범(?)’을 보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둘, 결정적인 것은 젊은이들이 힘을 쓰지 못하는데 –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지 못한데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할 재능이 출중한 후배들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해서 노년층이 안정적으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내려가지 않는 주요한 원인을, 여야에 걸쳐 차기 대권주자가 부각되지 못한데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아직 연극판에 ‘고령화’의 리더십이 지속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치 때문일 것이다.
셋, 거기다 대학이 많은 인력을 배출하니 공짜로(?) 출연시킬 배우가 넘쳐나 당연히 ‘지원금’만 주어지면 활동을 하는데 전혀 애로가 없는 게 현실이다.
따라서 아무리 ‘노령’이라도 예술에 대한 감각만 좋으면 (관객호응이 좋으면) 활동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 곳이 연극판이다.
어차피 지원금으로 운영되지, 뛰어난 후배그룹도 없지, 배우는 넘쳐나지, 솔직히 이런 점에서 연극에서의 ‘고령화’는 일반적인 ‘고령화’보다 극복이 훨씬 수월한 게 현실이다.
거기다 (‘경로사상’이 살아있어) 각종 심사위원으로 활약하지, 연극판에 좋은 자리가 나면 항상 우선권이 보장 되지, 국립극단의 단원이라도 되면 ‘종신단원’도 노릴 수 있지, 여러 측면에서 연극판은 ‘늙을수록 좋은 곳’임이 확실하다.
어차피 ‘흥행’이 존재하지 않아 세대교체도 희미하고, 그동안 쭉 어르신들이 지배해 왔던 ‘장로사회’의 전통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유럽처럼 연극관객의 주축이 ‘노년층’으로 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고령화’가 리더십에 미치는 영향
내가 연극동네에서 생활한지가 50년이 가까워 오는데, (내가 활동을 시작하던) 그 시절에도 이미 연극판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장로사회’를 견지하고 있었다.
하긴 그 시절에는 한국 사회가 (지금처럼) 변화가 빠르지 않았다. 한 예로, 그때만 해도 ‘낳을 수만 있으면 낳고 보자’가 대세여서 중요한 캠페인이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나 신속하게 변천을 하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따라서 ‘랩’도 소화하지 못하고, 컴퓨터도 다루지 못하고, SNS와도 거리가 먼 구세대가 이런 급격히 변화하는 시대에 리더십을 발휘하고, 심사와 평가를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버거운 일이 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미 10여 년 전에 ‘한국연극’지에 ‘노령화 사회’라는 글을 쓰기도 했다. 왜? 연극이 한국의 ‘장로사회’의 대표적 표본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아직껏 의사결정권과 각종 심사와 시상에 원로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 연극판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또 국립극단의 단원, 예술감독, 각종 심사나 시상, 연극대학 등 모든 곳에 원로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는 게 현실이다.
원로들은 왜 ‘가난탈출’에는 말이 없을까?
그런데도 (신기한 게)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는 원로들이 연극계의 최대 이슈인 ‘가난극복’에 대해서는 어떠한 방안도 내놓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리더십이 공공성이 관여된 문제에는 전혀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자신들은 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아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해 왔기 때문인가? 그런데 막상 은퇴를 하고 나니 일거리도 없고, 자신들이 연극을 제작하기에는 너무나 경제적 압박이 크고, 그냥 놀기에는 건강이 너무 좋은 게 탈(?)이 된 것일 거다.
하긴 연극판은 이미 옹색해졌다. 지원금을 낭비해 지원기관의 신뢰를 잃어 많던 지원금도 점점 줄어든 게 현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안정적이 일거리와 보수가 제공되는) 공공극장의 예술감독이나 극장장 자리를 노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교체기만 되면 연극계가 온통 소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가난으로 인해 ‘고령화’를 해결할 방안을 찾을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여기서 당연히 고령자 자신들도 ‘예외자’가 아닌 현실이 되어 버린 게 사실이다.
자기 성찰이 필요한 연극계
따라서 이제는 ‘고령화’에 의한 리더십의 문제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이처럼 리더십이 이른바 ‘연공서열제’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면 당연히 경쟁이 없어져 이를 인정할 ‘우열’의 근거가 사라지고, 자연히 누구도 남을 인정하지 않는 풍토가 조성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신이 아닌 다음에는 한 개인이 모든 재능을 다 갖고 태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사안에 따라 ‘우열’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즉 무엇은 잘하는데 무엇에서는 서툴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처럼 ‘고령화’ 리더십이 작동하면 젊은층은 항상 부족하고 노령층은 언제나 우세한 것처럼 인식되게 마련이다. 솔직히 이런 점에서 연극계는 아직도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젊어서 한번 들은 칭찬이 그만 ‘교만’에 빠져버리는 허점을 노출한다. 뭐든지 잘한다는 자신감을 스스로 ‘자가발전’시켜 노년에도 자기도취에 빠지게 된다.
거기다 매스컴이 기사를 만들기 위해 근거 없이 추겨세우기라도 하면 ‘자만심’은 고착되어 버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이게 후배들에 의한 ‘개인숭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남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으로 발전하게 된다.
둘째, 이러니 중견을 넘어서면 모든 연극인이 근거 없는 ‘자만심’에 빠져 사회변화에 따른 부적응으로 발전에 크게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게 현실이다.
왜? 인간이란 항상 자신에 대한 ‘부족함’으로 인해 발전의 동력을 얻게 되는 법인데. 모두가 근거 없는 자만심에 빠져 있으니 노력을 게을리 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지원금도 이런 ‘우열’에는 별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 공공성을 띤 기금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냉철히 생각해 보면) 일본의 ‘스즈끼’정도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또는 좋은 저술, 논문을 남겨 국내외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조금도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렇다고 연극계를 위해 ‘발전기금’을 내놓을 정도의 경제력도 보이지 못하면서, 연극인들이 스스로 자만심을 ‘자가발전’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정신질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콤플렉스의 반작용’이라고 폄하하기에는 너무나 심각하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진정한 리더십이란?
한번 가정을 해보자. 일체의 지원금을 거부한 채, 모두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단체를 운영하며 창작활동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 후에 시간이 지나면, 연극판에서 살아남는 자가 있고, 당연히 사라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전혀 흥행성이 없는 작품을 갖고도 고급관객들을 모으는 재능을 보이는 단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런 자들을 ‘리더’로 또는 ‘롤모델’로 인정하게 될 것이다.
설령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다 해도, 최소한 스스로 ‘자성’이라도 확실히 하는 수확이라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별 볼일 없는 지원금이 자만심을 연장시키고 있는 것이다. 살아남기보다는 그저 ‘연명’을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우열과 경쟁’이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아도취’라는 특효약을 복용하면서 걱정 없이 연극인생을 유지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경쟁체제’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러니 당연히 진정한 ‘리더십’이 존재할 수 없다.
더 난감한 것은 이런 경우다. 유인촌이 서울문화재단을 운영할 때의 증언에 의하면, 지원금 심사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원로들이 직접 나오셔서 밖에서 기다리며 심사를 지켜본다는 것이었다. 나름 ‘압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솔직히 리더십이 이렇게 운영되면 ‘경쟁체제’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은퇴’라는 말은 당연히 사라지게 마련이다. 그동안 이런 리더십이 연극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좋은 자리’가 나면 온갖 소동이 벌어진다. 자신들이 훌륭한 자격을 갖추었다는 자만심이 폭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는 어떠한 ‘리더십’도 발휘될 수가 없다.
그러니 연극계에서는 무슨 일만 벌어지면 우선 ‘진정성’부터 의심하게 되는 버릇이 생기게 된 것이다. 예를 들어 국립의 예술감독의 사건만 해도 이권이 사라짐과 동시에 모든 반성과 차후에 대한 논의도 동시에 사라져 버리게 된 것이다. 이제는 ‘소통’에 대해서도 누구도 거론하지 않는다.
이런 식이니 항상 의사표시(소동)가 ‘진정성’에서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따라서 진정한 리더십이 생길 수가 없다. 매사에 연극촌 사람들은 “무슨 ‘꿍꿍이’가 있겠지?” 이런 식으로 대응하는 게 습관화된 게 사실이다.
어느 날 젊은 후배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갑자기 앞에 있던 후배가 외치는 것이다. 나를 향해 “국립극단 단원이 되고 싶은 거죠.” 얼마나 놀랐던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날아갈 정도였다.
참! 노년에 몇 푼 받자고 그런 오해를 받아가며 살아야 하나 하는 슬픈 생각과 단원들이 뽑히게 되면 얼마나 후유증이 클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이러니 노령의 여배우가 국립극단 단원제의 부활을 실세 국회의원을 통해 청와대에 청원한다는 소문이 나면 “자기가 종신단원이 되려고 하나?”며 수군대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니 우리 동네에서 어떤 리더십도 신뢰를 얻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북한체제와 ‘한국연극’의 비교
(설명하기 복잡한) 연극계를 이해하려면 먼저 북한과 한국연극을 비교해 보는 게 가장 빠른 길일 것이다. 왜? 유사점이 많기 때문이다.
북한은 중국과 똑같은 사회주의를 채택하고도 어째서 저런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굶주리며 살고 있는가를 떠올리면 답답할 지경이다.
따라서 북한을 이해하면 ‘한국연극’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유사점(공통점)을 알아보기로 하자.
1. 먼저 ‘개인숭배’다. 연극계도 북한처럼 전혀 존경할 근거가 없는 개인숭배가 횡행하고 있어 ‘가치기준’에 혼돈이 야기되고 있다. 실례로 들 수 없어 이해가 쉽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러 경로를 통해 이런 변칙이 만들어지고 있다.
2. 시장경제를 배척하고 배급제(연극은 지원금)를 유지한다. 따라서 개인들 간의 치열한 ‘우열경쟁’이 실종되고 있다. 자본주의에 의한 시장경제체제의 강점은 치열한 ‘경쟁’을 통한 발전과 성장에 있다.
이런 환경으로 연극인들이 (북한처럼) 경제에 대한 개념을 상실하고 있다. 아예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에 관한 무관심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아 자본주의체제에 적응이 불가할 정도다.
3. 체제유지에 급급해 세계를 향한 개방과 개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연극도 마찬가지다.
4. 북한이 ‘주체사상’이라는 허망한 이론을 추구한다면, 연극에는 비현실적인 ‘예술지상주의’가 판을 친다. 그래서 이념(이론)은 강하고 테크놀로지는 약화돼 있어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다.
5. 북한의 고위직에는 ‘은퇴’가 없다. 숙청당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기득권을 유지한다. 연극도 세대교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6. 사회학에 대한 개념자체가 부재해 ‘사회적 인식’과 저항’이 없다. 연극판에도 전혀 사회학적 개념이 없어서 대체로 저항감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산다.
7. 북한의 지도층은 호강을 하며 살고 있다. 연극도 ‘연극을 팔아’ 나름 부를 이루는 양극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8. 북한은 ‘가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지 않는다. 미국이나 남한을 적으로 간주해 인민을 호도하고 있다. 이건 연극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가난’을 정부의 문화정책이나 지원금의 미비로 호도하고 있을 뿐이다.
9. 북한과 연극인의 정신적 공통점은 ‘자아도취’가 심하다는 것이다. 북한은 선거가 없는 의회 제도를 선택하고 있고, 언론 등의 비판세력이 존재할 수 없어 그렇고, 연극은 진정한 비판세력이 없고 ‘자아비판’도 없어 모두가 ‘자아도취’에 빠져 있다. 따라서 ‘우물 안의 개구리’를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10.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핵무기란 따지고 보면 이로 인해 ‘세계대전’과 같은 커다란 전쟁을 막아내는 훌륭한 ‘평화의 무기’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북한처럼 ‘불량국가’가 소유하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이는 아무리 좋은 정부의 정책이나 지원금 제도를 시행할지라도, ‘한국연극배우협회’처럼 이를 ‘불량하게’ 사용하면 북한의 ‘핵무기’처럼 오히려 발전과 생존의 위험성만 높일 뿐이다.
젊은 연극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역사학은 전 인민의 2%가량이 경제적으로 극빈자가 되는 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민중에 의한 ‘반란’이 일어나는 게 그동안의 인류사회학적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제정 러시아의 비참한 ‘농노’들의 생활이 결국 ‘볼셰비키 혁명’을 불러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 ‘복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요사이 서양 경제계에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의 소득집중에 대한 연구도 이에 기초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과 연극계를 보면, 되레 모두가 극빈자 상태인데도 ‘반란’은 고사하고 아예 이에 대해 말하는 사람조차 없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분명 특권층은 나름 부를 향유하고 있고, 이들이 판세를 ‘억압’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소외자들은 아예 무감각적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다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솔직히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시위, 특히 시골노인들이 펼치는 각종 반정부적 시위를 그들이 자진해서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시위의 배후에는 여러 진보, 환경단체들의 후원과 ‘학습’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의 젊은 연극인들은 이런 시위마저도 벌이질 못한다. 왜? 이를 뒷받침할 ‘학습’과 조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연극계의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정치적 활동’에만 매달리고 있고, 반핵, 반미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도 자신들의 일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연극판에만 들어서면 원로들의 기에 눌려서 일까? 아니면 ‘무늬만’ 진보인 ‘이념’만의 신봉자이기 때문일까?
이제는 ‘건물임대료’가 너무 올라 연극을 제작해봐야 누구도 손해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러 생존이 절대적으로 위협을 받는데도, 또 (2%에 해당하는) 젊은 연극인들이 태반인데도 ‘반란’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생존요구’마저도 외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겨우 많아야) 30명 정도 ‘생계’를 유지하는데 그치고 말 국립극단의 단원제에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이 탈락하면 ‘모든 것을 부정하는’ 좌절을 보이는 게 우리 젊은 연극인들의 초상이다.
왜 그럴까, 바깥 행사에는 열심히 참가하면서도, 왜 안에서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것일까?
하나, 학교에서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한 채 사회에 진출해, 연극판에서 젊은이들이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기가 죽은 채 현장으로 진입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 학교라는 게 학점을 따고, 학위를 받는 곳이어서 항상 윗사람을 따르는 자세(태도)로 임한 게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셋, 학생이나 교수들, 모두가 연극이 다른 (예체능) 대학들과 달리 운영되어야 하는 원리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또 이런 특수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교육이 진행되기 때문일 것이다.
1. 연극과 다른 장르와의 비교
우선 ‘연극’을 동일한 무대공연 장르인 한국무용, 발레와 한번 비교해 보자.
이들 장르는 대학을 졸업하고 국립이나 시립 등의 ‘공공단체’에 입단하지 못하면 스스로 자기들의 ‘전공’을 포기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비싼 레슨비를 들여 공부해 대학을 졸업해도, 이런 공공단체의 단원이 되지 못하면 스스로 ‘데뷔’를 포기한다. 그러니 당연히 사설단체가 없어 자기의 기량을 펼 마땅한 곳도 없다.
그래서 대개는 입시학원에서 레슨에 종사하는 게 거의 관행화 되어 있으며, 이는 거의 모든 장르가 유사하다. 그렇다고 공공단체가 많은 것도 아니다. 발레의 경우는 국립단체 하나에, 사설단체인 유니버설 발레단이 고작이다.
그런데 유독 연극만은 다르다. 국립과 시립, 도립극단이 있지만 누구도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 공공단체의 단원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자기의 전공을 포기하는 법은 없다.
그래서 대학로에 많은 단체와 소극장이 존재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연극대학은 다른 장르보다 교육과정이 더 광범위하고 심화되어 있어야 한다.
가령 무용의 경우는 이제 겨우 TV에 ‘댄싱9’ 등의 연예프로가 생긴 정도다. 그런데 연극전공자는 연극이 아니어도 오래 전부터 뮤지컬이나 영화나 TV 등에서 얼마든지 활동이 가능했다.
그래서 연극대학으로 학생들이 몰리는 것이다. 대학졸업이라는 ‘스펙’도 쌓고 흥행 장르에 데뷔해 성공도 기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교육도 (이런 특수성을 직시하고) 이에 알맞은 교육이 이루어져야, 졸업생은 물론이고 연극대학도 생존력을 갖고 현실의 변화에 적응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학마저도 ‘교육부 탓’만 외치며 사회의 변화를 외면한 채 관행과 구태에서 벗어날 궁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연극교육이 갖는 ‘모순’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현재의 ‘대학교육’ 상황을 구체적으로 한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연극인들의 ‘고령화’을 포함한 제반 과제와 연극의 미래를 명확하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국에서는 어떻게 연극인으로 ‘데뷔’를 해서 활동을 하다가 노후를 맞게 되는가를 짚어보아야, 고령화와 (교수 노령화에 따른) 대학교육과의 관계도 동시에 예측이 가능해질 것이다.
1) 현행 연극대학의 입시제도는 순전히 입시생 개인의 ‘예능적 재능’에 의해서 입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전공대학과 달리) ‘수능점수’에 의해서 입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입시생의 ‘예능평가’, 즉 실기평가에 의해 입학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이점은 한국의 모든 예체능 대학의 공통된 현상이다.
2. 그런데 그들을 가르칠 연극대학의 교수임용은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즉 예능에 대한 평가가 없어도 ‘연극과’ 교수에 임용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학생은 ‘예능인’을 뽑으면서 그들을 가르칠 교수는 ‘비예능인’들이 주도한다.
그러니까 무용대학이나 음악대학, 미술대학의 경우처럼, 실기가 가능한 무용가나 성악가, 연주가가 학위를 취득해 교수로 임용되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학이 예능자를 뽑아서 비예능자가 가르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불가능한 교육제도를 시행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연극대학의 교육시스템인 것이다.
진짜로 교육부를 향해 저절로 ‘욕이 나오게’ 되어 있는 제도로 유지하고 있는 게 연극대학이다.
이번에 ‘서울대 성악과 사태’로 알 게 된 게, 교수 임용을 원하는 자가 재학생들과 기존교수들 앞에서 직접 노래를 부르는 임용고시(?)를 치르며 교수가 된다는 (연극계에서는 상상하기조차도 어려운)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들 제자들이 세계무대에 충분히 성악가로서 진출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연극대학은 어떤가? 아무런 예능기술이나 무대경험이 없이도 국내에서, 또는 해외유학을 통해 ‘학위’만 취득하면 누구나 연극대학의 교수가 될 수 있도록 제도화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다 교수정년이 자그마치 65세라는 제도에 묶여, 변화가 빠른 한국현실에서 연극대학은 전혀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런 실정이니 졸업생들이 현장에 나와 제대로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게 노령에 이르러서도 후배를 가르칠 기술도 갖지 못한 채 그저 평생 발언권도 없이 음성적으로 ‘지원금타령’만 하다가 생을 마치게 되는 ‘근본 원인’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3. 잘못 끼워지는 ‘첫 단추’
이런 현실로 지금 연극대학은 엄청난 모순에 빠져 있고, 이게 연극발전의 암적 요인이 되고 있다.
가령 이공계 출신이 극작가가 되는데 (문학적 재능만 있으면) 대학의 전공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 현실에서 ‘연극학’은 대학에서 전공하지 않아도 배우, 연출가, 극작가가 되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세상에는 ‘의학’이나 ‘법학’처럼 전공자가 아니면 전문성이 없어 직업인이 될 수 없는 분야가 존재한다. 하지만 고전 무용, 발레나 성악, 악기연주 등 몇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예술분야, 즉 문학, 작곡, 안무 등은 사실상 전공이 무용하다.
연극은 더 심하다. 전 분야에 걸쳐서 전공과 무관한 게 현실이다. 즉 극작, 연출, 연기, 무대미술 모두가 다 그렇다.
따라서 되레 연극대학이 없다면, 스스로 원하는 사람들만이 연극인으로 ‘입신’을 도모하게 되어 모든 부작용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전공으로 인한 취업의 문제도 거론되지 않을 것이고, 부실교육의 여론도 없을 것이며 이로 인한 저질화 시비도 없을 것이다. 연극전공자들이 전공에 따른 ‘생존의 압박’에 시달리지도 않을 것이고, 이로 인한 불합리한 고령화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연극대학으로 인해서, 외려 장점보다는 연극계 전반에 많은 문제점이 파생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러시아처럼 연극교육이, 즉 의학처럼 전공자가 아니면 연출, 연기 등을 현장에서 작업하기 힘들 게 교육과정이 탁월하게 이루어진다면 이런 불합리가 다 사라지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게 되레 연극발전과 고령화에 부담만 주게 된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는 게 한국의 연극대학인 셈이다. 그래서 일본의 명문 와세다 대학은 연극과가 ‘이론’만 전공하게 되어 있고, 일반 대학에도 ‘연극과’는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쩌면 대학서열이 존재하는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학’에 연극과가 존재한다면 상당히 많은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연극대학을 만들었으면 이로 인한 부작용과 ‘시비거리’가 없게, 즉 다른 전공자들이 넘볼 수 없는 시대적 적응을 위한 광범위하고 철저한 교육이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연극과’가 존재할 가치와 정체성을 가질 수 있고, 이로 인한 연극계 전반의 모든 불합리가 상당부분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대학이 ‘입시장사’를 한다는 비아냥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젊은 연극인들이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될 것이다. 그런데 외려 연극대학이 젊은이들의 갈 길을 막는 주체가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4. 현실에 대한 또 다른 조망
여기 대학의 현실을 알게 하는 흥미로운 글이 있다. 문학평론가이자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도정일’학장의 글이다. 대학 1학년의 핵심 ‘교양 강의’를 담당하는 ‘익명의 어느 교수’의 사례를 들어, 우리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의 19살짜리 대학 신입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고민거리를 갖고 있을까를 동료교수의 ‘수강보고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학생들의 가장 놀라운 고백은 “한번도 ‘생각’이라는 것을 해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우리 머리로 찾아내본 일이 없고, 어떤 질문에 대한 해답이나 응답을 우리 머리로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한국 교육의 실상을 아는 사람들은 이런 그들의 고백의 진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 대학에 다니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사회는 왜 이 꼴로 돌아가는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는 없는가. 삶의 가치는 무엇일가’ 등등의 물음을 해본 적이 아예 없다고 말하고 있다.
중등교육 6년 동안 ‘정답찾기’ 훈련만 받다가 대학에 온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어렵고 낭패스러운 질문이 없을 것이라며, 바로 이런 질문과 고민거리를 붙들고 씨름하게 하는 것이 삶을 준비시키는 교육이고,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긴 이야기가 필요 없을 것이다. 이런 결핍이 (예술전반에 걸쳐) 한국연극의 현실이 왜, 이렇게 굴러가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내가 책을 낸 게 2006년인데, 그때 나이 먹은 모 대학 조교에게 들은 말이 고작 이거였다. “솔직히 우리 애들은 책을 읽을 줄 몰라요.” 그러니 앞에서 말한 대학의 풍경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된 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 모두는 이미 현실을 예측하고, 결과를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자세로 임했어야 한다.
왜? 이런 풍토라면, 한국연극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술’이기를 포기했어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어째서 미국도 아닌 한국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뮤지컬’이 이토록 공연판을 휩쓸고 있는가를 눈치 챘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젊은이들에 의해 오래 전부터 한국연극이 제작되고 있는 현실을 알았어야 했고, 이런 젊은이들이 우리 연극관객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어야 했다.
‘생각’에 서툴고 ‘책’을 읽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 ‘예비연극인’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어야 했다. 그리고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 수 있는 처지에 있는 교수들이 나서서, (이를 전혀 모른 체하며) 한국연극을 평가되고 심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자기 제자들이 어떤 연극인이 될 것인가. 그리고 이들이 현장에 나가면 한국연극이 어떻게 변모할 것인가. 그렇다면 연극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등의 물음에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를 전혀 외면한 채 한국연극을 이끌려 온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교수들은 한 번도 자신들의 자괴감을 피력하거나 갈등하는 기색 없이 한국연극판에서 ‘예술론’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모순의 극치인가? 이러니 연극판이 ‘모순덩어리’며 ‘부조리의 산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요사이는 졸업하기가 무섭게 ‘알바’에 몸을 던져야 해서 자기 수련이나 재교육의 기회도 갖기 힘든 게 우리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오래 전부터 자기 제자들의 수준에 한국연극의 질적 수준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정성을 보이든가, 아니면 제자들의 수준을 높일 궁리와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든가 했어야 했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선배(원로)들과는 다르게 태어났고 성장했다. 이제는 생활의 필수품이 된 TV만 해도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인) 60년대 초에 한국에 등장한 걸로 기억한다. 그러니 우리 원로들은 청년기를 훌쩍 넘기고서야 TV문화를 겨우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 연극인들은 어려서부터 컴퓨터 게임 등의 각종 IT기기들을 즐기면서 자란 세대다. 이런 친구들에게 원로들이 원하는 유럽식의 ‘고전적 예술주의’는 생리적으로 맞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평가와 심사 때마다 들이대는 것은 ‘올드한’ (유럽식의) 선배들의 감각과 잣대뿐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미 민주화 이후 한국은 엄청난 변화에 휩싸이고 있는데. 한국연극은 여전히 오태석, 이강백, 이윤택 등의 작가에게만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유럽처럼 올드한 관객들이 극장의 객석을 채워주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러니 현실과 이상이 밸런스를 맞출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평가와 시상, 지원금 배분은 ‘올드한’ 예술을 꿈꾸는(?) 선배들이 하고, 현장에서의 ‘생산과 소비’는 젊은 ‘영그룹’이 담당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게 우리 연극판의 현실이다.
선배(원로)들에 대한 고언
이제는 연극을 (옛날처럼) ‘특수층’만이 하지 않고 ‘일반화’된 현실에서 선배들의 그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중대한 사안이 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에 사는 (연극계) ‘어르신’들이 진실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젊은 후배들의 삶의 형태, 한국의 전반적인 젊은이들의 생활환경을 주시하는 것일 거다.
그리고 많은 선배 연극인들이 연극인이기 전에 ‘대학교수’라는 직함을 갖고 학생들과 접하면서 이들을 연극인으로 배출시키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일 거다.
그렇다면 누구보다도 그들의 삶과 미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왜? 연극의 미래와 활성화가 이들 손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연극은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해 인간의 ‘사고기능’을 무대에서 승화시키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거기다 한국의 연극대학 교수들은 연극이 그토록 ‘예술’이기를 누구보다도 바라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와 모순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한국연극의 과제와 이슈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제라도 이런 ‘모순제거’에 어르신들이 온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지금 (평소에는) 아무 말도 못하던 젊은 친구들이 선거철만 되면 서슴없이 야당후보지지 서명을 하며, 자기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보면, 진보정파나 좌파가 정권을 잡으면 자신들이 기를 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걸 기대하기도 힘들 뿐 아니라, 그들에게는 더 긴요한 현안은 구석에 처박힌 자파인 ‘민예총’의 생존에 더 힘을 기울려야 하는 일이다. 왜? 한국은 이미 이념적으로 서로 나누어진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수정권은 문화중흥을 외치기 전에, 또 “왜 예술문화판은 좌파일색일까?”하며 불만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더 깊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럴 때 연극계 원로들이 나서서 정부에 성명서라도 발표해 연극판의 문제해결을 위한 정책제안이라도 해야 하는데, 외려 (젊은 연극인들을 제키고) 음성적인 기득권 확보(지원금확보나 자리다툼)에만 더 열을 올리는 사람들처럼 보이게 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답답한 선배들과 갈라진 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배들이 공존하는 연극판임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좌우간 이제는 ‘연극의 위상’도 엄청나게 추락한 게 현실이고, 계속해 고령화가 심화되면서 원로연극인들의 위상에 대한 근심도 커져만 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누구도 ‘고령화’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선배들의 미래는 후배들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아는 것일 거다.